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16세기 벽두부터 후반까지 벌어진 세 건의 사건. 홍길동의 반정부 저항활동, 조광조의 도학(道學)정치적 개혁운동, 풍신수길의 임진왜란 도발.

이 세 가지 사건은 조선의 체제 모순이 심화되던 16세기에 조선왕조를 상대로 벌인 도전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다. 건국 100년이 지난 16세기부터 조선사회는 신분제 고착 등으로 인한 내적 모순을 겪게 되었고, 도전세력들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조선왕조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건국 100년 지난 조선왕조에 내민 도전장

세 가지 사건의 차이점이라면, 홍길동은 조선의 변혁을, 조광조는 조선의 개혁을, 풍신수길은 조선의 해체를 목표로 했다는 점일 것이다. 또 다른 중대한 차이점이 있다면, 홍길동은 아래(민중)로부터의 도전이고, 조광조는 위(지배층)로부터의 도전이며, 풍신수길은 옆(외세)으로부터의 도전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세 가지 사건이 일정한 상호 관련성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상호 관련성이 있다고 한 것은, 조선왕조가 홍길동이나 조광조의 도전을 자기성찰의 기회로 승화시켰다면, 훗날 풍신수길이 조선을 넘볼 가능성이 현저하게 줄어들었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전기 조선의 후반부였던 16세기에 조선왕조는 일련의 정치적 도전에 직면했다. 홍길동으로 대표되는 반정부 세력의 ‘아래로부터의 도전’과 조광조로 대표되는 유림세력의 ‘위로부터의 도전’에 직면한 것. 이 외에도 조선왕조는 숱한 내부 도전에 직면했지만, 여기서는 논의의 편의상 홍길동과 조광조의 사례만 든다.

16세기에 발생한 이러한 내부 도전들은 결국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특히 조광조 개혁운동의 경우, 조선왕조는 도전세력인 유림들을 제도권 안으로 편입시키는 대신 그들을 체제순응 세력으로 탈바꿈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이로 인해 개혁의 이상이 결국 좌절되었다는 점에서 조광조가 일으킨 ‘위로부터의 도전’은 결국 실패한 셈이다.

이처럼 내부 도전들을 혹은 진압(홍길동의 경우)하고 혹은 무마(조광조의 경우)하는 과정에서 조선은 좀 더 강도 높게 스스로 성찰할 기회를 상실하고 말았다. 도전세력을 와해시키는 데에만 급급했던 조선왕조는 그것을 자기발전의 기회로 활용하지 못했다.

현대 한국이 성수대교·삼풍백화점 사고를 겪고도 숭례문 사고를 또 겪고 있는 것처럼, 16세기 조선은 과거의 아픔으로부터 미래의 교훈을 도출하는 데에 실패하고 말았다.

자기 성찰 기회 놓친 왕조

그 같은 조선왕조의 ‘어리석음’은 결국 더 큰 문제를 야기하고 말았다. 컴퓨터에 문제가 생길 때 그 원인을 진단하기보다는 일단 전원 스위치부터 눌러 재부팅으로 상황을 피해가는 데에 익숙한 사람들이 있다. 그런 경우에 당분간은 컴퓨터를 그대로 사용할 수 있지만, 그런 일이 계속 누적되면 언젠가는 컴퓨터에 더 큰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컴퓨터’의 문제점을 근본적으로 시정하지 않고 ‘재부팅’만으로 상황을 모면하던 조선왕조는 결국 훨씬 더 큰 도전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홍길동이나 조광조와는 차원이 다른 풍신수길의 도전 즉 ‘옆으로부터의 도전’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홍길동이나 조광조는 그래도 이 땅에 애착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런 애착이 있을 리 없는 풍신수길은 터미네이터보다도 더 무서운 존재였다. 그는 인정사정 가리지 않고 조선왕조에 총과 칼을 들이댔다. 

이녹(성유리 분)과 마주치는 쾌도 홍길동
 이녹(성유리 분)과 마주치는 쾌도 홍길동
ⓒ kbs

관련사진보기



평소 ‘컴퓨터’가 잘 안 돌아가면 전원 스위치밖에 누를 줄 몰랐던 조선왕조는 다급한 마음에 수리점(명나라)의 ‘출장 서비스’를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조선은 일정 부분은 명나라 덕분에 일본의 도전을 물리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홍길동·조광조 세력이 가하는 내부 도전을 자기변신의 기회로 활용하지 못한 조선은 결국 풍신수길이 이끄는 16만 대군 때문에 무려 7년이나 혹독한 수난을 당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내부세력으로 인한 수난으로부터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하는 왕조는 외부세력으로부터 더 큰 수난을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처음에 한두 번 오류 메시지가 뜰 때 스스로 컴퓨터를 진단했더라면 상황이 현저히 달라졌을 텐데, 그저 정권유지에만 급급했던 조선왕조는 결과적으로 더 큰 화를 자초하고 만 것이다. ‘왕조의 변신은 유죄’라고 생각한 조선왕조가 자초한 재앙이다. 

