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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포함한 아시아 각 지역에서 역사왜곡이 여전히 진행되는 가운데 평화를 지향하는 공통된 역사인식을 위해 한일시민이 함께 걸으며 배우고 느끼는 평화순례가 지난해에 이어 올해 4월에도 오키나와-제주로 이어졌다. 제주-오키나와는 한일 양국에서 '평화의 섬'이라 불리지만 화려한 관광지로 개발되어 전쟁과 폭력의 상처는 아직도 소외당하고 있는 땅이다. 이번 답사는 외부에서 강요된 해군기지 건설로 인하여 마을 공동체가 찢겨져 버린 강정마을, 태평양 전쟁 말기 군사요새화되었던 전운이 감도는 역사 현장, 냉전의 희생양이 되어 쓰러져갔던 4·3의 아픈 땅을 더듬어가는 여정으로 진행되었다. 세 편의 글로 나누어 그 여정을 함께 들여다 보려 한다. - <기자 주>

용눈이오름을 맨발로 걷는 순례단. 뒤쪽으로 4·3을 세상 밖으로 드러내었던 첫 현장, 다랑쉬 오름의 아름다운 풍광이 한눈에 들어온다.
 용눈이오름을 맨발로 걷는 순례단. 뒤쪽으로 4·3을 세상 밖으로 드러내었던 첫 현장, 다랑쉬 오름의 아름다운 풍광이 한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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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뉴라이트 진영이 펴낸 대안교과서에 "남로당이 일으킨 무장 반란, 북한 김일성의 국토완정론 노선에 따라 일어난 것"이라고 서술되어 논란이 일고 있는 가운데 4·3은 조용히 60주년을 맞이하였다. 남로당원은 열외로 하더라도 냉전의 희생양으로서 이념과는 아무 상관없이 억울하게 죽어간 영혼들을 두 번 죽이는 일이 시도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때에 한일 평화순례단은 제주 4·3의 진실에 더 다가서고 4·3을 올바로 역사에 자리매김하여, 평화와 인권 교육의 선례로 삼고자 제주 곳곳의 4·3 유적지를 돌아보았다. 순례단은 유적지 견학뿐 아니라 60주년을 맞이하여 제주특별자치도와 민예총 제주지회 등 각 단체들이 열성적으로 준비한 전야제를 비롯 희생자 위령제, 해원상생 큰굿 한마당, 국제학술대회, 4·3 평화미술제 등에도 참여하였다. 

제주 4·3으로 '잃어버린 마을'이 된 삼밭구석. 팽나무 한 그루 남긴 채 흔적도 없이 사라진 삼밭구석처럼 제주도에는 84곳 가량의 마을이 4·3 참극으로 말미암아 불타 버렸다.
 제주 4·3으로 '잃어버린 마을'이 된 삼밭구석. 팽나무 한 그루 남긴 채 흔적도 없이 사라진 삼밭구석처럼 제주도에는 84곳 가량의 마을이 4·3 참극으로 말미암아 불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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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도 없이 사라진 마을이 80여 군데

3월 31일 오전, 순례단은 먼저 '제주4·3연구소' 김창후 상임이사가 함께 하는 가운데 일제말기 수탈과 강제동원의 아픈 역사를 전시하고 있는 평화박물관과 가마오름을 견학했다. 제주 시내에서 평화동까지 이동하는 동안 차창 밖으로 남제주군 안덕면의 잃어버린 마을 '삼밭구석' 표석을 발견한 일행은 잠시 멈추어 섰다.

'제주4·3연구소'가 2003~2004년에 연구 조사한 곳만 해도 4·3 당시 뭍에서 온 토벌대에 의해 주민들이 참살 당하고 마을이 불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곳이 84군데나 되었다고 한다. 삼밭구석도 그런 마을 중 하나인데 농사와 목축으로 생계를 꾸리며 300년 넘게 이어져온 소박한 마을이 순식간에 팽나무 한 그루만 남긴 채 한줌의 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또 다른 잃어버린 마을 '원동마을'에 대한 김창후 상임이사의 설명도 들을 수 있었다.

