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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설립되어 100년도 넘게 한국영화계의 역사를 쓰고 있는 단성사가 지난 23일 최종부도처리 되면서 단성사를 사랑했던 영화 팬들의 아쉬움을 사고 있습니다.

1910년에 태어나신 할아버지와 1934년에 태어나신 아버지, 그리고 1961년생인 나. 이렇게 3대째 서울에서 나고 자란 우리 가족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서울토박이들이기에 저마다 단성사에 대한 추억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수일도 되고 찰리 채플린도 됐던 할아버지

단성사의 옛모습
 단성사의 옛모습
ⓒ 서울육백년사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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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애야, 김중배의 다이아몬드가 그렇게도 탐이 나더냐. 에이. 악마. 매춘부. 만일 내년 이 밤, 내 명년 이 밤, 저 달이 오늘같이 흐리거든 이 이수일이가 심순애 너를 원망하고 오늘같이 우는 줄 알아라."

할아버지는 풍류를 즐길 줄 아는 분이셨던 모양입니다.

막걸리 한 주전자에 거나하게 취기가 오르면 어김없이 동네사람들을 모아놓고 당신의 젊은 시절 단성사에서 보셨다는 신파극 <이수일과 심순애>의 한 장면을 들려주시거나 찰리 채플린의 우스운 걸음걸이를 흉내내곤 하셨으니 말입니다.

신파극 변사를 흉내내던 할아버지의 요상한 목소리와 과장된 말투가 왜 그리 우스웠던지 동네사람들은 모두들 그 자리에서 포복절도하기가 일쑤였답니다.

서슬 퍼랬던 일제강점기. 가난한 민초였던 할아버지가 무슨 돈으로 '영국신사(양복 입은 사람을 말함)'나 드나들었다는 단성사 출입을 했을까요. 아버지께 물으니 "할아버지가 젊은 시절 단성사에서 허드렛일을 도와주는 잡부 일을 잠깐 하셨던 것 같다"고 하십니다.

공부도 어깨너머 배운 공부가 오래 가듯 할아버지도 어깨너머 보신 신파극과 영화의 기억이 오래 남으셨던 모양입니다.

개구멍으로 극장 들어갔다가 벌 섰던 아버지

1930년대 신파극과 무성영화를 접하고 그것에 반해 후에도 영화든 악극이든 가리지 않고 즐기셨다던 할아버지에 비하면 아버지는 영화보기를 그리 즐겨하셨던 분은 아닌 듯 합니다. 

사는 것이 바빠 철이 들고 난 후로는 극장을 찾아본 일이 없었다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에게도 단성사는 유년의 추억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영화 볼 돈을 누가 주냐. 집안에 먹고 살 것도 없는데. 그래도 동네 장난꾸러기들하고 도둑 구경은 많이 하러 다녔다. 그 시절에 돈 내고 영화 보는 애들이 어디 있어. 개구멍으로 들어가다가 기도한테 잡혀서 매도 맞고 벌도 서고 그랬지. 참 오래된 일이구나. 그런데 무슨 영화를 봤는지는 이제는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네."

최근의 기억부터 먼 기억까지 서서히 사라져간다는 치매. 치매는 어느새 아버지의 어린 시절까지 조금씩 잊혀지게 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아버지의 잊혀진 기억이 안타까운지 엄마가 대신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내가 어릴 적엔 단성사보다는 왕십리 광무극장과 신당동 신부좌에 많이 갔었다. 광무극장은 왕십리에, 신부좌는 신당동에 있었거든. 영화를 보러 일부러 문안(사대문 안-종로를 말함)에 갈 일은 별로 없었는데 아마 몇 개는 단성사에서 본 것 같아. 당신 기억 안 나요? 나는 <유관순>도 보고 <아리랑>도 보고 그랬었는데."

제목도 스토리도 전혀 기억하지 못하시는 아버지에 비하면 엄마는 어린 시절 보았던 영화의 줄거리와 장면까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계십니다.