그런데 그렇게 대책 없는 조선이 결국 회생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일까? 첫 번째 요인은 맨주먹으로라도 조선을 지키고자 한 조선 민중의 염원이고, 두 번째 요인은 조선과 순망치한(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의 관계에 있던 명나라의 지원이고, 세 번째 요인은 인조가 결국에는 새로운 최강 청나라와 손을 잡았다는 것이다.

동아시아 차원에서 대대적인 왕조교체가 일어난 17세기 초반의 대(大)변화기에 조선왕조가 연명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위와 같은 요인들 덕분이었다. 조선왕조가 임진왜란이나 그 직후에 멸망하지 않고 3백년을 더 버틴 것은 그야말로 천운이라고밖에 평가할 수 없을 것이다.

왜란 후 멸망하지 않은 것은 '천운'

이 대목에서 이런 의문이 들 수도 있다. 전기에 발생한 홍길동-조광조-풍신수길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정권을 유지한 조선왕조가 구한말에 가서는 결국 멸망한 이유는 무엇일까?

16세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구한말에도 조선왕조는 아래로부터(홍경래·전봉준 등), 위로부터(김옥균 등), 옆으로부터(청나라·일본)의 도전에 직면했다. 유사한 상황에 직면했음에도 불구하고 전기 조선은 살아남고 후기 조선은 결국 멸망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원인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첫째, 16세기에는 일련의 도전이 상당한 시간차를 두고 발생한 데에 반해, 19세기에는 거의 모든 도전이 후반부에 몰리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래서 16세기에는 다음 도전에 대처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진 데 반해, 19세기에는 그렇게 할 여유가 없었다.

둘째, 16세기에는 조선을 지탱해줄 강력한 외국(명나라)이 있었지만, 19세기에는 동아시아 전체가 서세동점의 소용돌이에 휘말렸기 때문에 조선을 도와줄 만한 나라가 없었다. 게다가 16세기의 명나라는 조선을 도왔지만, 19세기의 청나라는 한때(1882~1893년) 조선을 삼키려고까지 했다.

셋째, 16세기에는 정치 변혁 속에서도 조선 민중의 역량이 그대로 보존된 데에 반해, 19세기에는 동학세력 탄압과정에서 그런 역량마저 완전히 분쇄되고 말았다. 16세기의 의병운동은 성공한 데 반해, 20세기 초반의 의병운동은 실패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데에서 잘 드러나는 바와 같이, 홍길동의 반정부 활동은 모순이 심화되던 전기 조선왕조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도전’이라는 성격을 띠는 것이었다. 그것은 16세기 후반~17세기 초반에 대대적으로 발생한 동아시아 대변혁을 예고하는 전조(前兆) 중의 하나였다고 평가해도 결코 무리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런 류(類)의 도전을 진압하는 데에만 치중했을 뿐 그로부터 별다른 교훈을 얻지 못한 조선왕조는 결국 조광조 세력으로 대표되는 ‘위로부터의 도전’에 직면하고 말았다. 위로부터의 도전을 통해서도 별다른 교훈을 얻지 못한 조선왕조는 결국 풍신수길의 일본군에게 강펀치를 맞고 말았다.

아래와 위에서 가하는 펀치를 맞고도 살아남은 조선. 조선은 그래서 방심했다. 그러다가 결국 일본으로부터 옆구리를 크게 얻어맞고 7년간 휘청거린 것이다.

홍길동은 단순 의적이 아닌 정치세력

전기 조선의 후반부에 발생한, 홍길동 세력 그리고 그와 유사한 또 다른 민중세력의 정치적 봉기는 위와 같은 각도에서 역사적으로 재조명될 필요가 있다. 모순이 심화되는 조선왕조에 대한 정치적 도전, 16세기 후반~17세기 초반 동아시아 대변혁의 전조라는 각도로 재조명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픽션 작가인 허균의 영향을 받은 이 땅의 작가들은 홍길동을 그저 의적 수준으로만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의적도 나쁜 것은 아니지만, 의적보다도 더 큰 뜻을 품은 사람들을 그렇게 표현하는 것은 어찌 보면 모독일 수도 있는 것이다.

혁명의 뜻을 품고 궐기한 전봉준을 의적으로 묘사하는 드라마가 나온다면, 그것이 얼마나 엉뚱한 일인가는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에서는 홍길동과 관련하여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 모든 게 허균 때문이기는 하지만, 이제라도 혹은 앞으로라도 홍길동 세력의 정치적 성격을 올바로 규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결코 홍길동의 위상을 재평가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정치권력이 아래로부터의 목소리를 수용하지 못하고 정권 유지에만 급급할 경우에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홍길동의 저항운동으로부터 도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태그:#쾌도 홍길동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