"4·3 때 해안가 마을만 빼고 중산간 마을은 다 소개하였는데 원동마을도 산간마을에 속해 있는 마을이었습니다. 48년 11월 원동마을을 불 태우고 주막 앞으로 주민들을 집합시킨 후 총을 쏘고 휘발유를 부어 불 질렀다고 합니다."

일제시대 탄약고 터, 4·3과 6·25로 수백 명 양민 학살 당한 섯알오름

삼밭구석과 평화박물관을 거쳐 순례단이 찾은 곳은 모슬포 섯알오름 학살터였다. 바람이 너무 심해서 '못 살겠다' 하여 '못살포'라는 별명이 붙여진 대로 제주 시내 곳곳에 핀 벚꽃· 유채꽃 풍경과는 대조적으로 매서운 바람이 불어오는 척박한 동네였다. 섯알오름 학살터는 바로 앞까지 버스가 달릴 수 있게끔 길이 닦여져 있었으나 그것이 오히려 절절한 역사의 땅을 더 훼손하고 있었다.

섯알오름 학살터 일대는 본래 일제의 군사전적지인 알뜨르 비행장과 격납고, 지하진지 등이 많았던 곳이다. 섯알오름에 패인 구덩이도 일제말기 도내 최대의 탄약고 자리로서 일제가 패전하면서 폭파시켜 생긴 곳이다. 그런데 몇 년도 채 안 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수백 명의 예비검속자(예비검속법 자체가 일제시대에 우리 민족을 감시하고 압살할 목적으로 악용되다가 미군정 때 폐지된 법이었다)가 혼란기를 틈타 정당한 재판도 받지 못하고 학살당해 쓰레기더미처럼 이 구덩이 안에 던져졌다.

구덩이가 깊고 넓어 오히려 '사람을 죽이기에 안성맞춤'이었다는 섯알오름의 웅덩이는 일제의 지하군사시설과 4·3 학살극이라는 이중의 비극을 떠안아야 했던 한맺힌 땅인 셈이다. 순례단은 희생자 추모비 앞에서 추도의 묵념을 한 뒤 김창후 상임이사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섯알오름 학살터에 세워진 추모의 비석.
 섯알오름 학살터에 세워진 추모의 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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섯알오름 희생자 추모비.
 섯알오름 희생자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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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슬포 개들이 사람 시체를 먹고 미쳐 버리다

"이곳은 90년대 초까지 출입 자체가 어려웠습니다. 따라서 누가 어떻게 죽었는지도 알 수 없는 세월이 길게 지속되었지만, 훼손된 시신에서 나일론이나 금니 등을 발견하면서 죽은 사람의 신분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연구조사를 하다가 들었던 말 중에 가장 충격적인 것이 있습니다. 50년 8월 20일이면 연중 가장 무더운 때입니다. 생존자의 증언에 따르면 이곳에 시체 몇 백 구가 던져진 뒤 모슬포 개들이 시체 썩은 냄새를 맡고 몰려와 시체를 뜯어 먹고 미친 개가 되었다고 합니다. 미쳤기 때문에 다시 동네로 돌아와 사람을 물어 뜯어서 결국 총으로 쏴 죽였다고 합니다."

김창후 이사의 등 뒤로는 수많은 억울한 목숨들이 쓰러져간 구덩이가 있었는데 그 땅에는 노오란 유채꽃이 수북하게 피어올라 있었다. 이 땅에 심겨진 저 유채꽃을 한 송이 한 송이 모두 헤아리면 제주 전역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생명의 숫자가 될까, 아니면 살아남아서도 끝끝내 4.3과 한국전쟁 때문에 지옥 같은 삶을 살아야 했던 사람들의 아픈 눈물일까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

그러나 이런 중요한 역사 현장에서도 우리나라 역사보존의 허술함을 한탄해야 했다. 감추고 싶은 비극일수록 더 생생하게 전달해야 하는 것이 살아남은 자와 다음 세대의 의무임에도 불구하고, 섯알오름 학살터에서는 비극이 일어난 당시 그 자리에 꽂혀 있던 철사줄을 뽑아서 한쪽으로 치워두었다.

