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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강과 남한강이 합수되는 두물머리는 이 두 개의 강물이 갈라지는 장소이기도 하다. 양수대교를 건너 북한강을 버리고 남한강 물길로 갈아타며 두 물길이 보여주는 만남과 이별을 생각한다. 남한강 물길 따라 여주 신륵사로 향하는 길이다.

 

남한강을 마주하고 서 있는 절 신륵사(神勒寺). 강가에 자리 잡은 절이라는 지리적 특성이 이 절을 더욱 신비롭게 한다. 그러나, 신륵사는 여느 유서 깊은 사찰처럼 깊은 숲 속에 자리하고 있지 않다. 마을과 인접하여 불성을 전하고 있는 이 절은 강 건너 마을과 연관된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고려 우왕 때, 여주 마암 바위에 용마가 나타나 사람들을 괴롭히는 걸 나옹선사가 신기한 굴레를 가지고 다스렸다 하여 신륵사라 이름지어 졌다 한다. 또 하나의 이름과 관련된 전설은 고려 고종 때, 건너마을에 용마가 나타나 사람들이 겁을 내므로 인당대사가 나서 신력으로 제압하였다고 하여 신륵사라 한다는 것이다. 신륵사에 대한 전설이 이렇게 다른 연대로 나타난 것은 신륵사의 창건 연대가 확실치 않은 까닭이다.

 

신라의 고승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는 설로만 전해질뿐이다. 다만 절 이름과 관련하여 용마가 자주 등장하는 까닭은 신륵사가 강 옆에 지어진 절임을 고려한 탓일 듯 싶다.

 

 

경칩을 보내고 며칠동안 봄이 부쩍 무르익은 느낌이다.  아이들과 함께 신륵사를 찾은 날은 마침 휴일이라 그런지 사람들로 무척이나 붐비고 있었다.  도자기의 고장인 여주 답게 주차장 주변의 상가가 전부 도자기판매장이다. 여타의 관광명소의 상품 판매대에서 으레 팔기 마련인 그렇고 그런 물품 대신 흙으로 빚은 도자기들은 이 고장의 특색을 한마디로 대변해 준다. '여주가 도자기의 고장이었지' 싶어 고개가 끄덕여 진다.

 

도자기에 빼앗긴 눈길을 거두니 눈앞으로 도도하게 흐르는 남한강이 보인다. 강변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가니 머잖아 일주문이다. 싱겁다. 절집으로 가는 산문이라기 보다 여염집 대문을 넘어가는 느낌이다. 일주문을 넘으면 포장길이 정갈하게 쓸어놓은 흙길로 바뀐다. 여염집 대문 같은 일주문도 이쯤 되면 엄숙한 느낌이 없지 않다.

 

입구에서 보면 절의 규모가 그리 커 보이지 않는 신륵사는 안으로 들어갈수록 깊이가 느껴지는 절이다. 절집의 형식이나 구조에 대해 문외한인 내 눈으로 보아도 여러 모로 독특하다. 신륵사의 중앙 전각은 '극락보전'이다. 극락보전 앞에는 수수한 느낌의 다층석탑이 서있다. 게다가 가무잡잡해서 아이 말마따나 '산성비'에 오염된 것 같은 다층탑은 드물게도 대리석으로 만든 탑이란다.

 

눈부시게 하얀색을 띠어야할 대리석탑이 거므스름해 보이는 것은 임진란 때 불탄 흔적이 지금까지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화마를 견디고 천년 가까운 세월을 견디어 냈으니 장하다고 해야겠지만 어쩐지 안타까운 마음이 더 크다. 극락보전 앞에서 잠시 머물다 눈길로 한 번 더 대리석탑을 쓰다듬고 조사당으로 향한다.

 

조사당은 신륵사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이다. 조사당 내부는 기둥이 없고 대신에 우물 정자(井)모양의 통나무가 천정을 지탱해 주는 특이한 구조를 보인다.

 

조사당 안 벽면엔 세분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는데 나옹선사와  무학, 지공대사이다. 나옹선사는 신륵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스님이다. 당시 양주 회암사에 계시던 스님은 절의 신도가 너무 많아 밀양의 영원사로 떠나는 중이었는데 잠시 신륵사에 머물던 중 입적을 하게 된다.

