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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사극 <왕과 나>에서 주인공 김처선은 매우 충직한 내시의 이미지를 띠고 있다. 중전 윤씨에게 지극정성을 다할 뿐만 아니라, 성종 임금 대신 칼을 맞고 쓰러질 정도로 그는 온 마음을 다해 충성을 바치고 있다.

 

드라마 상에서 그가 저지른 부정행위라면 동료 내시인 최자치의 ‘부적절한 관계’를 은폐해주는 정도에 불과하다. 그 일 때문에 양심상 가책을 느껴 사직서를 제출하려고 할 정도로, 드라마 상의 김처선은 매우 성실하고 정직한 인물이다.

 

하지만 실제의 김처선(?~1505년)은 이와 좀 달랐던 모양이다. 세종 재위기(1418~1450년)부터 연산군 11년(1505)까지 무려 7명의 군주를 모시는 동안 그가 이따금씩 말썽을 일으킨 기록이 실록에 자주 등장한다.

 

김처선이 정확히 세종 몇 년부터 궁궐에 들어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세종 말년에 들어갔다고 가정해도 연산군 11년까지면 최소한 5, 60년은 내시 생활을 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매우 오랫동안 ‘궁궐 밥’을 먹은 셈이다. 그 기간 동안에 그가 말썽을 일으킨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다만, 성종 시기에는 별다른 말썽을 일으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왕실로부터도 꽤 인정을 받았다. 드라마 <왕과 나>에서처럼 중전 윤씨를 사모해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무튼 성종 시기만큼은 김처선이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어쩌면, 문제를 많이 일으켰는데도 왕실에서 그냥 덮어주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김처선 때문에 특히 골머리를 앓은 사람은 그 누구보다도 수양대군 즉 세조라고 할 수 있다. 연산군도 김처선을 불쾌하게 생각하긴 했지만, 세조의 경우에는 감정의 차원이 좀 달랐던 것 같다. 세조는 툭 하면 말썽을 일으키는 김처선 때문에 상당히 골머리를 앓았지만, 그러면서도 그를 내치지는 못했다.

 

세조 치하에서 김처선이 말썽을 많이 일으키고도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세조 6년(1460) 5월 25일에 3등 공신의 반열에 오른 일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세조실록>이 전하고 있는 내시 김처선의 비행 몇 가지는 다음과 같다.

 

▲ 눈비가 내린다고 임금을 제대로 시종(侍從)하지 않다.

 

세조 6년 10월에 세조 임금의 어가가 순안현이란 곳을 방문했다. 그런데 그날 눈비가 크게 내렸다. 그 때문인지 김처선을 포함한 몇몇 측근들이 임금을 제대로 호위하지 않았다. 이미 오래 전부터 내시생활을 해온 데다가 몇 개월 전에 공신 반열에까지 오른 김처선의 긴장이 약간 이완되었던 모양이다.

 

이에 화가 난 세조는 초저녁에 어가가 순안현에 당도하자 내시 김처선 등을 불러 곤장 80대의 형벌을 가했다. 곤장 80대면 꽤 무거운 형벌이다. 그 외의 일반 관료들 중에는 곤장을 피하는 대신 의금부의 국문을 받은 사람들도 있었다.

 

▲ 임금이 행차하는데 나가보지도 않다.

 

세조 10년(1464) 6월 27일에 세조가 화위당(華韡堂)이란 곳에 행차했다. 그런데 김처선을 포함한 몇몇 내시가 미처 시종(侍從)을 하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임금의 스케줄을 사전에 확인하지 못하고 그 시각에 ‘깜빡’한 모양이다. 이 때문에 임금의 분노를 자초한 이들은 모두 다 곤장 세례를 받았다.

▲ ‘왕의 여자’를 데리고 술 마시다가 길 한가운데에 드러눕다.

 

세조 11년(1465) 9월 3일이었다. 세조가 승지(비서관)를 급히 불렀다. “환관 김처선이 시녀(궁녀)를 데리고 가다가 술에 취해 길 한가운데에 누워 있다는데, 이것이 어찌 된 일이냐?”며 “어서 가서 알아보라”는 것이었다.

 

내시가 왕의 여자인 궁녀를 데리고 술 마시다가 길 한가운데에 드러누웠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왕으로서도 기가 막히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마 궁녀와 함께 출장을 가던 중에 ‘한잔’ 마신 듯하다.

 

승지 이영은·오응이 김처선에게 가서 일의 연유를 따져 물었다. “처음엔 주방(술을 맡은 내시부의 분과)에 가서 한잔 했고, 다음에 부대 막사에 가서 또 한잔 했습니다.”

 

직무 중에 술을 두 군데에서나 마시고 그것도 모자라 길 한가운데에 드러누워 왕궁의 체통을 깎아내린 김처선에 대해 세조는 “그를 단단히 가두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와 같은 몇 가지 사례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세조 시기의 공신인 김처선은 상당히 ‘군기’ 빠진 내시였다. 눈비가 내린다고 왕의 호위를 게을리하고, 왕이 행차하는데 아예 나가보지도 않고, 궁녀를 데리고 출장을 가다가 술을 마시고 대로에 드러눕기까지 하는 정도였다.

 

실록에 기록되지 않은 소소한 사건들도 있었을 것임을 감안한다면, 세조 임금이 김처선 때문에 얼마나 골머리를 앓았을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공신이라고 ‘뻐기면서’ 말년병장 행세를 하는 그를, ‘주임상사’도 차마 어떻게 하기는 힘들었던 모양이다.

 

위에 언급한 몇몇 사례만으로 김처선의 품성을 단정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김처선이 드라마에서처럼 그리 성실한 사람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어찌 보면, 그는 상당히 자유분방한 성격의 소유자였는지도 모른다.

 

‘지가 왕이라고 설마 나를 어떻게 하겠어? 내가 그래도 공신인데!’

 

그런 두둑한 배짱으로 대낮에도 궁궐 어디선가 낮잠을 자거나 술을 마시고 있는 김처선의 모습이 떠오른다. 부대 전체가 행군 준비를 하고 있는데 내무반 어디에선가 만화책으로 얼굴을 가린 채 코를 골고 있는 말년 병장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태그:#왕과 나, #김처선, #내시, #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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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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