섯알오름 학살터. 전쟁의 혼란기에 억울하게 죽임당한 이들은 이 구덩이에 던져져 시체마저 제대로 수습되지 못하여 끔찍한 풍경을 자아냈다고 한다.
 섯알오름 학살터. 전쟁의 혼란기에 억울하게 죽임당한 이들은 이 구덩이에 던져져 시체마저 제대로 수습되지 못하여 끔찍한 풍경을 자아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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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 당시 실제로 사용되었다는 총알.
 학살 당시 실제로 사용되었다는 총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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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후 상임이사는 "사람들을 죽여서 구덩이에 던질 때 이곳에는 철사들이 삐죽삐죽 솟아있었는데 시체들이 그곳에 꿰여져서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끔찍한 풍경이었다고 합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진실이므로 저 철사도 원래 있던 자리에 그대로 두어야 하는데, 왜 가만두지 않고 그것을 뽑아내버린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라고 혀를 찼다.

우리를 놀라게 하는 장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조금 더 내려가다 보니 한쪽에 허름한 진열대 같은 것이 있었다. 유리문 안으로 학살에 사용되었던 실제 총탄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관리하는 사람도 없이 방문객이 와서 마음대로 문을 열고 가져가 버려도 모를 정도로 방치되고 있었다.

용눈이 오름에서 다랑쉬 오름을 바라보다

4월 2일, 순례단은 '곳자왈 작은학교' 문용포 선생의 안내를 받으며 용눈이 오름에 올랐다. 맨발로 오름의 풀과 흙을 밟으니 제주도의 산 기운이 몸속으로 퍼지는 기분이 들었다. 제주도에서는 말이나 소를 방목하다 보니 무덤을 훼손하지 못하게 하려고 무덤 주변을 네모나게 돌로 둘러싸는데 이곳에서도 그런 무덤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얼마쯤 오르니 다랑쉬 오름의 장관이 시야에 들어왔다. '탐라사진가협의회'에 따르면 4·3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 것조차 금기시하며 망각을 강요당해 왔던 1992년, 다랑쉬굴에서 희생자 시신 11구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4·3 사건이 세상 밖으로 드러난 첫 순간을 바로 다랑쉬 오름이 품고 있다고 생각하니 아픈 곳이 또 아파오는 느낌, 그냥 털썩 주저앉아 다랑쉬 오름을 바라보며 기도를 올리고 싶은 마음이 가득히 차올랐다.

다랑쉬굴에서 발굴된 시신 중에는 어린이와 부녀자도 포함돼 있었으나 색깔논쟁 끝에 유해는 발견 45일 만에 화장돼 바다에 뿌려지고 동굴 입구는 봉쇄되었다. 증언에 의하면 이 유해는 당시의 참화를 피해 숨어다니던 부근 해안마을 출신들로 48년 11월 18일에 희생됐다고 한다. 지금도 그들이 사용했던 술, 항아리, 사발 등 생활도구들은 굴 속에 그대로 남아 있단다.

