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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장터를 단장하여 테마공원식 저잣거리로 만든 서부영화드라마세트장 안의 청대 성.
 옛 장터를 단장하여 테마공원식 저잣거리로 만든 서부영화드라마세트장 안의 청대 성.
ⓒ 모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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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이 황량하게 펼쳐진 사막과 황무지, 황허를 앞에 두고 뒤에 허란 산맥을 둔 채 웅크리고 있는 거대한 오아시스. 하늘에서 내려다 본 닝샤회족자치구의 수도 인촨의 모습이다.

인촨은 강변 평원을 끼고 세워진 도시다. 허란산맥은 텅거리·울란부 사막에서 몰아치는 모래먼지와 추운 기운을 막아주고 인촨에 푸른 하늘과 온화한 기후를 주었다. 천연의 자연 혜택 속에 인촨은 예부터 '변방지대의 보배'로 불렸다.

닝샤는 북으로 네이멍구 자치구, 동으로 산시성, 남과 서는 간쑤성과 접한 서부 내륙오지에 위치해 있다. 총면적 6만6401㎢인 닝샤는 중국에선 드물게 한국보다 면적이 작다. 닝샤는 인구도 2006년 현재 603.7만 명으로 중국에서 인구가 가장 적은 지역 중 하나다(중국 전체의 0.5%). 국민총생산도 707억 위안(한화 약 9조8560억원)에 불과하고, 1인당 GDP도 1만1784위안(약 165만원)으로 중국 최하위 수준이다.

닝샤는 중국 서부 12개 성·시·구에서도 가장 낙후한 지역으로 꼽히는데, 지금도 계획경제의 잔재가 짙게 남아있다. 닝샤 행정조직의 말단인 촌은 대부분 인민공사의 흔적인 '두이'로 조직되어 있다. 매장량이 풍부한 석탄을 활용한 발전과 야금·기계·방직·제지·식품가공 등 분야의 국유기업 및 농업이 닝샤 경제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대외교역규모는 16억 달러로 중국 전체 수출입의 0.1%, 34개 성·시·구 중 33위를 차지한다.

지역 내 300㎞를 가로질러 흐르는 황허는 닝샤를 낙후하지만 생활의 여유가 있는 축복의 땅으로 만들었다. 넉넉한 황허의 물 덕택에 닝샤는 중국 최대 밀 생산지가 되었고 매년 벼·수수·옥수수 등 풍부한 농산물을 수확한다.

이에 타 지역 중국인들은 '천하 황허가 오직 닝샤만을 풍요롭게 했구나'면서 닝샤를 시샘했다. 중국 내에서 닝샤가 독특한 존재로 자리매김토록 한 것이 하나 더 있다. 바로 닝샤 인구의 42%를 차지하는 소수민족 회족이다.

인촨시 곳곳에서는 이슬람 표식첨탑에 파란 돔형 지붕을 한 이슬람 사원을 쉽게 볼 수 있다.
 인촨시 곳곳에서는 이슬람 표식첨탑에 파란 돔형 지붕을 한 이슬람 사원을 쉽게 볼 수 있다.
ⓒ 모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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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족이 집단 거주하는 거리의 상점은 아랍어와 한자로 간판을 병기했다.
 회족이 집단 거주하는 거리의 상점은 아랍어와 한자로 간판을 병기했다.
ⓒ 모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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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허가 풍요롭게 한 회족과 서하의 땅 닝샤

회족은 중국에서 인구가 많은 소수민족 중 하나다. 2004년 현재 중국 13억 명 인구 가운데 한족을 제외한 55개 소수민족은 1억8600만 명 정도. 좡족이 1617만 명으로 가장 많고 만족은 1068만 명으로 그 뒤를 잇고 있다. 981만 명인 회족은 인구 규모가 세 번째로, 역시 민족자치구를 지니고 분리독립운동이 활발한 위구르인(839만 명)이나 티베트인(541만 명)보다 훨씬 많다.

예부터 회족은 거주 지역은 넓으나 집중된 도시는 없었다. 세계 제국이었던 당나라의 상권은 회족을 중심으로 한 이슬람교도가 쥐고 있었다. 당 수도인 장안을 비롯해 항구 도시들에 모여 산 이슬람 상민은 독립적인 자치를 누리면서 재부를 쌓아갔다.

회족과 이슬람교도에게 재난이 닥쳤으니, 879년 반란을 일으킨 황소는 이슬람 상민을 대량 학살했다. 그 뒤로 중국 조정은 단결력이 강하고 이슬람교를 믿는 회족을 경계했다. 수세기 동안 내려온 차별은 회족에게 자신만의 성시를 갖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됐다.

