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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많이 힘들어?"
"야, 잊어버려. 시간이 지나면 다 괜찮아져."
"너, 살아는 있냐?"

꺼져있던 핸드폰 전원을 이틀 만에 켜니 무려 20통의 문자가 한꺼번에 도착했다. 남자친구와 헤어진 후 나는 소위 '잠수'를 타버렸다. 거의 48시간 동안 나는 집밖에 나가지 않았다. 종일 통곡을 하면서 울었던 탓에, 퉁퉁 부어버린 눈도 문제였지만 서러운 마음에 도저히 움직이고 싶지가 않았다.

대학 4학년생, '취업'에 '사랑'을 양보하다

내가 이별을 생각한 이유는 유치했다. 올해 4학년이 된 나는 인생의 앞길을 개척해 나가는 것이 연애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 앞길의 개척이란 바로 취업이다. '취업'이란 원대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나의 온 신경을 이 '취업'에 집중해야 한다고 느꼈고 예전보다 밋밋해진 내 감정까지 고려해 보니, 헤어지는 것이 옳다는 결론이 나왔다.

결심이 선 후 망설임없이 나는 무성의하게 이별을 통보했다. 상대방 또한 수험생활로 인해 우리 관계를 부담스러워 하고 있었고, 우리는 반년 동안 이어왔던 인연을 단 두 통화의 전화로 끊어 버렸다.

처음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홀가분했다. 계획했던 대로 새벽에 일어나 영어학원도 잘 갔다. 도서관에 가서 열심히 공부도 했다. 딱 3일째까지는 좋았다. 헤어진 지 4일이 되던 아침, 도저히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내가 왜 헤어져야만 했나' 라는 서러운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나는 이 시대가 요구하는 사랑과 성공까지 모두 쟁취하는 '알파걸'은 될 수 없었다.

취업준비자 인구, 4년간 약 60% 증가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 취업준비자수는 4년간 58.3%가 증가했다.
1년 후 나 또한 이 취업준비자가 되어 있지 않을까?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 취업준비자수는 4년간 58.3%가 증가했다. 1년 후 나 또한 이 취업준비자가 되어 있지 않을까?
ⓒ 정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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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취업준비자 수가 2007년 54만6천명에 이른다고 한다. 취업을 준비한다는 것은 아직 직장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 돌려 이야기해서 취업준비자이지만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백수'이다.

기업체 입사를 준비하거나 공무원 시험을 공부하는 등 여러 가지 취업 준비를 한다고 하지만 이들은 실제 경제활동인구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결국 취업준비자가 늘었다는 것은 실업자가 늘었다는 말이다. 여기서 아예 취업할 의사가 없는 것은 개인의 의지이기 때문에 크게 사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취업을 하고는 싶으나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진다는 데에 있다. 

이와 같은 현실을 생각해 보면 1년 후 나도 '취업준비자'가 되어 있지 않을까란 생각에 불안하기만 하다. 그래서 지금 나는 '취업준비생'에 포함될까봐 전전긍긍하며 4학년을 보내고 있고, 결국 남자친구와 헤어져야 한다는 엉뚱한 결론에까지 이르고만 것이다.

고3 '대학만 가면…', 대학 4학년 '취업만 하면…'

"이젠 4학년이니 많이 힘들겠다.'

처음 만나는 사람마다 모두 나에게 '취업 준비하는 거 힘들지?'라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이야기한다. 4학년이 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는데 압박이 벌써부터 느껴진다. 주위의 극성스러운 걱정과 열심히 구직 준비를 하고 있는 친구들을 보면 마냥 쉬고 있는 게 죄인같고 속된 말로 '막장 4학년'이 되어버린 것 같아 불안하기만 하다.

"이젠 공무원 수도 줄인다는데, 뭐 하려고?"

새로 들어선 정부는 수많은 대학생과 직장인들이 매달리고 있는 공무원 채용마저 대폭 줄인다고 한다. 이미 내 주변에 '공시생'(공무원 시험준비생)만 해도 10명이 넘는다. 그들은 이번 해가 공무원이 될 수 있는 '막차'라며 도서관에 박혀 공부에 몰두하고 있다.

"취업이 힘들면 대학원 가보는 건 어때?"

언제부터인가 '대학원 진학 = 미취업'이란 등식이 섰다. 학문을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취업 시기를 뒤로 늦추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한다는 편견 때문에 선뜻 결정을 내리기가 망설여진다. 더불어 학교 등록금도 만만치 않은데 대학원 진학으로 또 한번 부모님께 손을 벌리기는 더 내키지 않는다. '사회'라는 소용돌이가 무서워 '대학원'으로 도망친다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4학년들의 고민은 깊어져만 간다.

"공부만 잘하면 다 좋은 곳으로 취업하더라."