용눈이 오름을 내려와 곧장 북촌리 너분숭이 애기무덤이 있는 곳으로 달렸다. 이곳은 4·3사건 당시 하루에 300여명 이상이 학살된 현장으로 현재 기념공원이 조성돼, 이곳을 무대로 쓰여진 소설 <순이삼촌>의 문학비와 위령비가 세워져 있고, 기념관도 조성 중이다. 북촌리 희생자의 436위의 이름 하나 하나를 새긴 위령비 뒤쪽에는 제주 출신 소설가 현기영 씨의 시가 세계인들을 향해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제주도 4.3사건 당시 주민 479명이 희생됐던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 너분숭이. 위령비 뒤쪽으로 소설가 현기영씨의 시가 절절하게 새겨져 있다.
 제주도 4.3사건 당시 주민 479명이 희생됐던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 너분숭이. 위령비 뒤쪽으로 소설가 현기영씨의 시가 절절하게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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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자년 섣달 열아흐레 날/그 날의 참사를/ 뉘라서 잊을 것인가!/ 포악무도한 세력의 사나운 총구 앞에서/436명 무죄한 촌맹이 한날한시에 쓰러져 가던 그날/ 불타는 마을의 충천하는 붉은 화광과/ 벼락치는 총성 속에/ 낭자한 통곡과 비명들이 하늘을 찌르던/ 그날을/ 뉘라서 잊을 것인가!/ 역대 독재정권들이 반세기에 걸쳐/ 그 참사의 기억을 말살하려고 무섭게 금압했지만/과연 그것이 잊혀졌던가/ 이제 우리는/ 무자년의 그 참사를 영원히 잊지 않기 위하여/ 여기에 돌을 세운다/ 용서하지만 잊지 않기 위하여/ 영구불명의 돌을 세운다/ 우리는 또한/ ... 전쟁반대의 이름으로 이 돌을 세운다/ 전대미문의 참사인 이 사건은/ 국가를 향해/ 세계를 향해/ 당당히 평화를 외칠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인간의 목숨/ 그 창창한 미래의/ 모든 가능성을/ 한 순간에 빼앗긴 채/ 너무도 작은 시간을/ 살다간/ 슬픈 영혼 영신님께

북촌리에서 희생된 주민 479명의 영위.
 북촌리에서 희생된 주민 479명의 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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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리 너분숭이 마을은 한 날 한 시에 제삿날

북촌리는 1949년 1월 17일 인근 마을인 함덕리 주둔 2연대 3대대 군인들이 북촌리 주민들을 북촌초등학교에 강제로 집결시킨 뒤 인근 소나무 밭 등으로 끌고 가서 무차별 처형한 곳이다. 당시 대대장의 운전병 역할을 했던 김병석 씨는 "참모회의에서 한 간부가 군인들이 적을 사살한 경험이 없으니 연습삼아 경험을 갖게 하자"며 주민들을 끌고 나가 총살하게 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용눈이 오름과 북촌리 순례길에 함께 했던 문용포 선생은 "한 날 한 시에 주민들이 죽었기 때문에 이 마을에서는 한 날 한 시가 제삿날이다"라고 말했다. 공원 한 쪽에는 작은 흙무덤과 함께 돌무더기로 둘러싸인 무덤들이 즐비했다.

'제주4·3 연구소' 홈페이지에는 이곳 애기무덤에 대해 "어른들의 시신은 임시매장했다가 사태가 안정된 후에 안장되기도 했으나 어린 아이와 무연고자 등은 임시매장한 상태로 지금까지 남아있다. 그곳이 지금의 너분숭이 소공원이다. 북촌주민들이 밭일을 하다가 돌아올 때 쉬어가던 넓은 땅이 있어서 '너분숭이'라고 불리는 이곳에는 애기무덤 20여기가 군락을 형성해 있어 4·3 당시 참혹했던 북촌 대학살을 증언하고 있다.

이곳은 4·3 이전에도 어린 아기가 병에 걸려 죽으면 묻던 곳이라 한다. 지금까지 소나무와 가시덤불이 무성하여 무덤이 드러나지 않았다가 2001년 북제주군 소공원 조성사업으로 부지가 정리되면서 드러나게 되었다. 현재 이곳에는 20여기의 애기무덤이 모여 있고 그 옆 밭과 길 건너에도 몇 기의 애기무덤이 있다. 그중 적어도 3기 이상은 북촌대학살 당시 희생된 어린아이의 무덤이다"라고 적혀 있다.

