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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에서 바라본 백마산성. 뒤쪽에 희미하게 보는 것이 의주 삼각산이다.
▲ 백마산성. 압록강에서 바라본 백마산성. 뒤쪽에 희미하게 보는 것이 의주 삼각산이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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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을 미끄러지는 뱃전에 물결이 부딪쳤다. 부서지는 물결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흐느끼는 여인이 있었다. 연실이었다. 그녀의 흐느낌은 색깔이 달랐다. 포로로 끌려가는 대다수의 여인들은 다시 돌아올 것을 갈망하며 눈물지었지만 그녀는 멀어지는 조국강산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내 다시 조국에 돌아오지 않으리라.”

그녀의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고개를 들었다. 창백한 얼굴이었다. 백마산성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머니의 품처럼 포근한 모습이 가슴에 와 닿았다. 청군에게 끌려가던 자신의 손목을 붙잡고 목 놓아 울부짖던 어머니가 보고 싶다. 멎었던 눈물샘이 다시 터졌다. 흐르는 눈물사이로 보이는 백마산이 자신이 태어난 인왕산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 어릴 때 뛰어놀던 고향집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한성의 조산(祖山)이 삼각산이라면 주산(主山)은 백악산이다. 좌청룡 낙산과 우백호 인왕이 감싸고 있는 한성은 천하의 명당이다. 이러한 명당 중에 명당으로 꼽히는 곳이 있었으니 인왕산 아래 동네다. 인왕산은 조선 건국 초, 무학대사가 정궁 터로 강력히 추천했으나 정도전의 백악 주산론에 밀려 법궁이 들어서지 못했던 곳이다.

경희궁에서 바라본 인왕산
▲ 인왕산. 경희궁에서 바라본 인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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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에 해가 뜨면 제일 먼저 햇빛을 받는 이곳은 아무나 들어가서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선택된 사람들만이 끼리끼리 뭉쳐 사는 동네였다. 과거에 급제하고 입신출세하여 들어갔다 하더라도 관직을 잃거나 정변에 휩쓸리어 몰락하면 소리 소문 없이 나와야 하는 동네다.

적자(嫡子)가 아니라는 약점을 안고 등극한 광해는 늘 왕좌(王座) 불안에 시달렸다. 형 임해군을 진도에서 사사시키고 여덟 살 어린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정배 보내 강화부사 정항으로 하여금 참혹하게 죽이도록 한 그는 인왕동 소세양의 집터에 왕기가 서린다 하여 청심당(淸心堂)을 헐어버리고 이궁(離宮) 건립을 착공했다. 인경궁이다.

허나 궁터만 닦아놓고 공사를 중단했다. 당시 광해는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창덕궁과 창경궁 중건 공사를 벌려놓고 있었다. 정궁 공사 때문에 버거웠는지 왕기를 말살하기 위한 술책이었는지 알 수 없다.

왕위에 불안감을 느낀 광해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정원군의 집터에 왕기가 있다는 당대의 술사 김일룡의 참설(讖說)에 따라 정원군의 집과 주변 수천채의 민가를 헐어내고 새문동(塞門洞)에 궁궐을 지었다. 경덕궁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붙였지만 백성들은 셋째 궁궐이라고 비아냥거렸다. 오늘날의 경희궁이다. 광해는 이 궁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쫓겨났다.

경기도 남양주에 있다.
▲ 광해군 묘. 경기도 남양주에 있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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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군의 아들이 등극하여 인조가 되었으니 술사의 도참이 터무니없는 것만도 아닌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중종의 후궁 창빈안씨 소생으로 태어난 덕흥군 이초가 이곳에서 별 볼일 없이 살아가다 셋째아들을 낳았다. 왕위 계승과는 한참 멀었다. 명종이 후사 없이 죽자 그 아들이 어느 날 갑자기 왕이 되어 창덕궁으로 들어갔으니 왕기가 있긴 있나보다.

