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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만호적연주곡집 ≪천수바라≫ 음반 표지
▲ 천수바라 최경만호적연주곡집 ≪천수바라≫ 음반 표지
ⓒ 신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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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핵교 때는 공부를 제법 혔는디 중학교 때부터는 50명에 20등 안짝이나 할까…. 그때 동네서 태평소, 그러니께 쇄납을 잘 부는 이가 있었는디, 그분이 꼭 노을지는 저녁만 되믄 뚝 끝에 앉아 태평소를 부는 거예유. 그 소리를 지만 그렇게 열심히 들었시유.”

위는 이 시대의 진정한 소리꾼 장사익이 한 이야기다. 노을지는 저녁만 되믄 뚝 끝에 앉아 태평소를 부는 사람이 있었더란다. 그 소리를 장사익은 정신없이 들었다든가? 어쩌면 그 태평소 소리가 장사익 그를 탄생시켰는지도 모른다.

그 태평소(太平簫), 우리 악기 중 유일하게 가락을 부는 것으로 국악기 중 목부(木部)에 속하는 관악기다. 태평소는 다른 이름으로 호적(胡笛)·쇄납(瑣吶)·날라리·대평소·소눌 등으로도 불렸다. 이 악기는 1993년 국립국악원에서 새납으로 통일해 쓰기로 했으며 태평소라는 이름도 함께 쓰기로 하였다.

태평소는 유자나무, 대추나무, 뽕나무 등 단단한 나무의 속을 파서 만든 원추형의 길이 약 35cm 나무관으로 되었으며, 앞에 7개, 뒤에 1개의 지공이 있다. 소를 불면 그 소리가 세상을 두루 편안하게 해준다고 했으며, 그 소리는 <중앙-흙-황제(황색)>를 의미한다고 하였다.

그 태평소를 우리는 풍물마당에 가면 접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 그 태평소로 독집음반을 냈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었다. 그런데 국립국악원 민속단 예술감독을 2007년에 정년퇴임 하고 현재 부여충남국악단 예술감독으로 있으며, 한국음악연구회총연합회 회장, 중앙대 겸임교수인 최경만 명인이 신나라(회장 김기순)를 통해서 최경만호적연주곡집 ≪천수바라≫를 냈다.

피리와 태평소의 명인 최경만
▲ 최경만 피리와 태평소의 명인 최경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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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음반은 먼저 지금은 잘 연주하지 않는 승무 반주음악인 “긴염불, 반염불, 굿거리, 꽃방아타령”을 연주하며, 역시 승무 반주음악인 천수바라, 느린허튼타령, 자진허튼타령을 들을 수 있고, 그밖에 긴아리랑, 능게, 자진능게, 휘모리와 풍년가, 대취타가 들어 있다.

태평소는 음정이 매우 높고 음량 또한 커서 쉽게 다른 악기와 어울리지 못할 듯싶다. 하지만, 태평소는 풍물굿 그리고 굿음악에서는 기가 막히게 어우러진다. 쇠나 북, 징과 같은 타악기가 어쩔 수 없이 갖게 되는 공백을 선율악기인 태평소가 채워주는 것이다.

우리는 가끔 풍물굿 마당에서 태평소 소리를 듣는다. 그런데 대부분 태평소를 흥분하거나 괜히 급하게 불어대는 연주자가 많았다. 그런데 이 음반에서 최경만 명인의 연주는 그야말로 차분하면서도 맛깔스러운 소리를 낸다. 그런가 하면 현란한 손놀림이 연상되는 연주도 선보인다. 어쩌면 오랫동안 쌓아온 내공을 얘기해주는 것은 아닐까?

단국대학교 서한범 교수는 “태평소는 이제 거의 단절된 소리다. 특히 ‘민간대풍류’는 이제 연주하는 사람이 없어 잊힌 소리가 되었다. 더구나 전해진 지영희 선생의 자료는 완벽하지 않다. 그런데도 이 음악을 다시 찾아내고 원로음악인들에게 확인하여 다시 살려낸 이가 최경만 명인이다. 그는 피리와 태평소가 중심이 된 민간대풍류의 지영희 가락을 거의 그대로 이어받았다.

그런 점에서 최경만 명인의 존재는 대단하다. 그런 최경만 명인이 태평소 연주집을 낸 것은 국악인의 한 사람으로 정말 기쁜 일이다. 국악을 좋아하는 이라면 누구나 이 최경만호적연주곡집 ≪천수바라≫를 들어보길 권한다.”라고 말한다.

태평소는 나팔꽃같이 생긴 동팔랑이 있다. 이 동팔랑이 높고 아득한 하늘을 향해 목을 놓아 울면 우리는 신명이 난다. 어쩌면 사람들의 한을 태평소가 대신 울어서 풀어주는 것이 아닐까? 어떤 이는 목청껏 소리를 지르고 난 다음의 후련함이 태평소 소리를 듣고 난 이후의 느낌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사람들이여! 이제 우리는 최경만 명인호적연주곡집을 곁에 두고 대신 한을 풀어달라고 해보면 어떨까?

국악 연주자, 전통의 진수를 알고 연주해야
[대담] 호적연주곡집 ≪천수바라≫를 낸 최경만 명인

대담을 한 최경만 명인
▲ 최경만 대담을 한 최경만 명인
ⓒ 김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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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평소(호적)는 어떤 악기이며, 태평소를 사랑한 까닭은 무엇인가?
“호적소리는 소리가 크고 웅장하면서도 힘차지만 가까이서 듣는 것보다 멀리서 들으면 마치 봄날 아지랑이 같은 애련한 느낌을 주는데, 호적은 그런 애련한 선율과 슬픈 느낌을 주는 묘한 성음을 가진 매력이 있는 악기이다. 피리를 전공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호적도 불게 되었고, 많은 이들에게 소리를 들려주고 싶은 악기이다.”

