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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잠시 걸음을 멈춘 13세 꼬마를 아버지는 재촉한다. 조금만 더 걷자고, 조금만 더 걸으면 고지가 눈에 보인다고. 불과 13살의 어린아이에게 가파른 산을 오르내린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아이와 아버지는 일주일에 한 번씩 꼭 산을 찾았다.

 

그로부터 11년이 지나고, 아이는 어느덧 '기자'를 꿈꾸는 24살 대학생이 되었다. 등산 때문인지 여전히 아이의 다리엔 굳은 살이 박혀있었다. 다리의 굳은 살이 지워지지 않듯, 아이와 아빠의 기억 속에도 어린 시절 함께 했던 등산은 지워지지 않는 소중한 추억이다.

 

'기자'가 꿈인 아이는 아빠에게 첫 인터뷰를 시도했다. 그때 너무 어려서 알 수 없었던 아빠의 생각들, 고민들을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이와 아빠는 오랜만에 10년 전으로 돌아가 산에서 나눴던 것처럼 꽤 긴 대화를 나눴다.

 

성장한 스물 네살, 쉰 다섯 아빠를 인터뷰하다

 

 

- 아빠를 인터뷰하는 건 아마도 처음인 것 같아요. 지금까지 숙제를 핑계로, 취재를 핑계로 참 많은 인터뷰를 해봤지만 아빠를 인터뷰하는 것은 또 다른 기분이 드네요. 어떠세요?

"나 또한 그렇다. 마냥 어리게만 본 꼬맹이가 이렇게 커서 '인터뷰'를 하다니, 이제 제법 진짜 기자처럼 보이는걸?(웃음) 이제부터 기자님이 묻는 것은 하나하나 성심성의껏 대답해야지. 미처 너에게 말할 수 없던 아빠의 고민들과 삶의 지혜들을, 이 자리를 통해서 이야기할 수 있으니 나로선 무척 영광이지."

 

- 저야말로 영광이죠. 전 특히 제가 초등학교 때와 중학교 때 아빠와 함께 했던 등산이 참 많이 기억나거든요. 그런데 아빠와 저에게 '등산'은 조금 다른,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 같아요.

"많은 사람들이 등산을 좋아하지. 특히 바쁜 현대인들에게 산은 휴식과 재충전의 공간이지. 그러나 아빠에게 산은 '정복의 대상'이었다고나 할까? 친구의 빚보증을 잘못 서줘 엄청난 액수의 피해를 봤을 때도, 승진시험의 기회를 얻지 못했을 때도(물론 다음 해에 1등으로 승진시험에서 합격했지만), 하다못해 학교에서 시험을 망친 너를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아빠는 산으로 출동했으니까."

 

- 무엇이 아빠에게 산을 '정복의 대상'으로 만들었을까요?

"음, 그러기 위해선 아빠의 이야기를 잠깐 해야 할 것 같다. 아빠의 목표는 언제나 1등이었어. 이렇게 치열한 대한민국 경쟁사회에서, 아빠가 속한 공동체에서 1등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토록 시간을 쪼개 사용해야만 했지. 지는 것을 누구보다 싫어하는 아빠였기에 새벽에 일어나서도 영어공부를 하고, 쉬는 시간에도 독서와 전공공부를 했지. 그래도 남은 시간엔 운동을 했어. 운동을 할 때도 시간이 아까워 빨리 달리면서 시간을 단축했지. 아빠는 1등이 되기 위해 인생에 '쉼'이 없었던 거야."

 

- 아빠는 제가 봐도 참 멋진 분이셨어요. 누구보다 시간관리에 철저하시고, 자기계발에 뛰어나신, '열심히 사는' 분이었거든요. 그런데 그것이 왜 '등산'과 관련이 있을까요?