"그때 내가 열 살이나 되었을까? 누구랑 갔었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데 왕십리에서 단성사까지 전차를 타고 갔을 거야. 영화 제목이 <조국의 어머니>라고…. 죽은 남편 대신 아내가 독립운동을 하고 남편의 원수도 갚고 그러는 내용인데, 마지막에 그 엄마가 가슴에서 태극기를 꺼내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거든. 그 때 사람들이 박수치고 같이 울고 그랬지. 어릴 적엔 고모들 손잡고 영화도 보러 다니고 그랬는데 네 아버지랑 결혼해서는 영화의 영자도 구경 못했다."  

여고시절 가발 쓰고 극장 갔던 나

영화 <겨울여자>. 드라마 <엄마는 뿔났다>에 나오는 장미희가 주연을 맡았다.
 영화 <겨울여자>. 드라마 <엄마는 뿔났다>에 나오는 장미희가 주연을 맡았다.
ⓒ 겨울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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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가 일제 강점기였던 1930년대에 단성사에서 신파극 <이수일과 심순애>를 보면서 노동의 시름을 달랬었다면, 엄마는 1949년 해방된 조국에서 무성영화 <조국의 어머니>를 보면서 해방의 감격을 맛보셨고, 저는 여고 1학년이었던 1977년 단성사에서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이며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였던 <겨울여자>를 보면서 가슴 졸이는 일탈을 맛볼 수 있었답니다.

여고 1학년이었던 1977년 가을. 저와 친구들은 장안의 화재였던 영화 <겨울여자>를 보기 위해 대학생인 친구 언니의 옷과 가발까지 빌리는 모험을 감수했습니다.

사춘기 소녀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던 조해일의 소설 <겨울여자>에 빠져 영화를 보기 위해 무모한 용기를 내었던 것이지요. 

참으로 이상한 것은 지금도 영화 장면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언니 옷과 가발로 변장을 했지만 혹시 누군가 우리가 학생인 것을 알아보지 않을까 걱정이 돼서 조바심하던  모습과 단속 나온 선생님에게 언제 걸릴지 몰라 상영 내내 가시방석 같았던 영화관 의자, 그리고 영화가 끝난 뒤 도망치듯 달려 나와 인적 없는 근처 골목길에서 가발을 벗었을 때의 그 자유로움만이 또렷하게 기억에 남아있을 뿐입니다.      

10대 쯤 내려오는 서민극장 있었으면...

격동기였던 지난 100여년의 역사 속에서 무수한 변화를 겪어왔던 단성사. 일본식 무대에서 현대식 멀티상영관으로, 흑백 무성영화에서 총천연색 3D 입체음향으로, 건물도 기술도 사람도 바뀌었지만 단 하나 바뀌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지난 100년 동안 객석을 채운 관객들과의 공감이 아니었을까요.

1930년대 할아버지가 보셨다는 신파극의 감동과 1950년대 엄마, 아버지를 감격케 했던 무성영화의 추억 그리고 1970년대 청소년관람불가 영화를 몰래 보았던 나의 추억까지를 고스란히 간직한 단성사는 그저 극장이 아닌 삶의 소중한 한 순간이며 역사의 한 장이기도 합니다.

비록 주인이 바뀌는 순서를 밟을지라도 '단성사'라는 이름은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합니다. 3대를 이어온 단성사의 팬으로서 바람이 있다면 지난 100여년을 이어온 것처럼 우리 후대에도 단성사의 역사과 전통이 이어지길 바란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3대 아니 5대 10대에 걸쳐 사랑받는 자랑할만한 전통 서민 극장이 하나쯤은 있어도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단성사.
 단성사.
ⓒ 서울시정개발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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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단성사, #신파극, #무성영화, #조국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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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아줌마가 앞치마를 입고 주방에서 바라 본 '오늘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한 손엔 뒤집게를 한 손엔 마우스를. 도마위에 올려진 오늘의 '사는 이야기'를 아줌마 솜씨로 조리고 튀기고 볶아서 들려주는 아줌마 시민기자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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