인왕산에 걸쳐있던 해가 사라지고 인달방에 땅거미가 내려앉자 도성의 선비들이 하나 둘씩 윤 대감 댁으로 모여들었다. 한양 선비들의 세계에도 두 패가 있었다. 권세파와 풍류파다. 양지를 쫓고 권력지향적인 자들은 장동으로 몰려들었고 시와 그림을 즐기는 풍류객들은 인달방을 찾았다.

일찍이 출사하여 입신양명한 윤대감집은 풍치가 그만이었다. 도성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위치에 자리 잡은 그의 집은 낙산을 마주보며 왼쪽에 백악이 손에 잡힐 듯 했고 목멱산이 시야에 들어왔다. 바로 이웃에 백사 이항복이 한음 이덕형과 교유했던 필운대가 있고 인왕산에서 흘러내린 개울물이 사랑채 바로 앞에서 바위를 타고 작은 폭포를 이루고 있었다. 한 폭의 진경 산수화였다.

이항복의 집터에 있다. 필운은 백사와 함께 이항복의 호다. 현재는 배화여대 구내에 있다.
▲ 필운대. 이항복의 집터에 있다. 필운은 백사와 함께 이항복의 호다. 현재는 배화여대 구내에 있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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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대감 막내 여식이 올해 몇이오?”
“열두 살 이외다. 왜 그러시오? 좋은 혼사라도 있소?”

“아니, 윤대감이 모르고 있었단 말이오? 궐에서 곧 간택이 있을 것이라 하는데 여식을 한 번 내보내 보시지요.”

정묘호란으로 강화도에 몽진했다 환궁한 인조는 국본(國本)을 염려했다. 군부와 세자 그리고 원손. 이렇게 혈맥으로 단단히 묶여 있으면 어떠한 환란이 닥쳐도 걱정이 없을 것 같았다. 세자 나이 열세 살. 어서 세자빈을 맞아들여 원손을 보고 싶었다. 인조는 서두르고 있었다.

“당치않은 말씀을, 저희 여식은 아직 어리고 배운 것이 미천하여 어림없습니다. 그리고 그게 어떤 자리인데 내보내고 싶다고 내보낼 수 있습니까?”

“인물이 곱던데… 한 번 밀어 볼까요?”
“아서요, 아서. 언감생심 꿈도 꾸지 말아야지요.”
손사래를 쳤지만 윤대감은 내심 싫지 않은 기색이었다.

“아닙니다. 소인이 한 번 밀어보겠습니다.”
“어림없다니까요. 하하하.”

사랑채에서 흘러나온 소리를 엿들은 연실이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붉어졌다. 두근거리는 가슴은 참새 심장처럼 콩닥거렸다. 숨이 가빠오며 입술이 타들어갔다.

“왕자님이라고 하셨지? 잘 생겼을까? 못생겼을까?”

연실이는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밤하늘에 떠있는 무수히 많은 별을 헤이며 왕자별을 찾았다. 별 속에서도 백마를 탄 왕자님을 찾아 헤맸다. 연실이가 하얗게 밤을 새운 이튿날 아침.

“이리 오너라.”

인왕산 아래 순화방에 자리 잡은 강 승지 집에 호령소리가 들렸다. 임금을 모시고 있는 승지 집을 찾아와 큰 소리 칠 수 있는 사람은 조선 팔도에 그리 많지 않다. 화들짝 놀란 하인이 짚신을 잘잘 끌며 빼꼼한 대문 사이로 물었다.

“뉘신데 이른 아침부터 영감 댁에 와서 큰 소리 치시우?”
“장동 김 대감이라고 일러라.”

하인의 전갈을 받은 강석기가 버선발로 뛰어나왔다. 김 대감이 누구인가? 집권 서인세력을 이끄는 좌장이 아닌가? 비록 학맥은 달라도 조선의 사대부들이 머리를 조아리는 위인이 아닌가? 강석기는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꾸지람 들을 일은 없는 것 같은데 무슨 호통이 떨어질지 겁이 덜컥 났다.


태그:#인왕산, #경희궁, #필운대, #인경궁, #광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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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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