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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태어난 지 한 달이 지났다. 나의 지인들은 '내가 아빠가 되었다'는 것을 제일 의아해한다. 그래도 별 수 없다. 내가 사는 집에 지금 갓난아기가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니까. 전문용어로는 '신생아'라고 한다. 그 아기는 나의 딸이다. 그리고 그 갓난아기는 세상 누구보다 분명 나에게 의지하고 있다.

그런데 이건 거짓말이다. 그 갓난아기가 실상 나에게 의지하는 바는 별로 없다. 다르게 말해 내가 그 아기를 돌본다고 하지만, 직접 그 아기와 무슨 교감을 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누군가 그러겠지? 성의없는 아빠라고. 그러지 마라. 나도 돌보고 싶다. 그 성과가 전무할 뿐이지. 모든 성과는 엄마 몫이다. 그런데 진짜로 엄마는 아기와 대화를 하는 것 같다. 아니겠지? 신생아 키우기 한 달. 엄마와 아빠의 차이. 그 차이만큼 초보아빠로서의 서러움은 더해간다.

나도 내 아기를 돌보고 싶다!

육아는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난 늘 함께만 하고 도움이 못된다.

굉장히 의미심장한 말이다. 특히 한국사회에서 그 잘난 남자들에게 상당한 경고를 주는 말이다. 남자들은 아기 기저귀 한 번 갈고 유세하기 십상이다. 한번쯤 아기가 울면 갑자기 "아기를 어떻게 봤길래" 그러면서 여자를 구박하기 일쑤다. 그럴 터이면 안 도와주는 편이 백배 낫다.

맞다. 육아는 누가 '도와준다'는 동정적 범주에서 해석될 사안이 아니다. 부부 모두의 책임이다. 그냥 '함께 하는 것'이다.

그래도 난 언제나 함께 하고자 했다. 기저귀도 함께 갈고, 모유를 먹이지만 수축기를 이용해서 젖 먹이는 어려움도 덜고자 했다. 목욕도 내가 시키고자 했고, 아기가 놀랄 때 나의 따뜻한 손으로 진정시키고자 했다.

이거 다 책에서 본 것들이다. 그렇게 하면 아기와 친해지고 좋단다.

과연? 결과는 역시 참담했다. 결론인 즉 내가 함께 해서 도움된 것이 없단다. 기저귀는 엉성하게 갈아서 배설물이 마구 삐져나온다. 젖병은 먹이는 것보다 아기 옷에 흘리는 게 더 많다. 아빠 손으로 가슴을 포근히 덮어주면 이건 완전 질식할 표정이다.

아내는 더 피곤해한다. 나는 이렇게 소외되고 만다. 그러나 할 말 없다. 아기가 내 손보다 엄마 손을, 심지어 내 말투보다 엄마의 말투를 편안해 하니 말이다. 이건 사실이다. 경험적으로 최소한 나는 '아님'이 증명되었으니 할 말 없다. 그저 늘 하던 거나 하자.

기저귀 때문에 쓰레기통 자주 비우게 된 것이 아마 나의 제일 달라진 지난 한 달이다. 결국 원래의 집안일에 원상복귀하게 된 결정적인 분위기는 무엇이었을까?

교감? 사실 설정 사진이다. 아빠의 마음은 이렇다
 교감? 사실 설정 사진이다. 아빠의 마음은 이렇다
ⓒ 오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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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아내는 아기를 안고 있는데, 난 들고 있다

아기는 아내에게 안겨서 잘도 잔다. 아기는 아내에게 안겨서 젖도 잘 먹는다. 심지어 아내가 누워있으면 알아서 젖먹는 가장 안락한 자세를 취하면서 스스로 안긴다. 아기는 울다가도 아내가 안아주면 금세 그친다. 심지어 아내는 그 갓난아기를 안고서 다른 일도 한다.

내가 아기를 안으면 아기는 바동거린다. 몇 번 반복하다 보니 내가 다가만 가도 아기는 표정부터 찡그린다.

아내 왈, 내가 아기를 안는 것이 아니라 '들기' 때문이란다. 안는 것과 드는 것은 그 본질이 다른 것이란다. 그럼 난 본질도 몰랐단 말이네.

그런데 실제로 그렇다. 아기 표정의 본질이 다르다. 아기는 뭔가 마음에 안든 상황에서도 아내에게 안겨서 안정을 취하는데 나는 가만히 잘 있는 아기를 괜히 안으려다가 신생아에게 공포의 긴장감을 선사하고 만다. 나에게 들려있는 아기 표정.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 이거 내가 군대에서 화생방 훈련장 들어갈 때 그 공포와 흡사하다.

② 아내는 토론까지 하는데, 난 윽박지른다

아내는 언제나 아기와 대화를 한다. 혼잣말이라고?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가만 보니 아닌 것 같다. 뭔가를 물으면 분명 대답에 준하는 신호가 있다. 아내는 그것을 느끼는 것 같다. 그래서 "배가 고픈 거야? 더운 거야? 주변이 시끄러운 거야? 엄마가 무심했던 거야?" 등을 차례대로 물어본다. 그것도 아주 천천히. 그리고 아기의 응답(?)에 따라 그 다음 조치를 취해준다. 아기는 물론 대만족하는 모습이다.

