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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불법으로 취득한 농지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취재한 <국민일보> 편집국장과 사회부장에게 '기사를 내보내지 말아달라'라고 전화한 게 압력이 아니라는 청와대 이동관 비서관의 주장에 탄식이 절로 나오네요.

 

<동아일보> 논설위원까지 지낸 청와대 대변인이란 분이 '압력'의 뜻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입니다. 답답한 마음에 국어사전에서 '압력'을 찾아보았더니 '남을 자기 의지에 따르도록 압박하는 힘'이라고 적혀 있고, 예문에 '소속기관에 ~을 넣다'라고 덧붙이고 있었습니다.   

 

이 대변인의 해명에 따른다면, 친구에게는 어떤 부탁을 해도 압력이 아니라는 얘기가 됩니다. 하도 어처구니가 없는 해명이라서 이해하는 데 참고가 될 것 같아 제가 경험했던 일화 하나를 소개합니다.

 

"김 주사! 잘 검토해봐요"라고만 했는데

 

달마다 공무원 세 사람 월급 정도의 세금을 납부하던 30년 전 얘기입니다. 당시 저는 세무서 담당 계장에게 매달 봉투를 바치면서도 높은 과표와 세금 때문에 골머리가 아팠습니다.

 

그런데 가깝게 지내는 선배의 형님이 관할 세무서 과장으로 부임해왔습니다. 급하면 호랑이 꼬리라도 잡고 늘어진다고, 선배에게 부탁을 했더니 형님에게 전화해놓겠으니 적당한 선물을 사들고 직접 집으로 찾아가보라고 하더군요.

 

해서 예쁜 선물을 하나 사들고 박 과장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불안한 마음으로 갔는데 반갑게 맞아주어 다행이었습니다. 현관에 들어서기 무섭게 명함을 건네며 제 소개를 한 뒤 커피를 마시고 "박 과장님! 내일 오후 2시쯤 세무서에서 뵙겠습니다"라고 인사하고 나오는데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이튿날 신고할 서류를 챙겨 떨리는 마음으로 세무서로 갔지요.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사람들 틈 사이로 박 과장과 얼굴이 마주쳤지만, 눈인사만 건네고는 담당 직원인 김 주사 책상 앞으로 가서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마침 제 차례가 왔기에, 고양이 앞을 기어가는 쥐처럼 조심스럽게 걸어가 김 주사 옆에 앉았습니다. 가끔 가게에 들르기 때문에 안면이 있는데도 김 주사는 처음 대하는 사람처럼 바라보며 서류를 내놓으라고 하더군요.

 

순진했던 저는 박 과장이 한시라도 빨리 와서 김 주사에게 '이 젊은이 과표가 너무 많이 잡혀 있는 것 같은데, 가능하면 낮춰보라'라고 부탁해주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돌기둥처럼 꼼작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어 얼마나 긴장하고 답답했는지 모릅니다.

 

준비해 간 서류를 내놓고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박 과장이 옆으로 다가오더군요. 안심이 되면서도 가슴이 얼마나 떨리던지···. 그런데 제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고 김 주사에게 "뭐가 잘 안 맞나?"라고 하더니 "잘 검토해봐요!"라는 말만 던지고 돌아가더라고요. 얼마나 실망했는지 저도 모르게 "틀렸구나!"하는 소리가 나오더라고요. 

 

그러나 사건은 박 과장이 돌아간 다음에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거만하고 퉁명스럽던 김 주사의 말투와 표정이 닭살이 돋을 정도로 변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충격이 컸으면 당시 상황을 30년이 지난 지금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겠습니까.

 

김 주사는 표정과 말투만 변한 게 아니라 "올해는 소득세를 얼마나 냈으면 좋겠어요?"라고 묻더군요. 세무서 직원과 말하는 것조차 두려워하던 시절에 과표를 깎아주겠다는 의미가 담긴 말을 듣는다는 것은 꿈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쓴웃음이 나오는 추억이지요.

 

이동관 대변인에게 묻습니다

 

"이번 건을 넘어가 주면 반드시 은혜는 갚겠다"라며 자신의 '영농계획서' 위조 등 새로운 사실을 취재한 내용이 담긴 기사를 올리지 말아 달라고 언론사에 전화를 건 게 외압이나 협박이 아니라는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에게 묻습니다.

 

30년 전 세무서 박 과장은 부하 직원에게 "잘 검토해봐요!"라고만 했지, 잘 봐달라거나 세금을 깎아달라고 부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혜택을 본 저는 박 과장이 부하 직원에게 압력을 넣었다는 생각에 지금도 변함이 없는데, 이 대변인은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제 이웃에 사는 아저씨가 세무서에 가서 김 주사에게 "잘 검토해봐요!"라고 했다면 세금 감면은커녕 미운 털이 박히지 않으면 다행이었을 것입니다. 같은 말도 말하는 사람의 위치와 장소, 그리고 때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는 뜻이지요.  

 

또 무기를 이용하거나 협박을 하는 것만이 압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소연도 말하는 사람의 위치와 듣는 사람의 처지에 따라 '압력'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입니다.

 

이 대변인은 언론사 입사 동기인 변재운 <국민일보> 편집국장이 친구인 점을 강조하며 "속된 말로 '야, 좀 봐줘'라고 했다"며 부탁이라고 변명하고 있는데, '압력'이란 낱말 뜻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는 것 같아 여간 안타까운 게 아닙니다.

 

이동관 대변인은, 청와대 대변인 임명장에 그 어떤 친구도 거역할 수 없는 막강한 권력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태그:#이동관대변인, #압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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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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