 

조사당은 나옹스님과 그의 제자인 무학과 지공대사를 모신 사당이다. 조사당 앞마당에는 그때 심었다는 600년 묵은 향나무가 서 있다. 조사당 앞마당의 향나무뿐 아니라 곳곳에 오래된 향나무가 있다. 마치 살아서 꿈틀거리듯 몸통이 뒤틀린 향나무가 절 가득 은은한 향기를 뿌리는 느낌이다.

 

나옹선사의 다비식은 신륵사의 오른쪽 강가에 자리한 강월헌에서 거행되었다. 강월헌이라는 정자는 신륵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때 큰 물이 져서 신륵사 마당까지 물이 차 오른 적이 있었는데, 그때 원래 강월헌은 떠내려 갔고 지금 자리하고 있는 것은 다시 지은 정자각이다.

 

새로 지어진 건물이라 고색창연함이 떨어진다면 강월헌 옆, 삼층탑을 눈여겨보면 될 것이다. 나옹선사의 다비식을 기념한 '나옹선사다비기념탑'은 세월의 푸른 이끼와 함께 한쪽 귀퉁이가 깨어져 나간 채 묵묵히 세월을 견디고 있어 인상적이다.

 

나옹선사다비기념탑을 바라보는 가장 좋은 장소는 강월헌을 내려다보고 서 있는 '신륵사 다층전탑'이 서 있는 자리가 될 것이다. 흙으로 구운 벽돌을 쌓은 다층전탑 또한 신륵사에서 볼 수 있는 보기 드문 전탑이다. 이 벽돌탑도 남한강을 굽어보고 있는 자리에 있어 그 풍광이 뛰어나다. 강가에 세워진 정자와 다비탑을 보며 나옹선사의 다비식을 상상해 보았으니 이젠 그를 모신 부도밭으로 갈 차례다.

 

신륵사 중앙 전각인 '극락보전'을 중심에서 보자면 동선이 어지럽게 널린 듯하다. 왜냐면 부도밭은 나옹선사를 모신 사당인 조사당과 다비식이 거행된 강월헌의 중간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신륵사의 중심이자 주변을 가장 넓고 멀리 볼 수 있는 장소에 부도밭이 자리하고 있다. 모르긴 해도 이곳이 명당이지 싶은 부도밭은 전체적으로 아늑한 느낌이다.

 

 

나옹선사 부도와, 부도비, 그리고 석등이 조화롭게 서 있는 부도밭은 작은 규모로도 충분히 보는 이를 압도하는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 무던하면서도 안정적인 구조의 부도와 부도비가 편안한 인상을 주는 반면 비천상과 살아 오를 듯 꿈틀거리는 아기용을 조각한 석등은 무척이나 섬세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시간이 넉넉하다면 오래 머물다 가고 싶은 보기 드문 부도밭이다.

 

다시 나옹선사의 발자취를 따라 신륵사 마당으로 내려선다. 신륵사 은행나무 앞이다. 이 은행나무는 나옹선사가 돌아가시기 전 꽂은 지팡이가 자란 나무란다. 진실의 유무를 떠나 이 오래된 은행나무가 보여주는 세월의 엄숙함은 기려 마땅하다고 본다.

 

남한강의 풍부한 수량 탓인가, 강바람 탓인가, 신륵사의 은행나무는 유난히 건강함을 자랑한다. 두 개의 큰 나무둥치가 든든하게 받치고 있는 은행나무의 건강함이 신륵사를 빛나게 하는 것 같다.

 

신륵사를 한바퀴 돌아보고 여느 객들처럼 강변으로 걸음을 옮긴다. 봄 햇살은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반짝이게 하고 강변의 모래톱을 따뜻하게 만들어 놓았다. 모래를 가지고 장난하는 아이들이나 겨울 끝에 만난 따뜻한 바람에 몸을 맡기는 어른들이나 모두 '봄 소풍' 오기에 딱 좋을 장소다. 한반도 운하건설로 '여주갑문'이 들어설 장소라는 흉흉한 소문이 부디 비켜 가길 바라며 봄 햇살 아래를 걷는다.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이 있어 신륵사는 아름다울 터이다.


태그:#경기도, #여주 , #신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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