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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늦둥이로 태어난 저는 부모님을 일찍 여의었습니다. 장인어른도 돌아가신 지 10년이 넘었고 장모님 한 분이 살아계십니다. 장인·장모를 결혼 전부터 어머니·아버지라고 불러왔는데요. 삼대독자인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영향이 큰 것 같습니다. 

'오십 넘으면 인생을 알기 시작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저도 삶의 맛을 조금씩 알아가는 모양입니다. 심심할 때는 장모님을 뵈러 가 말 상대도 되고, 함께 잡채밥 사먹는 걸 취미처럼 즐기고 있으니까요.

"어버이 살아신 제 섬기기를 다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달프다 어이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 일 이 뿐인가 하노라."

조선 중기 가사문학의 대가였던 송강 정철의 시조인데요. 부모가 죽은 후에 후회하거나 슬퍼하지 말고 생전에 효도를 다할 것을 가르치고 있어, 한 번쯤 읊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올려보았습니다.   

어버이날(8일)은 장모님과 점심을 먹기로 약속한 날인데 인터뷰를 곁들여야 겠다고 마음먹고 집을 나섰습니다. 어버이날이니 잡채밥보다 비싸고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야 하는데, 집을 비워둘 수 없어 어린 조카들과 간자장을 불러 먹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그래도 맛있게 드시는 걸 보니 아쉬움이 덜하더군요.

상을 물리치고 음료수를 마시면서 자연스럽게 장모님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아내와 26년 동안 살면서 귀동냥으로 아는 것도 있지만, 궁금했던 점들을 하나라도 보충해서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해왔거든요. 해서 가벼운 마음으로 질문해 나갔습니다. 

17세 때 장인과 백년가약을 맺다

막내딸이 운영하는 아파트 상가의 화장품 가게에 구경 오는 것도 행복하다는 장모님, 그러나 남의 눈이 있어 자주는 나오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 장모님 막내딸이 운영하는 아파트 상가의 화장품 가게에 구경 오는 것도 행복하다는 장모님, 그러나 남의 눈이 있어 자주는 나오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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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옥구군 대야면이 고향인 장모님은 올해 82세로 10년 연상인 장인을 17세 때 만났다고 합니다. 시할아버지 때부터 살아온 시집의 댓돌에 오르면 김제·만경평야와 접하는 대야 들녘이 앞으로 펼쳐지고 뒤로는 하늘로 솟은 소나무들이 빽빽하게 숲을 이루고 있었다고 합니다.   

장모님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고집이 세고 차가웠다는 당신의 시어머니 얘기를 꺼내셨습니다. 신혼 때 시어머니가 새참을 내가다 물병을 깨뜨려놓고 며느리가 깼다고 핑계를 댔는데, 장인이 "내가 깼다"라며 편들어 주었다고 하더라고요. 어버이날 사위가 사주는 간자장을 먹으니까 일찍 죽은 남편이 생각났던 모양입니다.

"사주로 풀면, 뱀띠인 아버님(장인)은 겨울잠을 자는 12월생이니 먹을 것이 없는 때에 태어났고, 토끼띠인 장모님은 6월생이니 한참 활동하실 땝니다"라고 했더니, "당신(장인)도 생전에 나보고 '비얌허고 토끼허고 만났는디 만날 당신 복으로 먹고 산다'라는 말을 자주 혔어"라며 특유의 미소를 지으셨습니다. 

시어머니가 아팠을 때 생닭에 옻나무를 넣고 약을 해드리느라, 몸이 붓고 옻이 올라 몇 년을 고생했다며 한숨을 내쉬더라고요. 그래도 군산에 있는 모 교회 장로의 연설을 듣고 병이 기적같이 낫는 바람에 교회에 나가게 된 것을 무척 고맙게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현직 목사이며 신학대 교수인 큰아들이 고등학교에 입학하더니 공부를 싫어해서 속상했었고, 없는 살림에 셋째아들이 고등학교를 전주로 진학하는 바람에 하숙비와 용돈으로 한 달에 쌀 두 가마씩 대느라 마음고생이 심했다며 공부를 잘했던 딸들 보기가 미안하다고 하더라고요. 

모두가 피죽으로 연명하던 2차 대전 막바지에, 군대에 가면 끼니 걱정은 하지 않을 것이라며 남 대신 군대에 징발되어 나갔다 전사했다는 시동생 얘기도 빼놓지 않았습니다. 일제의 잔인했던 핍박을 증언하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더군요.     