북촌리 너분숭이 마을.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며.
 북촌리 너분숭이 마을.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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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분숭이 애기무덤을 깊은 눈으로 바라보는 사진작가 이시우 씨.
 너분숭이 애기무덤을 깊은 눈으로 바라보는 사진작가 이시우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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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로 <태백산맥> 전권을 완독했을 정도로 한국의 역사를 깊이 응시해온 나가사키의 고등학교 영어교사 출신인 기무라 히데토씨는 제주도에서 영어판으로 <순이삼촌>을 읽었다. 그는 소설 <순이삼촌>을 돌비에 새겨놓은 공원을 관람한 뒤 "우리는 시간이 흐르면 오늘 여기서 받은 충격과 아픔을 잊어버리고 가끔씩 생각해내겠지만, 순이삼촌 같은 분들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과거의 그 한 순간에 영원히 머물러 고통 받으며 살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순이삼촌이 자살을 한 것인지, 자연사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죽을 때까지 4·3의 충격 안에서 살아야 했던 것 같습니다"라며 "4·3을 역사적으로 어떻게 해석해야 할 지는 아직 헷갈리지만 죽은 사람들에게는 4·3이 과연 어떤 의미였을까 궁금합니다. 4·3의 의미를 올바르게 생각하지 않으면 그들을 위한 해원 굿과 화해라는 정신이 진정으로 이루어질 수 없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북촌리 현장에서는 당시 무장대는 몇 명이나 되었느냐를 두고 설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 날 한 시에 수백 명이 죽었다는데 그들이 모두 남로당 무장대였는가를 숫자적으로 헤아려 보며 학살의 정당성에 대해 논쟁이 벌어진 것이다.

사진작가 이재갑씨는 "당시 남과 북이 대립되는 상황이고 냉전시대였으니까 남로당원들을 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많은 민간인들을 무장대 또는 협력자로 몰아서 순서나 방법, 절차를 완전히 무시하고 무차별적으로 죽이고도 그 역사적 진실을 뒤집고 폭동이었다고 평가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며 "정권이 바뀌고 나서 4·3의 역사를 다시 폭동으로 끌어내리려는 움직임이  있는데, 현장에 와보지도 않고 남이 올리는 보고서나 보고, 혹은 당리당략에 따라 이들을 함부로 단죄하는 것은 큰 문제"라고 말했다.

북촌리 너분숭이 마을에서 4.3의 원인과 북촌리 학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는 문용포(곶자왈작은학교) 선생.
 북촌리 너분숭이 마을에서 4.3의 원인과 북촌리 학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는 문용포(곶자왈작은학교)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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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용포 선생도 제주 4·3에 이념 색칠을 하는 것을 경계하며 이렇게 말했다.

"통상적으로 제주 4·3으로 인하여 죽은 희생자 수를 2만 5천~3만 명 정도로 잡는데, 정부에 직접 신고된 숫자는 1만 5천 명 가량 됩니다. 가족이 전부 몰살 당해 유족이 존재하지 않거나 고위공직자가 된 사람들은 공개를 꺼려 신고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중 군경토벌대에 의한 희생이 80%이상이며 무장대에 의해 희생된 사람은 10%안팎입니다. 그런데 미군정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죽창을 포함해 무기를 가진 사람은 200명 안팎이었습니다. 이들이 실제 남로당의 이념을 따르고 행동했던 사람들이고, 잠재적 지지자가 1800여 명 있었다고 가정하더라도 나머지 2만 8천 명의 민간인은 왜 죽어야 했을까요?"

치유되지 않은 상처, 아직 멀고 먼 화해의 길

그리고 날이 밝았다. 4월 3일이다. 위령제 참석을 위하여 4·3 평화공원을 찾았다. 위령제에 앞서 일찍 공원에 들어선 순례단은 우선 4·3의 발발 배경과 원인, 진행과정에 이르기까지 매우 큰 규모로 일목요연하게 4·3을 정리해놓은 기념관을 둘러 보았다.

"바다로 둘러싸여 고립된 섬 제주도는 거대한 감옥이자 학살터였다"는 문장이 빨간 글씨로 거대한 현수막에 걸려 있었다. 4·3 민중항쟁의 원인으로 거론되는 3·1절 시위에 대한 경찰의 폭력적인 진압 및 발포사건이 애니메이션으로 반복 상영되고 있어 그 주변에 관람객들이 많이 몰려 있었다. 발포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으며 도민 대다수가 참여했던 총파업 대목에서는 당시 제주도청 공무원의 파업 요구조건이 여섯 항목으로 정리돼 있었다.