"그런데 이 사회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어. 그렇게 앞만 보며 달렸지만, 목표를 정해놓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지만, 내 열정과 욕심만큼이나 뛰어난 재능과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수두룩했단다. 세상은 아침에 만원버스를 타는 것만큼이나 치열했고, 사회의 속도는 우리의 달리기보다 훨씬 빨랐어. 그때 아빠는 심한 좌절감을 맛봤지."

 

- 그때 택한 방법이 등산이었군요.

"맞아. 체력 하나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아빠였기에, 산을 오르며 등산객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추월하는 게 어렵지 않았어. 나를 신경도 쓰지 않는 등산객들을 경쟁자로 의식하면서, 반드시 그들을 제치고 이겨야겠다고 다짐했던 거지. 그래서인지 한 사람 한 사람을 뒤로 할 때마다 느끼는 우월감과 성취감은 내가 속한 경쟁사회에서 느끼지 못한 다른 감정이었단다."

 

내게 등산은 100m 달리기와 같은 것

 

- 그래서 '등산'을 정복의 대상이라고 말씀하신 거군요. 등산객들을 경쟁자로 말씀하신 것처럼요.

"다른 사람들에게 등산이 산을 음미하며 걸어 올라가는 것, 그 과정 자체가 의미있다면 아빠에게는 빨리 올라가는 것, 그 결과가 의미있게 다가왔어. 힘겹게 정상까지 올라간 후에야, 그러니까 목표를 달성한 다음에야 비로소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바라볼 여유가 생겼으니까. 그래서 아빠에게 등산은 100m달리기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다른 사람들을 뒤로 제치며 최단 시간의 속도로 결승점에 다다르는 것, 그것이 내가 등산하는 방식이었고,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기도 했지."

 

- 아빠는 누가 봐도 멋진 분이셨어요. 하지만 사랑하는 딸이 보기엔 안타까운 부분이 있기도 했어요. 항상 시간에 쫓기고 계셨으니까요.

"그랬지. 늘 공부하면서도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어, 밥 먹을 때도 책과 신문을 손에서 놓지 않았지만, 그러면서도 참 시간은 부족하더라."

- 그런데 참 아이러니한 사실은 제가 아빠를 참 많이 닮았다는 것이죠. 아빠가 멋있고 부럽기는 했지만 닮을 자신은 없었는데, 어느 순간 저도 아빠를 닮아가고 있더라고요.

"아빠 또한 너를 통해서 아빠의 청년시절을 참 많이 본단다. 옛날에 아빠도 너처럼 한 가지의 목표를 정해놓고 그것을 집중적으로 실천하기보다는 여러 목표를 설정해놓고 바쁘게 사는 게 훨씬 속 편했던 사람이니까. 그래서 '느림'과 '여유'를 못 견뎌했지."

 

- 그래서 산에 오르면, 늘 저를 재촉하셨던 거군요.

"아빠의 강박적인 시간관념 때문이기도 했지. 네가 결승점에 빨리 도착하기를 바랐어. 더 빠르게 도착하기를 바랐고, 더 높은 하늘을 바라보기를 바랐어. 물론 그것이 욕심인 것을 깨달았지만."

 

그리고 찾아온 '느림의 미학'

 

- 결국 이 이야기를 꺼내게 되네요. 그렇게 앞만 보고 달리시던 아빠에게 제가 원치 않는 '쉼'을 가져다 드렸죠.

"4년 전 네 대학입시 실패를 말하는 거겠지? 하지만 그 시기가 아빠에겐 새로운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었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단다.

 

-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많이 힘들어하셨잖아요. 제가 좋은 대학에 가길 바라셨으니까요.

"돌이켜보면 그때 우리가족은 참 힘들게 '고3인생'을 보냈던 것 같구나. 네 엄마도 강박적으로 새벽기도를 나갔었고, 나 또한 새벽마다 너를 깨워 영어청취방송을 틀어주곤 했지. 또 네 얼굴을 마주칠 때마다 '공부는 어떻게 하고 있느냐'면서 잔소리를 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네가 좋은 학교에 가길 간절히 바랐는데 결국 원하는 대학에 떨어진 거야."