평생 남의 재산 늘려주기만 했던 삶

팔순이 넘은 노인을 어떻게 하지원 씨에게 비하겠습니까, 그러나 젊은 미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다른 멋을 가지고 있지요.
▲ 장모 팔순이 넘은 노인을 어떻게 하지원 씨에게 비하겠습니까, 그러나 젊은 미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다른 멋을 가지고 있지요.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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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남의 농지를 빌려 짓는 소작농이었지만 두 분이 모두 부지런하셨으니까 논을 사거나 뭉칫돈을 모았던 적이 없으셨느냐고 물었더니 "어치게 혀서 논 한 필지기 사기는 혔는디 인공(한국전쟁) 때 다 공출로 다 빼끼고, 환갑이 넘드락 지질이도 고생만 험서 살었지"라며 한숨을 내쉬더군요.

집에서 양봉도 하고 손수 양계장도 지어 닭도 많이 키웠고 염소와 돼지도 사육하면서 한때는 젖소를 네 마리나 키울 때도 있었다고 합니다.

젖소 한 마리에 200만원 하던 시절, 모두 팔아 전남 영광의 간척지를 빌려 소작농을 했는데 2년마다 권리금을 내다보니 몇 년 후에는 모두 날려버리고 빈손으로 돌아왔다며 당시를 회상했습니다.   

"농사 지어먹것다고 천막서 살믄서 말도 못허게 고생혔지. 남의 논바닥이다 농사져서 적자만 나고 몽땅 날려버렸지만, 그리도 오래 살으니께 이렇게 좋은 꼴도 보고 사는디, 그냥 반은 평생 고생만 징그랍게 허다 죽었어.

쌀 계(契)를 일곱 번이나 혔는디, 1년에 100가마를 먼저 타서 살림에 쓰고 그것도 모자라면 복장려를 얻어가꼬 애들 학교 보내고 살림험서 나머지로는 남의 논 얻어 농사짓고 그렸지. 그렇게 험서 늘어난 빚이 당신이 죽고 난 뒤에야 해결된 거여."

한참 열이 달아오르기 시작하는데 막내며느리에게서 어머니의 안부와 토요일에 치러지는 결혼식에 무슨 옷을 입고 참석하실 것인지를 묻는 전화가 걸려와 잠시 쉬었습니다. 그렇지만, 수화기를 놓은 장모님은 계속 말을 이으셨습니다.  

"나는 평생 맘 편허게 밥을 먹어본 적이 없었어. 그런디 이르케 오래 살은 게 존 꼴도 보고 살잔여. 근디 당신은 짐승 키운다고 고생만 징글징글 허게 살다 갔지. 그리도 넘한티 험헌 꼴 안 뵈주고 떠난 것이 그게 감사허다고···"

돌아가신지 10년이 넘는 장인 얘기를 연거푸 꺼내시던 장모님이 "하룻밤 자고 나믄 이자가 눈덩이처럼 커질 때는 금방이라도 죽고 싶었는디, 집이 있는 만자산으로 온다고 딴 동네 가는 길로 걸어갈 때도 있었당게… 그런 날이 한두 번이 아녔어"라고 할 때는 눈가에 물기가 도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험헌 꼴 안 보고 죽는 게 가장 큰 복"

지금까지 살아오며 아쉬웠던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웃으며 "멍청헌 게 죄지 아쉬울 꺼시 머가 있겄어"라며 시어머니 모시느라 장사도 못하고, 과일장수를 차떼기로 할 기회가 있었는데, 눈이 없어(배운 게 없어) 포기했던 게 가장 미련이 남는 모양이었습니다.  

빈농에서 태어나 17세에 동네결혼을 해서 시부모를 모시기 시작했고, 가족이 부쳐 먹을 땅뙈기나 번번한 집 한 칸 장만하지 못하고 남의 재산만 불려주며 살아온 장모님과의 인터뷰는, 온갖 탄압과 가난을 이겨내고 경제 대국을 만든 한국의 어머니 대표 한 분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진 게 없으니 관광지로 놀러다니며 살지는 못했지만, 싸우거나 불뚝 거리지 않고 애들 크는 걸 볼 때가 가장 좋았다는 장모님은 지금이 가장 편하다고 하셨습니다. 아들과는 살아본 적이 없는데 사위와는 10년이 넘게 살았으니 얼마나 행복이냐며 만족해했습니다.  

대화를 끝내며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시방같이 편허게 사는디 무슨 다른 생각이 있겄능가, 험헌 꼴 안 보고 이렇게 살다 죽는 게 복이지"라며 목사 어머니가 남의 것 떼먹고 산다는 소리 듣지 않으려고 식모살이부터 온갖 허드렛일을 다했다며 회상에 잠겼습니다.


태그:#장모님, #간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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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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