'3·1절 발포사건 이후 민주경찰 완전확립을 위하여 무장과 고문을 즉시 폐지할 것, 발포책임자 및 발포경관은 즉시 처벌할 것, 경찰 수뇌부는 인책 사임할 것, 희생자 유가족 및 부상자에 대한 생활을 보장할 것, 3·1사건에 관련한 애국적 인사를 검속치 말 것, 일본 경찰의 유업적 계승활동을 소탕할 것' 모두 정당한 요구조건이었다. 하지만 결국 뭍에서는 서북청년단을 비롯한 토벌대가 몰려오고 4·3 학살의 비극은 시작되고 말았다.

언제나 외세와 육지 사람들로부터 수탈 당하고 차별과 억압을 당해왔던 섬 제주는 어느 곳보다 공동체가 살아있고 평화의 정신이 살아있는 곳이었다. 제주도민은 남과 북이 갈리기를 원하지 않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원하지 않았기에 통일과 자주를 외치며 저항했다. 또 친일경찰들이 해방 이후에도 버젓이 세를 누리며 민중을 억압하고 3·1절 시위에서 무력진압을 해 사람을 죽이고도 사과를 하지 않는 불의에 저항한 것뿐인데 그 대가는 너무나 혹독했던 것이다.

게다가 50년 세월이 흐르도록 역사적으로는 빨갱이로 몰리고 그 가족마저 연좌제의 고통을 당했다. 피해자들은 억울한 피해자이면서도 무조건 빨갱이 취급을 받을까봐 피해 사실조차 입 밖으로 내지 못하며 숨죽여 살아야 했다. 당시의 부상으로 인해 평생을 죽음보다 더한 고통 속에서 살아야 했던 생존자는 "죽여줍서. 아프난. 죽여줍서. 죽여줍서"하며 울부짖었다.

제주 4·3 평화기념관에 걸린 플랭카드.
 제주 4·3 평화기념관에 걸린 플랭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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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28일 개관한 4·3평화기념관 내 다랑쉬굴의 모습을 재현해 놓은 전시물.
 지난 3월 28일 개관한 4·3평화기념관 내 다랑쉬굴의 모습을 재현해 놓은 전시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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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피해자들의 증언. 피해자이면서도 피해 사실을 오히려 숨겨야먄 했던 이들의 아픔을 어찌 다 말로 할 수 있을까.
 4·3 피해자들의 증언. 피해자이면서도 피해 사실을 오히려 숨겨야먄 했던 이들의 아픔을 어찌 다 말로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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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기념관에서도 "이것들 다 빨갱이여"라고 말하는 할아버지 단체관람객들의 목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가슴 아프지만 전쟁과 냉전의 시대를 살아온 그분들을 욕할 수만은 없었다.

2층에서는 강요배의 4·3 역사화 '동백꽃 지다' 전시회가 개관기념 특별전으로 열리고 있었다. 이 전시회는 50점의 4·3 연작으로 전시되었고, 4·3의 전사(前史)로서 고려시대의 외세인 몽골의 침략과 삼별초의 전투, 조선시대 왜구와의 싸움, 이재수난, 일제에 대한 저항의 전통이라는 연장선 속에서 제주 4·3을 그려냈다.

작가가 4·3을 자유와 자주를 바라는 민중의 저항이라는 역사인식 속에서 그림을 그렸음을 알 수 있었는데, 그림만 보고도 4·3의 역사적 과정을 하나의 흐름으로 통찰할 수 있게 해주는 전시였다. 이번 제주도 한일 평화순례단 중 특히 일본측 참가자들은 강요배 화가의 그림에 대단한 관심을 보여, 거의 모든 참가자들이 작가의 화집을 구입하기도 했다.

희생자 위령제를 마치고 헌화를 한 후, 순례단은 전날에 이어 또 다시 제주시청 앞마당으로 향했다. 이곳에서는 하루종일 큰굿 한마당이 열렸다. 초감제, 무혼굿 요왕맞이, 시왕맞이, 차사영맞이 순서로 오후 2시부터 밤 늦게까지 이어진 큰굿 한마당은 죽은 자와 산 자가 만나는 시공간이었다.

