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산 잡지 <월간 마운틴> 기자였던, 지금은 진업주부인 김선미 씨가 최근 <바람과 별의 집>이라는 여행 에세이집을 출판했다. 물론 나는 개인적으로 김선미씨를 알지 못한다. 그저 그의 책 날개에 적힌 이력을 본 것뿐이다.

 

 

김선미 씨의 이 책에는 자신의 두 딸과 함께 전국을 여행하며 야영생활을 한 열두 달의 기록이 담겨있다. 그 중에서 상강(霜降) 무렵(김씨는 24절기를 따라 절기에 맞는 여행지를 골라 다닌 듯하다) 포천의 명성산 자락에 캠프를 친 이야기가 내 눈을 끌었다. 내가 이 글이 특히 반가웠던 건 김씨 가족이 캠핑을 했던 그 곳이 지금 김홍성 시인이 살고 있는 ‘산정호수 B캠프’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봄인가 초여름 쯤, 가을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계획하고 있던 나는 김홍성 시인이 사는 산정호수 상류의 산안마을을 찾아갔다. 이 때 나는 산정호수와 인연을 맺었다. 김홍성 시인은 네팔에서 10년 정도 살다가 지난 2007년 일시 귀국한 후 현재는 네팔과 한국을 오가며 글을 쓰고 있다.

 

왕건에 쫓긴 궁예가 숨어든 명성산

 

김선미 씨가 말한 대로 산정호수와 명성산은 사실 입김이 호호 나고 서리가 하얗게 내려앉을 때가 제격이다. 서리 이불을 하얗게 덮은 낙엽을 밟아가면서 연인이, 혹은 부부가 새벽의 산정호수 길을 걷는 모습은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이다.

 

물론 주말이나 휴일의 산정호수는 그저 떠들썩한 유원지에 다름 아니다. 특히 명성산 억새꽃축제가 열리는 매년 가을(10월 중순 쯤)이면 ‘바람과 별의 집’의 표현처럼 산 위에는 산에 살고 있는 동물(곤충을 포함한)보다 사람이 더 많을 정도로 번잡하다.

 

 

그러나 산정호수와 명성산은 고즈넉하면 고즈넉한 대로, 시끌벅적하면 시끌벅적한 대로 나름의 매력을 갖고 있다.

 

어린 아이들과 함께라면 매표소와 가까운 선착장에서 오리보트를 타보는 것도 좋고, 옆에 있는 놀이기구에 몸을 맡기며 하루를 보내는 것도 좋다. 부부나 연인들이라면 매표소 옆길을 따라 난 명성산 등산코스를 오르는 게 좋다.

 

왕건과의 마지막 싸움에서 쫓긴 궁예와 그 백성들이 이 산에서 구슬피 울었다 해서 이름 붙은 명성산. ‘울음산’ 명성산 등산로는 그리 가파르지 않지만 산 정상까지 오르지 않아도 괜찮다. 한 30분 정도 걸리는 등룡폭포까지만 올라도 한결 상쾌한 기분이 든다. 산을 오르다가 문득 돌아보면 저 멀리 발아래로 산정호수의 수면이 파랗게 펼쳐진다. 저절로 감탄이 날 정도로 시원한 광경이다.

 

 

나는 지난해 초여름부터 10월초까지 꽤 여러 번 산정호수를 찾았다. 그리고 그해 가을 네팔을 다녀온 후 겨울에도 몇 차례, 그리고 올봄에도 서너 번 산정호수와 명성산 자락을 찾았다. 산과 호수는 늘 같은 모습인 듯해도 내가 갈 때마다 표정이 달랐다.

 

산과 호수가 파랗게 쨍쨍해서 나까지 기분 좋았던 적이 있었고, 반면에 산중턱에서 천둥번개를 만나 쫄딱 비 맞은 생쥐 꼴로 쫓기듯 호숫가 카페로 피신한 적도 있었다. 어느 늦은 가을 아침의 산정호수는 뽀얗게 물안개를 피워 올리며 신비주의자처럼 굴기도 했고, 그때 상류 산안마을의 키 큰 잣나무 옆 청솔모는 길을 잃은 듯 보였다.

 

산정호수의 맛집 ‘국숫집 베네치아’

 

사실 나는 명성산 정상까지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언젠가는 한 번'이라고 생각만 하다가 꼬박 사계절을 산 주위에서 맴돈 셈이다. 봄에는 아직 날이 덜 풀려서, 여름엔 너무 더워서, 가을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번잡해서, 겨울에는 얼어 죽을까봐(?) 명성산을 오르지 않았다. 물론 핑계다. 사실은 호수 가에 갈 때마다 만나는 사람과의 인연, 그리고 그 정이 산에 오르려는 내 발목을 잡았다.

 

김홍성 씨 덕분에 호수 상류에 있는 국숫집 겸 카페 '베네치아'를 알게 되었고, 거기서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산정호수에 가게 되면 베네치아 국숫집은 반드시 한 번 가봐야 할 곳이다. 거기서 김치말이 국수 한 그릇 먹어봐야 비로소 산정호수에 가봤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 이런 유원지에 가서 남들 다 먹는 닭도리탕 먹으며 아이들 손에 먼지 묻은 솜사탕 쥐어주는 건 너무 식상하다.

