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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 고시텔 화재 사망자 중 이병철, 권순환씨 외 2명은 용인세브란스 병원 장례식장에 안치되어 있다.
 용인 고시텔 화재 사망자 중 이병철, 권순환씨 외 2명은 용인세브란스 병원 장례식장에 안치되어 있다.
ⓒ 박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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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두 방울 내리던 비가 갑자기 무섭게 쏟아져 내렸다. 고 권순환씨 부친이 혼자 용인 세브란스 병원 장례식장을 지키고 앉아 엉엉 울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술에 취해 부르는 아들의 이름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다른 유가족들이 저녁을 먹으러 자리를 비운 사이, 그는 먹먹한 가슴을 부여잡고 울었다.  

25일 새벽 벌어진 경기도 용인 고시텔 화재 사건 사망자가 6명에서 7명으로 늘어났다. 권순환씨는 바로 7번째 사망자이다. 27세 청년의 꿈은 답답한 고시텔에 갇혀 피어보지도 못하고 홀연히 졌다.

오후 1시부터 8시까지 용인 세브란스 병원과 용인 서울병원을 돌아다니며 유가족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때론 오열하고, 때론 애원하는 유가족 앞에서 취재 일주일차의 어설픈 인턴기자인 나는 무슨 말을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고 사진기를 들이댈 수 있을지 혼란스러웠다. 다만 '고시텔을 벗어나 가족들과 넓은 집에 살고 싶었다'던 고인의 바람을 가늠해 볼 뿐이었다.

"고시텔 방값 낸 게 엊그제인데..."

고 권순환씨의 부친이 장례식장에서 잠시 나와 기둥에 몸을 기대고 있다.
 고 권순환씨의 부친이 장례식장에서 잠시 나와 기둥에 몸을 기대고 있다.
ⓒ 박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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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있었으면 좋은 방 얻어줬을 텐데 하는 마음에 얼마나 서러우시겠어요."

권순환씨 부친이 고함을 치며 오열하는 모습을 밑에서 황망히 바라보던 권씨의 작은 어머니는 안타까운 마음이 더해갔다. 타지에 와 일을 하면서 돈을 아껴 고시텔에서 근근이 지내던 조카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단양에 사는 형님(권씨의 모친)이 새벽에 비가 너무 많이 와 못 주무시다가 경찰서에서 전화를 받으셨대요. 엄마라 불길한 예감이 들었던 건지."

정씨가 고시텔에 방을 얻은 지는 한 달이 갓 넘었다. 모친이 보낸 37만원을 잘 받아서 고시텔에 낸 게 엊그제인데, 갑자기 사고 소식이 날아왔다.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도 권씨의 부친은 격양된 목소리로 세상에 대한 원망을 퍼부었다. 기자들을 향해 "너희가 자식 잃은 슬픔을 아느냐"며 울분을 토했다. 돈 많은 집에 태어나 좋은 것 누리지도 못하고 새처럼 훨훨 날아간 자식이 가슴에 박혔다. 

같은 병원에 안치된 고 이병철(38)씨는 형들에게도 힘든 내색을 좀체 하지 않던 과묵한 동생이었다. 혼자 사는 게 딱해 형이 선을 보라고 권해도 능력이 될 때까지 장가를 가지 않겠다던 고집 있는 동생이었다. "얼른 자리 잡아서 자기 사업도 벌이고 장가도 가고 싶어했는데…" 이씨의 큰형 이병각(45)씨는 목소리를 가늘게 떨었다.

"3년 전부터 내 친구랑 같이 일을 했는데, 그게 잘 안 돼서 그만두고 서울에서 관리직으로 일하다가 월급도 제대로 못 받았지."

친구와 다시 사업을 시작한 이씨가 용인에 와서 덤프트럭 관리하는 일을 하느라 고시텔에 들어온 지도 2개월째다.

"걔가 신림동에서 고시공부 할 때만 해도 이 정도 방은 아니었는데…."