부모님은 아직도 도서관에 앉아 책만 파면 절로 좋은 곳으로 취업이 되는 줄 아는 듯하다.
결론적으로 취업에 대한 부담과 고민은 나의 능력부족이 원인이란 생각도 든다. 그러나 '내가 못난 탓이다'라고 치부해버리기에는 뭔가 이상하고 억울하다.

나는 한시도 쉬지 않고 달려왔고 뒤쳐지지 않기 위해 노력해왔다. 고3 수험생 시절, 어른들과 선생님들은 대학만 가면 고생은 모두 끝이라고 했다. '대학만 가면'이란 말로 자고 싶은 본성과 쉬고 싶은 여유, 즐기고 싶은 마음을 위로했다.

막상 대학 입학 후 3년이 지난 지금 '대학만 가면'은 이제 '취업만 하면'이라는 말로 바뀌었다. '취업이 우선이다'라는 생각에 '사랑할 여유'까지 포기해버린 나는 다시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버린 것 같아 한심스럽다.

취업준비를 위해 고시학원이나 취업학원에 다니는 사람이 지난해 2월보다 3만5천명이 증가했다.
▲ 노량진에 위치한 고시학원에 붙어있는 선전물. 취업준비를 위해 고시학원이나 취업학원에 다니는 사람이 지난해 2월보다 3만5천명이 증가했다.
ⓒ 정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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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4학년, 결국 연애는 사치?

"왠지 지금 연애질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란 생각이 들어."

나와 비슷한 시기에 이별을 경험한 친구가 말했다. 내 주변에는 만능척척박사 '알파걸'이 없어서일까. 줄줄이 친구들이 남자친구와 이별을 경험하고 있다.

예비 '취업준비생'인 4학년이나 졸업장을 손에 쥔 졸업생들은 뭐라도 배워야 한다는 생각에 너나 할 것 없이 각종 학원으로 향하고 있다. 로스쿨 준비학원을 다니기도 하고 승무원 양성학원에 가기도 하고 하다못해 무슨 '스터디' 모임이라도 만들어서 취업 준비를 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남자친구와 헤어졌다고 울며불며 공부를 손에 놓아 버린 나는 '사치'를 부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모든 대학 4학년생들이 겪는 이별의 원인이 취업은 아니다. 개인 상황에 따라 천만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고 오히려 둘러대기 좋은 핑계일지 모른다. 중요한 것은 '나 취업 준비 해야 해'라는 이 말 한마디가 상대방에게 이별을 수긍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노량진 육교 위에서 바라본 학원가 풍경
얼마나 많은 청춘들이 이 곳에서 막연한 '미래'를 준비하고 있을까?
 노량진 육교 위에서 바라본 학원가 풍경 얼마나 많은 청춘들이 이 곳에서 막연한 '미래'를 준비하고 있을까?
ⓒ 정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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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기타 소리'가 사라진 봄날의 캠퍼스

"우리 대학 다닐 때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4년 전 졸업한 98학번 동아리 선배가 입학하자마자 토익 점수와 취업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08학번들을 보고 말했다.

"캠퍼스 추억을 만드는 것도 좋지만, 공부가 먼저죠."
"요즘 같은 시대에 1학년이라고 손놓고 있으면 안 되요."

동아리에서 만난 08학번 신입생의 말이다.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무한경쟁의 시대에 혼자 어물거리다가는 금방 뒤쳐진다. 남들은 저 멀리 앞서 나가고 있는데, 나만 추억이니, 낭만이니, 로맨스를 논하고 있기에는 현실이 너무 가혹하다. 캠퍼스에는 어김없이 '토익 강좌', '컴퓨터 자격증 수업' ,'취업 스터디' 등의 플래카드가 동아리 홍보물 앞으로 나부끼고 있다.

이젠 그 누구도 선뜻 대학을 '학문을 탐구하기 위해 간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 사회에서 제대로 발 붙이려고 살려면 대학은 필요하다란 생각에 가는 직진 코스일 뿐, 직업준비는 학원이 도맡아 하고 있다.

노량진의 한 공무원학원 관계자는 "요즘은 2학년 마치고 지방에서도 많이 올라와 공무원 수험생활을 준비한다"며 "4학년은 오히려 조금 늦은 감이 있다"고 한다.

언제부터 대학가에 낭만이 사라졌을까? 1990년대처럼 통기타 들고 벗꽃 휘날리는 교정에 앉아 노래를 부르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다만 10대 시절 배우지 못한 '자아정체성'에 대한 탐구와 자신의 인생을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는 여유, 순수하게 학문에 파묻힐 수 있는 열정이 숨쉬기를 바란다. 

올 봄에는 캠퍼스에도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왔으면 좋겠다.


태그:#취업, #알파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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