특히 일본 참가자들은 이런 굿은 처음 본다면서 큰 관심을 보였다. 큰굿 기획팀은 "땅에 묻히고, 바닷물에 던져지고, 한라산의 바람길에 묻혀 구천을 떠도는 영혼들을 모시고 굿판을 만들어 마지막 울음을 자손과 손목잡고 실컷 우시고, 나비다리 건너 저승에 가 새로운 삶을 사시도록 제주도민 모두 하나 되어 준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굿이 진행되는 중에 굿에 대한 이해가 짧은 젊은 기자들이 너무 가까이 사진기를 들이대자, 진행팀에서는 "영혼을 불러들이는 진지한 굿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것인데 부정탄다"며 젊은 기자를 뒤로 불러서 혼줄 내주는 장면도 볼 수 있었다. 한일평화순례단은 피곤한 일정에도 불구하고 밤늦게까지 굿을 보며, 해원의 뜻을 가슴에 새겼다.

4·3 아직도 미해결 과제 많이 남아

'관광지' 제주가 아닌 흙냄새, 바다냄새, 풀냄새 그윽한 '진짜' 제주룰 느끼기 위해, 평화롭고 느린 길 서귀포'올레'를 걸었다. 이 여정에는 사단법인 제주올레의 회원들도 함께 하며, 한일교류의 시간을 가졌다.
 '관광지' 제주가 아닌 흙냄새, 바다냄새, 풀냄새 그윽한 '진짜' 제주룰 느끼기 위해, 평화롭고 느린 길 서귀포'올레'를 걸었다. 이 여정에는 사단법인 제주올레의 회원들도 함께 하며, 한일교류의 시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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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평화순례단의 기무라 히데토씨도 "국회에서 특별법을 제정해 진상규명과 희생자의 명예회복을 추진했다는 것 자체가 저에게는 한국 민주화운동의 힘으로 다가옵니다. 하지만 아직도 4·3의 원인과 책임, 그리고 4·3의 역사적 성격 규정을 하는 데 있어 많은 논란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면 한국인이 해결하지 못한 미해결 과제가 많은 것 같아요. 시간이 더 걸릴 문제라 생각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앞으로도 제주도와 오키나와의 역사적 진실을 회복하고 화해의 미래로 나가려면 넘어야 할 산이 많은 것 같다.

[특별 인터뷰 1]  "전쟁의 가장 큰 희생자는 가장 약한 어린이들입니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든든한 일꾼, 오가타 타카오씨
“말없이 쓸쓸하던 북촌리 너분숭이의 애기무덤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어린 아이들에게 4·3이라는 끔찍한 사건이 없었다면 그들에게도 미래가 있었을 텐데…. 오키나와 요미탄의 치비치리가마에서 강요된 ‘집단자결’이 일어났을 때도 희생자들 중에 아기와 어린이가 많았습니다. 전쟁과 폭력의 한 가운데서 가장 약한 어린이들이 희생당하는 것은 공통적인 현상인 것 같습니다. 애기무덤을 보면서 삶의 중요함이랄까, 제가 지금 살고 있는 의미를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사회학을 전공한 후, 일본에서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에게 정의를 찾아드리기 위해 헌신적으로 활동을 해온 젊은 활동가 오가타 타카오씨는 자주 한국을 찾는 편이다. 지난해 스톤워크 코리아 2007 일본측 실행위원회에도 참여하여, 일제의 침략전쟁으로 고통받은 한국 피해자들에게 사죄하고 평화의 걸음을 내딛었던 그는 이번 제주도 평화순례에도 함께 했다. 오가타씨는 제주 4·3에 대해서는 이름만 들어봤고 제주도에 일본군의 흔적이 이토록 많은 줄 몰랐는데, 1년 전부터 공부를 하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현장에서 보고 배운 것이 많습니다. 제주도는 오키나와와 닮은 점이 참 많습니다. 아름다운 섬이기 때문에 슬픔도 더욱 크게 다가왔습니다. 태평양 전쟁 말기에 오키나와와 제주도는 모두 일본이 미군과 본토결전을 할 것을 대비해, 어떻게 해서든 미군을 막아보려고 군사요새화한 섬입니다. 그래서 격납고나 동굴 등 똑같은 시설이 많습니다. 또 다른 오키나와를 여기서 보고 있습니다.”