동생 이씨는 9급 공무원에 합격한 적도 있었으나 인생의 굴곡이 만만치 않아 이곳까지 흘러들어왔다. 고시 공부하던 자신을 따라 살다가 동생이 이런 길을 걸은 것 같아서, 자신의 친구 때문에 용인으로 사업을 하러 온 것 같아서, 좋은 방 얻으라고 최대한 도와주지 못한 것 같아서 형은 마음이 더욱 아프다.

분향소도 제대로 차리지 못하고 유가족들만 덩그러니 앉아있었다. 비좁은 거처에 매일 밤 몸을 뉘었을 동생은 마지막 가는 길도 휑한 영안실에서 몸을 뉘었다.

"장남이 돼서 내가 챙겼어야 하는데, 삼촌을 그렇게 따르던 7살 막내에게 당장 뭐라고 말해야 할지…."

부슬부슬 내리는 빗 속에서 이씨의 형은 한숨을 깊게 쉬었다. 마지막 통화에서 "그동안 고생했지만 이젠 잘하고 있다"는 동생의 목소리에 기특해하던 것이 생생한데, 월세 37만원의 고시텔에서 숨도 못 쉬고 죽어갔을 동생의 모습은 아득하기만 하다.

"회사 기숙사에 산다고만 했지, 걱정 안 시키려고"

고 정찬영씨 유가족들이 분향실을 지키고 있다.
 고 정찬영씨 유가족들이 분향실을 지키고 있다.
ⓒ 박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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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아들아! 내가 너 대신 죽어야지 네가 죽으면 어떡하냐, 우리 아들아!"

용인 서울병원에 차려진 고 정찬영(27)씨의 분향실에서 정씨의 모친이 단장의 슬픔을 이기지 못해 통곡하고 있었다. 바닥을 치며 정신을 잃을 듯 오열하는 모친을 붙잡고 가족들은 황망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기자라는 신분을 잠시 잊은 채 수첩을 손에 들고 망연히 분향소를 들여다보고 서 있었다. 정씨의 고모가 들어와 앉으라고 나의 손을 이끌었다. "기자면 어때, 방바닥 추우니까 방석 깔고 앉아." 나는 무릎을 꿇고 앉은 채 타오르는 향과 고인의 영정을 한참이나 바라봤다.

정씨는 용인의 한 물류센터에서 일했다. 빚 얻어줄 테니 학교에 복학하라고 해도 자기가 벌어서 다니겠다던 장한 아들이었기에 모친의 가슴은 더욱 찢어진다. 정씨가 고시텔에 산 지 8개월이 넘었음에도 정씨의 모친은 사고 직전까지 그 사실을 몰랐다.

"회사 기숙사에 산다고만 했지, 얘가 걱정 안 시키려고."

정씨의 고모는 "찬영이가 엄마랑 형이라 다 따로 사니까 돈 벌어서 다같이 사는 게 소원"이었다며 눈물을 훔쳤다. 이번 추석에 온다던 조카는 싸늘한 시신이 되어 돌아왔다.

고시텔 생활 너무 힘들다더니...
"꿈 같아요, '자작극이었어'라며 금방이라도 뛰어나올 것 같은데."

정씨의 고등학교 친구인 전승표(27)씨는 운동을 좋아하던 친구가 건강한 친구가 이렇게 떠났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이종격투기, 유도… 합쳐서 10단이 넘는 친구라 불이 나면 벽이라도 뚫고 나올 줄 알았는데…" 두 친구는 바로 어제 메신저에서 만나 주말에 만나자고 약속을 잡았다.

"안 그래도 고시텔 생활이 너무 힘들다고 계속 옮기려고 했는데, 내가 보증금이라도 대줬더라면…."

먼저 보낸 친구의 뒤에서 안타까움만이 남는다. 야근을 밥 먹듯 하며 성실하게 일해 온 정 씨는 친구를 만나 이제 자리를 잡게 되었다며 좋아했었다.

유가족들에게 인사를 하고 조심스레 장례식장을 빠져나오는 동안에도 거센 빗발은 수그러들 줄 몰랐다.

덧붙이는 글 | 박유미 기자는 <오마이뉴스> 8기 대학생 인턴기자입니다.



태그:#고시텔, #용인, #유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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