닝샤자치구 어디를 가든 볼 수 있는 단아한 정형미의 이슬람 사원 칭전스와 더불어 닝샤를 신비롭게 하는 것은 고대제국 서하다. 약 1000여 년 전 중국 서남부 쓰촨에서 살던 탕구트족은 티베트인이 세운 토번제국에 밀려 민족 대이동을 단행했다.

탕구트족은 본래 유목민이었는데, 거친 여정 끝에 허란산맥 아래 풍요의 땅 닝샤에 정착했다. 본래 살던 원주민을 정복한 탕구트족은 1028년 민족 영웅이었던 이원호를 중심으로 세력을 키워 송나라를 상대로 한 전쟁에서 대승한 뒤 제국을 건국했다.

스스로 칭제하고 고유문자인 서하어까지 창제한 이원호 황제는 서하를 송나라와 토번국에 견주는 대제국으로 흥성케 했다. 서하는 1227년 몽골제국의 손에 멸망당하기까지 약 200년 동안 닝샤를 무대로 번영했다. 인촨 시내에서 서쪽으로 40여분 차를 달리면 멀리 허란산을 뒤로 한 서하왕릉이 모습을 드러낸다. 서하왕릉은 '동방의 피라미드'라 불리는데, 장안과 서역을 중계하여 번성했던 서하제국의 흥망성쇠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서하왕릉은 본래 화려한 궁전과 외성·능성·제단 등이 겹겹이 둘러싸인 배치구조였다. 서하를 멸망시킨 몽골은 서하왕릉을 철저히 파괴했다.
 서하왕릉은 본래 화려한 궁전과 외성·능성·제단 등이 겹겹이 둘러싸인 배치구조였다. 서하를 멸망시킨 몽골은 서하왕릉을 철저히 파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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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의 옛 성터를 최고의 영상제작단지로

특이한 인문환경과 역사유적 외에도 인촨에는 중국 영화산업의 역사를 보여주는 현장이 있다. 인촨에서 서북쪽으로 38㎞ 떨어져 있는 서부영화드라마세트장이 그것. 명·청대 국경요충지였던 전베이바오에 자리잡은 서부영화드라마세트장은 중국의 유명 작가 장센량이 개조해 세웠다.

1957년 시 한 편 때문에 우파로 몰려 반혁명죄로 10여 년간 투옥됐던 장센량은 개혁개방 후 복권하여 활발한 작품 활동을 했다. 가장 영향력 있는 20세기 중국서적 100권으로 선정되고 29개국 언어로 번역된 소설 <남자의 반은 여자>는 장셴량의 대표작이다.

자신이 쓴 9편의 소설이 영화로 각색되자, 장센량은 영화산업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장센량은 1993년 인세를 담보로 은행 대부금 50만 위안을 포함해 총 78만 위안(약 1억900만원)의 자본금으로 전베이바오에 영화드라마세트장을 건설했다. 당시 전베이바오는 황량한 사막 위의 옛 성터로 식수와 전기는 물론 도로도 나질 않았었다. 1500년에 세워진 명대 성과 1740년에 건설된 청대 성은 허란산맥 이북에 있는 북방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20세기 들어 고성을 지키던 병사는 떠났고, 전베이바오는 세월의 풍파를 이겨내지 못한 채 잔해만이 남아 있었다. 성곽의 틀이 거의 없는 명대 성 옹성의 구조를 띠고 있다. 보전이 비교적 잘된 청대 성은 높이 10여m, 넓이 5m의 토성으로, 그 안에서는 옛 가옥과 장터가 한눈에 안겨 들어온다. 장센량은 황량하면서도 원시적이고 옛 성벽과 마을의 신비를 간직한 전베이바오의 장점에 주목했다.

1980년대 말 장센량의 소개로 중국 4세대의 대표감독 셰진은 <말몰이꾼>, <노인과 개>를 이 곳에서 찍었고 장이머우는 자신의 데뷔작 <붉은 수수밭>을 전베이바오에서 제작했다.

독특한 자연경관과 역사적 전통이 깃든 전베이바오에 주목한 중국과 홍콩 영화인들은 1990년대에 잇따라 인촨을 찾았다. 베이징·상하이·시안·우시 등에 있는 유명 영화세트와 달리 상상력과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는 제작공간으로 평가 받았기 때문.