오가타씨는 제주도 4·3 사건이 가슴에 깊이 각인되었다면서, “서울에 있는 전쟁기념관에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4·3사건에 대한 일본어판 영상물을 봤는데 4·3의 희생자 모두를 공산주의자라든가 폭도로 표현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대통령이 직접 제주도를 방문해서 국가의 과거 잘못을 사죄하고 국회에서 진상규명 특별법까지 만들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지만, 진정으로 반성한다면 전쟁기념관의 자료도 바꾸어야 합니다. 또 학생들이 보는 교과서에서도 4·3 사건에 대한 기술이 불충분하다고 들었습니다. 희생자의 유골을 발굴하는 일도 중요하겠지만, 교과서에 올바른 역사를 기술하는 것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과제입니다. 전쟁기념관은 인민군의 잔혹함과 위협만을 강조하고 자국 정부나 군대가 잘못한 것은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거창 양민학살이나 제주 4·3도 동시에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오가타씨는 한일 평화순례의 공식일정이 끝난 뒤에 곧바로 귀국하지 않고, 일주일을 더 머물며 각지에 있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찾아 인사를 하고, 지난 4월 9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수요시위에도 참가하였다. 바람이 매섭던 이날은 국회의원 선거도 있어 오가타씨는 한국의 정치 전망에 대한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오가타씨에게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은 어떤 의미이고, 왜 한국에 올 때마다 수요시위를 찾는지 질문을 던지자 성실한 눈빛의 청년은 진지하게 말을 이어갔다.

“최근 두 달 동안 지돌이 할머니, 문필기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며칠 전에 또 다시 김음전, 여복실 할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좀더 일찍 오고 싶었는데 이제야 와서 할머니들 앞에 향을 피우고 손모아 추모하게 되었습니다”라고 말문을 연 그는 “‘위안부’ 피해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어떤 것을 말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일본 정부가 법률을 만들어서 피해자들에게 공식 사죄하는 것, 교과서도 정정하고 후손에게 올바르게 가르치는 것”을 꼽았다.

“지금 일본은 거꾸로 가고 있습니다. 중학교 교과서에도 예전에는 ‘위안부’ 문제를 싣고 있었지만 지금은 삭제하였습니다. 지난 4월 아베 신조 수상은 “강제연행한 사실은 없다”고 발언해 물의를 빚기도 했습니다. 미국 하원이나 캐나다, 네덜란드, EU, 필리핀, 한국에서는 수년 전부터 일본정부에게 ‘위안부’ 강제 성노예의 책임에 대해 인정하고 사죄, 배상해야 한다는 권고 결의를 했습니다. 역사교과서 문제도 권고결의안에 포함돼있습니다. UN인권위원회와 ILO도 계속해서 권고하고 있습니다. 일본정부의 대답만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언론이 이 문제를 보도하지 않고 있어 일본 사람들은 ‘위안부’ 문제는 이미 시효가 끝난 일이고 다 마무리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시아 국민기금 신청을 받아 다 나눠주었는데 다 끝난 것 아니냐는 식입니다. 그러나 이 기금제도는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는 시책이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할머니들이 거의 신청도 하지 않고 거부했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이 사실을 잘 모릅니다. 한국에 와서 할머니들을 만날 때마다 할머니들이 제게 당부하시는 것도 일본에 돌아가면 일본 젊은이들에게 이 문제를 많이 알려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본정부가 공식적으로 사죄하게 되도록 젊은 세대를 잘 가르쳐야 한다고도 말씀하십니다. 할머니들이 계속 돌아가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오가타씨는 6월 초에 후쿠오카에서 젊은이들과 학생들이 모여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해결을 위해 함께 고민하고 토론하는 1박2일 모임을 갖는다면서, 한국의 젊은이들도 함께 하기를 권했다.


태그:#평화, #한일평화순례, #제주도,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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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모든 아이들이 건강하고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바라는 주부이자, 엄마입니다. 번역가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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