- 태평소 가락 중 “민간대풍류”는 이제 잊힌 음악이 되었지만 최 명인이 다시 찾아냈다고 들었다. “민간대풍류”는 어떤 음악이며, 왜 복원하려고 생각했나?
  “민속음악의 대영산과 취타풍류 그리고 승무반주에서 쓰이는 염불풍류를 묶어 대풍류라 부른다. 이 음악은 정악에서 불리는 표정만파지곡과 흡사하여 정악 느낌마저 들게 하지만 엄연히 민속음악으로서 당당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민속음악이 갖는 흥겨움과 또한 장엄함 속에서도 멋스러운 가락을 담고 있다.

하지만, 장중함과 민속악이 갖는 흥을 가진 이 음악은 합주형태로 연주되고 많은 연주인들과 호흡이 맞아 연주해야 했기 때문에 긴 호흡과 장단을 요하는 부분은 점차 사라지고 빠르고 경쾌한 부분만 연주되었다. 그에 따라 전체음악을 아는 이들도 없고 연주하는 이도 없어졌고 그것이 안타까워 이를 복원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대풍류는 지영희 선생님께 사사를 하였고 또한 지영희 선생님께서 채보한 악보도 있었지만 대영산은 근 50년이 되도록 한 번도 민간음악에서 연주하지 않았다. 결국,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감독으로 재직할 때 이 음악을 어렵게 재현 복원해 정기적으로 무대에 올렸다.”

- 사실 호적은 지금 풍물굿 할 때만 연주되고 그밖에 연주하는 모습을 별로 볼 수가 없다. 이를 어찌할 것인가? 
“옛날엔 불가에서 승무를 할 때 호적으로 반주를 했었으나 지금은 호적으로 반주를 하는 것은 사라졌고 삼현육각편성으로 대신 한다. 대신 호적이란 악기는 소리가 크고 힘이 있기 때문에 풍물과 잘 어울려 연주한다. 하지만, 지금은 관현악에서도 호적풍류라 하여 협연악기로 연주되기도 한다. 어느 곡에서도 연주에 따라 맛과 멋을 낼 수 있는 악기이기 때문에 앞으로 호적의 연주영역은 매우 다양해질 것이다.”

- 국악 연주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물론 퓨전이나 창작음악으로 대중들과 가까이하려는 노력은 많이 시도하고 있고 그래서 대중 속으로 국악이 가까이 다가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전공자로서는 음악의 깊이를 잘 이해하고 많은 노력과 공력으로 전통의 진수를 알고 연주하는 것이 전공자의 올바른 자세라고 본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라는 낡은 표현을 쓰지 않더라도 전통음악 전공자라면 전통음악을 깊이 익히고 충분히 이해했을 때 그 이상의 것이 나올 것이라고 믿는다.

우려하는 것은 옛날 우리 스승들이 가지고 있었던 음악들이 그분들이 돌아가심과 함께 음악도 전수되지 못하고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참 크다. 그것은 전통음악의 손실이며 우리 연주인들에게도 소중한 자산이 없어지는 것인데 우리 연주인 모두는 그런 안타까움을 한 번쯤 생각할 줄 아는 연주인이 되었으면 한다.”

- 현재 부여충남국악단 예술감독인 것으로 안다. 부여충남국악단을 어떻게 발전시킬 계획인가?
  “처음에 부임했을 때 지방의 국악단이지만 어떤 곳보다 성실하고 연주 잘하는 국악단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매주 토요일에는 상설프로그램을 만들어 진행하고, 전설적으로 내려오던 "서동요"전을 가무악극으로 만들어 "서동의 노래"로 재탄생시켜 해마다 무대에 올리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찾아가는 무대를 만들어 충남권만이 아닌 전국적으로 부여국악단을 알리기에 애쓰고 있으며 외국에도 진출하여 좋은 성과를 올리고 있다.

앞으로도 끊임없이 부여국악단의 노력하는 모습을 알릴 것이며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작품 " 서동의 노래" 가 부여의 상징적인 의미로 정착되는 것은 물론 가장 한국적인 오페라가 되도록 온갖 정성을 다 쏟을 것이다.”

- 앞으로 다른 계획은
“개인적으로는 서도민요의 전곡을 피리로 연주한 음반을 낼 예정이며 지금 낸 호적작품집과 경기민요의 악보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언제나 온 정성을 쏟아 노력하는 국악인이 될 것이며, 후학들에게 뭔가 도움이 되도록 애쓰겠다.”

최경만 명인은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그만큼 그는 속 깊고, 내공이 크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일 것이다. 또 연주자는 말이 아니라 연주로 답한다는 것을 웅변하고 있음이다. 최경만 명인, 그는 이 시대 피리와 태평소에 관한 한 우뚝 선 큰 인물이 아닐까?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다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최경만, #태평소, #호적, #신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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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으로 우리문화를 쉽고 재미있게 알리는 글쓰기와 강연을 한다. 전 참교육학부모회 서울동북부지회장, 한겨레신문독자주주모임 서울공동대표, 서울동대문중랑시민회의 공동대표를 지냈다. 전통한복을 올바로 계승한 소량, 고품격의 생활한복을 생산판매하는 '솔아솔아푸르른솔아'의 대표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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