 

하류 선착장에서 시계 반대방향으로 천천히 호반을 걸어 상류 허브농장까지 가보자. 거기서 작은 로즈마리 화분 하나 사들고 이번에는 호반도로를 따라 다시 왔던 길을 걸어 내려오다 보면 왼쪽에 산우물(산정호수의 다른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게 웅장한 카페 베네치아가 보인다.

 

여기 베네치아 국숫집 카페는 일산에서 국숫집을 하던 이은옥씨 내외가 4년 전 들어와 터를 잡은 곳이다. 한때 열심히 산악회(우정산악회) 활동을 했다는 게 사실일까 의심이 들 만큼 여장부 체격을 가진 카페 주인 이은옥 씨의 국수 맛은 일품이다. 여름에는 시원한 김치말이국수, 그리고 겨울에는 뜨끈한 바지락칼국수 한 그릇 먹고 창가에 앉아 호수를 바라보면 이제 더 바랄게 없는 사람이 된다.

 

아참, 그런데 이집 베네치아는 먹고살기 위해 기를 쓰고 아등바등 국수를 만들어 팔지 않는다. 평일은 물론이고, 주말과 휴일에도 문 앞에 '정기휴일' 안내판이 놓여 있을 때가 많다. 따라서 산전호수의 '베네치아 표 국수' 맛을 보려면 운 때가 잘 맞아야 한다.

 

잣나무 아래에 느끼는 '산정B캠프'의 낭만도

 

산장호수 주변에서 하루 이상 숙박을 계획한다면 여기는 그야말로 펜션천지다. 호수 입구부터 한화콘도를 비롯해서 산정호수 상류까지 여러 펜션이 있다. 편하게 숙식을 해결하려면 이들 중 한 군데를 골라잡으면 된다.

 

그러나 좀 더 야성스럽게(?) 산과 호수를 즐기려면 호수 상류에 있는 산정B캠프에서 텐트생활을 해보자. <바람과 별의 집>의 저자 가족이 한로(寒露)와 상강(霜降) 사이에 텐트생활 한 곳도 여기 산정B캠프다.

 

산정호수의 '산정캠프'는 A캠프와 B캠프 두 곳이 있다. 산정A캠프는 산정호수 입구 도로 옆에 있고, 산정B캠프는 호수 상류 포장길 끝 지점인 산안마을 골짜기에 숨어있다. 이 두 산정캠프는 모두 김홍성 시인의 아버지가 만든 것이다. 그래서 산정캠프의 다른 이름이 '아버지의 숲'이다.

 

 

함경남도 원산이 고향인 김홍성 시인의 아버지는 한국전쟁 후 여기 포천 명성산 자락에 터를 잡은 후 이 주변 산들을 직접 가꾸어왔다. 산정B캠프 지기 아저씨의 말에 따르면 여기 산정호수에 붕어와 잉어 등 물고기도 사다 넣고, 캠프 주변 곳곳에 잣나무 등을 심어 가꾼 사람이 바로 김홍성 씨의 아버지다. 산정호수가 1925년에 만들어졌으니, 그의 말대로 라면 김홍성 시인의 아버지는 1953년부터 55년 동안 여기 산정호수와 명성산 자락을 가꾸어오고 있는 거다.

 

어쨌든 여기 산정B캠프에는 단체 야영객을 위한 숙소도 있지만 개인 텐트자리(1동 1일 2만원)가 있고, 대형 수영풀과 샤워시설 등이 잘 갖춰져 있다. 식사는 직접 해먹어도 되지만 여기 산정B캠프의 식당을 이용하는 것도 괜찮다. 이곳 식당에서는 인공 조미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산장지기 아저씨가 직접 산에서 채취하는 계절나물(두릅, 취, 능이버섯 등)이 주인 아주머니의 손맛과 어우러져 절묘한 맛을 만들어 낸다. 물론 미리 예약을 하면 토종닭 요리와 이동갈비도 맛볼 수 있다.

 

갑자기 사람살이가 먹먹해지거나 생활의 충전이 필요하다 느낄 때 여기 산정호수에 가보자. 명성산이 그대를 폭 안아주고, 산정호수가 그대를 쓰다듬어 준다. 물론 지금 가장 좋은 사람과 함께 삶을 만끽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여기 호수와 산이 더 낭만적으로 보일 거다.

덧붙이는 글 | 산정호수 가는 길 : 서울 외곽순환도로 송추나들목을 나가서 동두천ㆍ포천 쪽으로 진행한다. 의정부를 지나 포천 방면 43번 도로를 따라 소흘(송우리)-포천-신북-영중을 지나 계속 북상하면 영북 못 미쳐 산정호수 이정표가 보인다. 


이기사는 월간낚시21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산정호수, #명성산, #산정A캠프, #산정B캠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