나도 따라해 봤다. 그런데 웬 걸. 내가 말 다 끝나기 전에 뭐라고 칭얼댄다. 못 알아듣는가? 다른 언어를 사용해야 되나? 그런데 분명 그런 수준이 아니다. 아마도 아기의 귀에 나의 언어는 "삐~삐~" 라는 일종의 소음으로만 들렸을 것이다. 이 녀석이 엄청나게 차별한다.

그런데 3자의 증언은 다르다. 아내는 아기에게 "우리 딸, 엄마가 무심해서 화가 났어요?" 혹은 "배가 고팠는데 엄마가 모른 척해서 그렇게 슬펐어요?"라는 식이란다. 난 아니란다. "너! 뭐 땜에 울어? 배가 고픈겨?" 이런 버전이란다. 나에 말투에는 바람·권유·칭찬·반성 등의 느낌이 전혀 없단다. 단지 귀찮음·윽박지름· 원인진단 등이 느껴진단다. 내 딸은 지극히 정상이다. 나에게 무반응 하니 말이다.

③ 트림의 가스, 아내는 느끼고 난 못 느낀다

신생아의 트림은 약간 다르다. 생후 3~4개월 정도만 되어도 이제 '가스'의 개념으로 트림이 나온다고 하지만, 신생아일 때는 모든 것이 작아서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 모유 수유일 경우 트림에 그렇게 집착하지 않아도 된다지만 그래도 저녁 즈음에 먹을 때는 혹시나 야밤의 일이 걱정이 되어서 고의적으로 트림을 시키고자 한다.

어느 날 내가 대신 그 일을 하게 되었다. 아내가 나에게 그 일을 시켰다는 것은 두 가지 이유이다. 나를 믿거나, 혹은 딸을 포기했거나이다.

트림 시키기. 이게 뭐 대수롭겠냐. 그냥 들고(?) 있다가 나오는 거 확인하면 되지. 그런데 신생아는 목을 가누지 못하니 트림시키기 편한 자세를 맞추어주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 이 녀석이 트림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쩝쩝' 거리는지 도통 알지 못하겠다.

아내는 '가스'를 느끼라고 하는데 내가 보기엔 숨 내뱉을 때마다 가스는 계속 나온다. 아내는 그거와 '다른 느낌'을 읽으라고 하는데 난 아무리 귀를 입에다 밀착시켜도 못 느끼겠다. 결국 내 머리 무게에 중압감을 느낀 아기는 운다.

결국 아내는 날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결론으로 종착. 우는 아기를 건네면서 "분명히 트림 소리 들었다"고 큰소리쳤다. 아내는 몇 번이고 확인했다. 난 날 믿어달라고 했다. 믿기는 개뿔. 1시간 후. 아기는 엄청 토했다. 나 때문에 소화조차 안 된 것처럼.

그 다음부터 아내가 트림 시키는 현장을 유심히 보았다. 신기하게도 아내는 5분 정도 아기를 안고 있으면 어느덧 "잘 했어, 시원해?"라고 아기와 또 대화한다. 미치겠다. 난 트림도 못 시키기고 대화도 못 한다. 저 녀석이 나중에 날 '아빠'라고 불러만 주어도 감사해야 할 판국이다.

④ 아내가 목욕시키면 '워터파크', 아빠가 하면 완전 '물고문'

아기는 분명 엄마와 목욕하는 것을 좋아한다. "해서(우리딸 이름)야, 이제 머리감는 거야" 라는 식으로 서비스 정신이 투철한 엄마를 그녀는 분명 신뢰하고 있는 듯하다.

내가 목욕을 시키겠다고 큰 소리 치면 아기는 그 때부터 일단 불안모드다. 용케 말은 알아듣나보다. 이 녀석 일단 내가 목욕을 시키기 위해 옷을 벗기면 엄마와 비교할 때 2~3배는 벌벌 떤다. 그리고 물이 닿는 순간 운다. 목욕 내내 전쟁이다.

결국 아내가 마무리를 한다. 그러면 또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표정을 짓는다. 나는 열심히 했다고 자부하는데 이럴 때면 좀 섭섭하다. 하지만 아내의 한 소리. "이거 뭐야? 귀에 물 다 들어갔잖아, 아예 바가지로 퍼부었군, 그래?". 난 열심히 안 한 것 같다.

다른 아빠들은 어떻게 하고 있을까!

비록 한 달의 경험이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렇다면 육아를 함께 하는 많은 아빠들은 이 과정을 어떻게 넘겼단 말이지? 아니면 그들도 사실은 그저 '돕고 있을 뿐'일까?

엄마가 아기와 교감을 나누는 것은 정말 본능일까?

여성을 '모성'으로 만드는 사회문화를 사회학에서는 여러 면에서 비판하고 있다. 여성의 모성화는 아울러 여성의 활동반경을 합리적으로 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걸 어째? 아무리 나도 사회문화적으로 '함께 하고 싶은데' 현장은 그렇지 않다 말이야. 나는 원래 단순히 도와주어야만 하는 유전자만 가지고 있단 말인가?

아! 매일이 서럽다.

덧붙이는 글 | http://blog.daum.net/och7896 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태그:#신생아, #갓난아기, #초보아빠, #육아, #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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