쉬커의 <신용문객잔>, 류전위 감독, 저우싱츠 주연의 <대화서유> 등 총 70여 편의 영화와 드라마가 제작되면서 전베이바오는 일약 중국 영상제작단지 중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오늘날 전베이바오는 해마다 수십만 명의 관광객이 찾아 인촨 주민들에게 수많은 일자리를 제공해 주고 지방정부에 막대한 재정수입을 안겨주고 있다. 처량했던 옛 성터가 5000만 위안(약 70억원)의 고정자산과 수억 위안의 무형자산 가치를 보유한 문화 브랜드로 변모한 것이다.

영화 <붉은 수수밭>에서 시집온 궁리(鞏悧)가 마차에서 내려 신혼집으로 들어가던 언덕과 대문. 전베이바오에서 찍은 영화 덕분에 장이머우와 궁리는 세계적인 감독과 배우가 됐다.
 영화 <붉은 수수밭>에서 시집온 궁리(鞏悧)가 마차에서 내려 신혼집으로 들어가던 언덕과 대문. 전베이바오에서 찍은 영화 덕분에 장이머우와 궁리는 세계적인 감독과 배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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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수수밭>에서 장웬(姜文)과 궁리가 살던 신혼집. 왼쪽 사진첩에는 <붉은 수수밭> 감독과 출연 배우의 사진과 사인이 걸려 있다.
 <붉은 수수밭>에서 장웬(姜文)과 궁리가 살던 신혼집. 왼쪽 사진첩에는 <붉은 수수밭> 감독과 출연 배우의 사진과 사인이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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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닝샤의 4대 교역국... "한국인에 대한 호감도 최고"

발상의 전환으로 성공한 전베이바오처럼 닝샤도 경제발전을 위한 기지개를 켜고 있다. 인촨시 정부는 2001년 국무원의 허가를 받아 국가급 인촨경제기술개발구를 건설했다. 중국정부의 서부대개발 전략 추진과 더불어 닝샤 및 인촨 경제개발의 견인차를 마련코자 한 것. 인촨평원 중부에 위치한 경제기술개발구는 총 면적만 7.5㎢에 달하며, 제약·기계전자·정보기술 등을 주도산업으로 육성하고 있다.

인촨시 정부는 지난달 발표한 작년 발전보고서에서 "2006년 현재 개발구에 입주한 기업은 1143개에 달한다"면서 "그 중 외국인 투자기업은 독일·오스트리아·일본·싱가포르 기업을 중심으로 23개"라고 소개했다. 보고서는 "1998년부터 2006년까지 입주기업의 공업생산액과 수출액의 연 증가율은 각각 34%, 63%에 달했다"면서 "친상·경상·중상의 기업친화정책과 다양한 세수우대정책으로 투자 유치에 박차를 기할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닝샤와 한국의 관계도 갈수록 친밀해지고 있다. 2006년 닝샤의 대한국 교역액은 약 1억7400만 달러로 닝샤 전체 무역액의 10.7%에 이르렀고, 한국은 4대 교역국으로 등장했다. 특히 닝샤는 알루미늄괴·탄화규소·섬유·화공 등 1억460만 달러의 제품을 한국에 수출하여, 한국은 일본에 이어 닝샤 2위의 수출시장이 되었다. 기업 투자 분야에서도 삼성물산이 닝샤 서부 마황산 인근 사막지대에서 원유 시추와 생산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인촨에는 20여 명의 한국인이 거주하고 있고 중국인이 경영하는 한국식당도 3곳이나 된다. 식당 '경복궁'을 운영하는 김응세 사장은 "인촨은 메마르지만 맑은 공기와 적당한 바람, 온화한 기온으로 사람 살기 알맞은 환경"이라며 "한류의 영향으로 한국인에 대한 호감도 중국 내에서 가장 높은 편"이라고 말했다.

메마른 사막지대에 점점이 수놓인 오아시스 도시들, 회족 이슬람문화와 신비로운 서하제국의 유적을 간직한 땅, 발상의 전환으로 폐허의 옛 성터에 중국 최고의 영상제작단지를 건설한 곳. 풍부한 지하자원과 특이한 지리인문적 환경을 바탕으로 닝샤가 도약의 날개를 준비하고 있다.

베이징 톈안먼(天安門)을 본뜬 인촨의 남문. 닝샤는 중국 발전의 열차에 시승하기 위해 힘찬 준비를 하고 있다.
 베이징 톈안먼(天安門)을 본뜬 인촨의 남문. 닝샤는 중국 발전의 열차에 시승하기 위해 힘찬 준비를 하고 있다.
ⓒ 모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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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닝샤, #회족, #서하, #붉은 수수밭, #중국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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