 

- 그래서 의도치 않게 '재수'라는 이름으로 1년을 쉬어야 했죠.

"그래. 하지만 그 1년간의 '기다림'은 아빠 삶의 속도를 느리게 해줬단다."

 

- 어떻게요?

"너의 대학불합격소식 이후 우리가족은 마땅히 등산을 가며 재충전을 해야 했지만, 우리는 휴식의 방법으로 다른 것들을 선택했잖니. 너도 기억날 게다. 찜질방에 가서 하루 늘어지게 자고 오기도 하고, 할머니 댁 과수원에서 가서 과일을 따먹으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 시간 부족으로 미루었던 근사한 곳에서의 외식도 그때 많이 했던 것 같구나. 아빠는 그 시간들을 통해서 진정한 '쉼'을 누렸고, 반드시 네가 좋은 대학에 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도 벗어날 수도 있었어."

 

- 맞아요. 저도 아빠 덕분에 맘 편히 '재수'를 시작할 수 있었어요. 그 전엔 죄송한 마음만 가득했거든요. 저의 '재수'가 아빠에게도 중요한 의미를 지녔던 것 같아요.

"아빠는 그 전까지 느린 걸음은 멈춤이라고 생각해왔단다. 하지만 재수는 멈춤이 아니라 새로운 도전을 위한 잠시의 기다림이었던 거지. 그때 아빠가 얻은 최고의 수확이 바로 '느림의 미학'이었으니까.

 

- 그렇다면 그때 느꼈던 '느림의 미학'이 아빠의 인생에 조금이나마 변화를 줬나요?

"아빠는 내가 아닌 세상이 정해놓은 속도에 맞춰 쫓아가느라 늘 고군분투했고, 그 때문에 지치고 힘겨울 때가 많았단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속도에 한 발자국 뒤쳐지더라도 우리의 삶은 변하지 않음을, 중요한 것은 그 시간을 관리하고 누리는 우리에게 있음을 깨달았지."

 

- 못난 누나를 닮았는지, 중윤이도 수능을 한 번 실패했죠. 그런데 그때 아빠의 모습은 전과 많이 다르셨어요. 묵묵히 기다리는 방법을 터득하신 느낌이었다고나 할까요?

"네 동생도 수능을 실패한 후 많이 절망했지. 하지만 너를 통해 아빠는 우리에게 우리 나름의 속도가 있음을 알았으니까. 진심으로 중윤이를 격려하고 다독여줄 수 있었던 것 같아. 아빠는 앞으로도 수많은 실패를 경험할 것이고, 너희들의 실패도 참 많이 보게 될 것 같다. 하지만 실패 후 재도전하기까지의 과정들과,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도 반드시 희망은 존재하기 마련이더라고. 그래서 아빠는 포기하지 않고 나중의 결실을 기다리려고. 희망은 반드시 결실을 맺고, 웃음은 반드시 찾아오니까 말이야."

 

아이는 한참이나 성장한 후에도 가끔 아빠와 함께 등산을 간다. 빠른 아빠의 걸음걸이를 따라잡지 못할 때, 아빠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아이가 숨을 고르기까지 기다려준다. 후들거리는 아이의 다리를 재촉하던 10년 전과는 크게 다른 모습이다.

 

그렇게 느리게 등산을 하다보니, 느리게 걷다보니 두 부녀의 눈에 예전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요즘엔 참 많이 보인다. 두 손 꼭 잡고 쉬엄쉬엄 오르고 있는 중년의 부부들, 산 곳곳에서 보이는 새들과 미처 보지 못한 푸른 하늘, 자연 특유의 울림, 그리고 바로 옆에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고 있는 사랑하는 아빠, 사랑하는 딸.

덧붙이는 글 | 〈가족 인터뷰〉 응모글


태그:#가족, #느림의 미학, #느리게 걷기, #등산,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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