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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나는 몇 해 전부터 트레킹을 시작했다. 겨울과 여름 방학을 틈내 거르지 않고 부지런히 계획하고 실천했다. 네팔 에베레스트, ABC 베이스 캠프, 영국 Pennine Way, 지난 해 여름은 오스트리아 티롤 찔러탈 알프스, 이번 여름은 프랑스 몽블랑 알프스를 갔다 왔다. 모르는 산과 들판을 우리만 걷기도 하고 길을 잃어 헤매기도 하고. 평소에 잊고 있다가 지난 여행들을 떠올리면 미소가 번지고 등에 땀이 흘러도 시원하다.

 

올 여름은 프랑스 알프스 TMB(Tour of Mont Blanc)트레킹을 계획하고 자료를 모으고 준비하고는(남편은 이런 일을 정말 재미있게 잘한다) 남편은 오스트리아 그라쯔에서 일이 있어 먼저 가고, 나는 개와 채소가 자라고 있는 집 보는 일을 할 아들들을 위해서 먹을 것을 준비해서 냉동실에 채워두고는 며칠 후에 뒤따라 갔다.

 

트레킹은 마티니에서 출발하기로 되어 있어 그라쯔에서 인스부룩으로 가서 하룻밤을 자고 마티니로 갔다. 인스부룩에서 눈 앞에 우뚝 솟은 알프스 산을 감상하고, 스위스 마티니로 가니 비가 계속 와서 비옷은 준비했지만 도저히 트레킹을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아 하루를 자고는 도시 주변을 감상하는데 마티니는 산들이 인스부룩보다는 좀 멀리 둘러쳐져 있었지만 여름이랄 수 없을 정도로 쌀쌀해서 산마을이 실감났다.

 

 박물관에서 산, 세이트 버나드를 델로 한 그림엽서

 

이번 여름휴가의 감동 1호가 마티니에서의 세인트 버나드 박물관이다. 옛날 수도사들이 알프스 산을 넘을 때 그들의 숙소와 그들을 동반해주었던 세인트. 개를 실제로 기르고 있다는 안내문에 끌려서 개관시간을 기다려 들어갔는데, 당시의 사진이나 그림뿐만 아니라, 과연 실제로 넉넉한 공간에 개들을 품위 있게 가르치며 기르고 있는 것을 관람객들이 볼 수 있어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또 ‘인간들이 정직하게 개에게 보답하고 있구나’, 인간의 품위가 느껴져 기분이 정말 좋았다.

 

배낭 매고 어떤 길이 눈앞에 펼쳐질지도 모르는 길을 막상 시작하려 하니 은근히 걱정이 되었는데 마티니에서 비가 그치지를 않으니 아쉬움보다는 오히려 반가운 마음이었다. 마티니에서 샤모니까지 기차를 타고 들어왔는데, 기차 속에서 보는 각종 나이의 무리들이 배낭매고 있는 모습들은 전사처럼 강하고 씩씩해 보였다.

 

샤모니는 거대한 산들이 가까이 둘러쳐져 있어서 유난히 사람들의 움직임이 느릿하고 작게 보였다. 거리에 하염없이 앉아서 산과 하늘을 보고, 빙하가 녹아 흐르는 연초록 빛 물을 보고 시원한 물소리를 들으며 반나절을 있어도 초조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시간의 유무와 무관하게 우리의 일상은 좀 더 여유를 찾아야 할 것 같았다.

 

 샤모니시 홈피에서 따온 락블랑이 들어간 몽블랑 산군 사진.  우리의 비박텐트에서도 이런 풍경을 보았었다.

 

샤모니에서도 계속 비가 내려 제일 싼 호텔에 묵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가, 드디어 날씨가 개어서 우리 여행의 감동 제 2호를 창조했다. 물론 3800미터를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서 구름 위의 에귀디 미디 산봉우리를 보고, 또 그 아래 눈 속에서 훈련을 하고 있는 산악인들을 보는 것도 장관이기는 했지만 역시 배낭 메고 락 블랑까지 걸어 올라가서 그곳에서 텐트 치고 한 비박은 감동 그 자체였다.

 

샤모니에서 버스 타고 케이블카를 타고 그리고 또 3 시간쯤 걸어서 락 블랑에 도착했고, 거기서 점심을 하고는 주변의 호수며 눈 위를 돌아다니며 즐기다가 오후 4시경이 되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산을 하는데 덩달아 따라 내려가고 싶어 울 지경이었다.

