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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는…] "이미 투사가 돼버린 사람들과 어떻게 다시 일하나"

 

"저들은 이미 '근로자'가 아니라 투사다."

 

기륭전자(주) 배영훈 대표이사는 이렇게 말했다. 이미 투사가 돼버린 사람들과 어떻게 다시 일을 하겠느냐며.

 

배 대표가 가리킨 '저들'은 지난 2005년 노동조합 설립 과정에서 해고된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다.

 

배 대표는 그리고 '투사'가 돼버린 이들을 복직시킬 권한은 대표에게 없다고도 했다. 정작 기륭전자에 남아있는 사원들이 이들의 복직을 반대하고 있다는 것.

 

배 대표가 제시한 증거자료는 5cm 두께의 A4용지 묶음으로 회사 간부들이 대표에게 보낸 이메일과 전 직원을 대상으로 한 설문지 복사본이었다.

 

지난 12일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보고서의 설문 대상자는 과장급 이하 84명으로 명시돼있다. 실 설문 대상자 60명 중 출장 등의 이유로 2명이 빠진 가운데 실제 설문 참가자는 58명. 보고서 내용은 이렇다.

 

기륭전자 분회 노조인원 정규직 채용에 관한 건

찬성 3명(5.17%)

반대 45명(77.59%)

무효 10명(17.29%)

 

보고서 뒤에 연결된 자료를 보면 관리직 사원들이 배 대표에게 보낸 이메일이 먼저 나온다. 일제히 지난 9일 발송한 이메일로 이것은 사원들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 배 대표가 요청한 것이라 한다. 이메일들은 하나같이 주장하고 있었다. 이제는 투사가 돼버린 사람들과 함께 일할 수 없다고. 이메일의 발신인 이름과 메일주소는 까만 사인펜으로 덧칠돼 알아볼 수 없었다.

 

이어진 설문지는 앞서 언급한 바 과장급 이하 직원 58명의 것으로 보이며 복직 '찬성'과 '반대'라 인쇄된 글 뒤에 동그라미로 의사를 표현했다. 대답은 태반이 '반대'에 몰려있었다. 설문 또한 무기명으로 실시돼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는 어려웠다. 배 대표는 그러나 이것을 근거로 말했다.

 

"기륭전자 사원의 80%가 ‘저들’의 복직을 반대한다."

 

[노조 분회장은…] "사실이라도 사장이 그들을 설득해야 한다"

 

이와 관련해 기륭전자 노조 김소연 분회장은 의아하다는 반응이다. 

 

"파업할 때 회사측이 구사대를 조직해 우리를 감정적으로 건드린 이후에는 이렇다할 노노갈등은 없었다. 우리의 투쟁을 보고 '고생한다'고 격려한 직원들도 많았다. 관리직 몇 명은 (우리의 복직을) 반대할 수도 있겠으나 태반의 사원이 반대한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그들도 이 사태가 하루빨리 해결되기를 바란다.

 

최근 구조조정에서 생산직 70명이 한꺼번에 정리해고 됐으나 단 한 사람도 저항하지 않았다. 아무도 문제제기를 못 했다. 그런 사람들이 우리의 투쟁을 반대할 리가 없다. 설문결과는 왜곡됐을 확률이 높다. 그러나 만약 설문 결과가 사실이라면 그들에게도 호소해야할 일이다. 한 기업을 이끌어가는 사장이 그들을 설득하는 것이 맞다."

 

한편, 기륭전자 김영창 재무팀 이사는 조합원들을 해고한 바 없다고 잘라 말했다. 현재 복직 투쟁 중인 조합원들을 기륭전자가 고용한 일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 이들은 파견업체, 김 이사 표현을 빌면 도급업체를 통해 기륭전자에 발을 들여놨단다. 노동부는 지난 2005년 기륭전자에 불법 파견 판정을 내린 바 있다. 김 이사는 이것이 억울하다고 했다.

 

"기륭전자는 불법 파견 사실을 몰랐다. 사람이 필요해서 썼을 뿐이다. 노동부 말로는 생산라인에 100% 파견직 '근로자'를 써야한단다. 한 라인에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동시에 쓸 수 없다는 것이다. 불법 파견은 도급회사가 저질렀지만 우리가 악용했다는 거다. 억울했으나 우리는 벌금 500만 원을 물었다."

 

김 이사는 이른바 '문자 메시지를 이용한 해고 통보'라는 말에도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 문자 메시지를 보낸 것은 기륭전자가 아니라 파견업체였다는 것. 조합원들을 직접 고용한 일이 없는 기륭전자는 이들을 해고할 권한도 없었다는 게 김 이사의 주장이다.

 

재무팀 이사 "기륭전자가 고용한 일 없다"

노조 조합원 "파견 노동자들 고용한 건 기륭전자"

 

그러나 조합원 오석순씨의 생각은 다르다. 2005년 8월 노동부로부터 불법 파견 판정을 받은 것은 기륭전자였다는 것. 불법 파견 판정을 받는 순간 파견 노동자들을 고용한 것은 기륭전자란다.

 

오씨는 조합원들이 비록 파견 노동자지만 직접 일을 시키고 인력을 관리한 것은 기륭전자였다는 사실을 예로 들었다.

 

"정규직, 계약직, 파견직이 한 자리에서 일했다. 우리에게 일을 시킨 건 기륭전자 정규직 관리자들이다. 그런데도 기륭전자는 우리를 고용한 일이 없다고 오리발이다."

 

이에 "어차피 더 말해봐야 '올바르게' 보도하지 않을 거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한마디 하고 싶다"고 전제한 김영창 이사는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사실 분회장이라는 김소연씨는 말이죠…"

 

순간 옆에 있던 박동진 총무이사가 김 이사의 말을 가로막는다.

 

"그 말은 안 하는 게(좋을 텐데)…"

 

끝내 김 이사로부터 듣지 못한 '사실'은 김소연 분회장 본인의 입에서 나왔다.

 

"내가 참교육 1세대이기 때문에 노동운동하는 사람이라고 사측은 단정한다. 노조 활동 경력이 있으면 취업하면 안 되나?"

 

그렇다. 김 분회장은 참교육 1세대다. 즉, 출신 성분이 불온하다는 것. 김 분회장은 그러나 스물 셋 되던 해부터 15년 동안 줄곧 구로공단에서 일해 왔다. 이전에는 정규직 노동자였으나 회사가 파산해 오갈 데 없던 차에 기륭전자에 입사했다. 정규직 노동자를 구하는 곳이 없어 어쩔 수 없었다.

 

"저들은 이미 '근로자'가 아니라 투사이기 때문에 복직시킬 수 없다"는 배 대표, "일하게 해달라,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불순한' 생각으로 복직하려는 사람들을 어떻게 믿느냐"는 김 이사의 논리가 이해되는 대목이다.

 

그러나 투사는 노동자로 일하면 안 되는 걸까. 이들을 정작 투사로 만든 것은 누구일까. 혹시 기륭전자는 아니었을까. 그리고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구호가 불순하다면 도대체 뭐가 순수할까. 언론의 편파보도에 이력이 났다는 배 대표와 김 이사에 묻고싶은 말이다.


태그:#기륭전자, #배영훈, #김영창, #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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