 

언제나 그랬지만 동양인도, 주변에 비박을 하려는 사람도 없어 마음이 많이 흔들렸지만 한국서부터 텐트를 가져온 체면도 있고 알프스 산 속 텐트 속에서의 잠이라는 유혹도 뿌리칠 수가 없어서, 결심하고는 텐트 칠 수 있는 시간을 기다려 그곳에서 몇 분 걸어 올라가서 돌로 경계만 표시해 놓은 허가된 장소를 찾아 손바닥만한 텐트를 치고 하룻밤을 보냈다. 조용히 텐트를 치는 남편의 모습이 엄숙하고도 아름다웠다.

 

눈을 들면 골짜기 사이사이에 빙하가 남아 있는 산들과 하늘의 보름달과 별들만이 있고 눈 밑에는 여름에만 여는 작은 숙소와 호수와 매어 놓은 말 한 마리와 우리의 작은 텐트뿐이었다. 그리고 우리의 텐트 주변에는 사슴 가족 몇 마리만 경계심 있게 움직이고 있었다. 둘이 누워 꽉 찬 텐트 안 슬립핑 백 속에서는 마치 관 속에 누운 듯 마음이 비워져 오히려 가볍고도 침착해졌다. 시간이 느릿느릿 지나 텐트 속 천장이 밝아올 때는 기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여행에서 아침은 언제나 좋았다.

 

샤모니로 내려와서는 캠핑장에서 머물렀는데 캠핑장에서는 주변에 사람들이 많아 말을 나누지 않아도 집에 온 듯 편안했지만, 밤새 오는 비 때문에 비가 샐까 노심초사했다. 손바닥 만한 텐트가 제 구실을 톡톡히 하니 신통한 생각까지 들었다. 사람이나 물건이나 제 구실을 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것 같던데.

 

이제 감동 제3호를 이야기 하자면, 그것은 취리히 공항으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의 들치기 사건이다. 지나간 상황은 이렇게 분명하게 엮어지는데 그때는 왜 그 돌아가는 상황을 자각하지 못하고 그대로 걸려들고 마는 것인지 모르겠다.

 

우리는 기차 안에서 두 좌석에 배낭 두 개, 컴퓨터 가방 그리고 바닥에 큰 여행용 가방을 두고는 느긋한 마음으로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에 빠져 있었다. 베른 역에서 탄 두 젊은이가 우리 좌석 바닥으로 동전을 뿌려 놓고는 세 명이 그 동전을 줍는 사이에 다른 한 젊은이가 의자 위에 컴퓨터 가방을 들고 다른 문으로 내린 것이다. 우리는 기차가 베른을 출발하고 한참 후에야 알았다. 노트북, 여권, 디카, 즉 이번 여행의 모든 사진들과 소소한 것들이 없어졌다.

 

그 바람에 스위스 경찰서에도 가보고, 스위스 한국 대사관에도 가보고 정말 초를 다투어 경찰서에서 조서를 쓰고 그 복사본을 받아 쮜리히 역에서 여권 발급용 사진을 찍고 다시 기차를 타고 베른 한국 대사관에 가서 임시 여권을 받아서 또 다시 기차를 타고 쮜리히 공항으로 오니, 비행기 출발시간을 넉넉하게 남기고 출국수속을 마칠 수 있었다.

 

감상 두 가지가 있다. ‘사람 사는 곳은 다 마찬가지구나’와 베른 한국 대사관의 위치와 건물이 단아하고 괜찮은 느낌이던데 실내 벽에 걸린 대통령 사진이 너무 크고 내려다보는 눈이 아름답지 않아 다른 사진으로 바꾸면 어떨까 생각했다.

 

이것이 나의 2008년 여름의 하이라이트이다. 집에 오니 왠지 눅눅한 집도 정원의 정신 없이 자란 풀도 또 축축한 냄새도 모두 살아 있는 기운으로 느껴지니 비록 사진 한 장 못 건진 여행이 되었으나 여유를 찾은 것 같아 기쁘다. 더군다나 노환으로 꼼짝 못하고 누워 계시는 아버지께도, 생활의 위기를 맞은 형제에게도 어쩐지 기쁜 소식이 있을 것 같아 마음이 가벼워지니 이번 여행으로 희망을 얻었나 싶다. 부디 마당에 널은 고추가 잘 마르고 휘청거리는 우리나라도 태풍 피해라도 없이 이 여름 잘 지나갔으면...

덧붙이는 글 | 2008 이 여름을 시원하게 공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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