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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찰 때에는 역시 윤상이다. 그의 음반은 모두 훌륭하지만 내가 특히 좋아하는 음반은 <이사>라는 음반이다. 그 음반의 마지막에 들어 있는 곡이 'Ni Volas Interparoli'라는 곡이다. Ni Volas Interparoli. 에스페란토어로 ‘우리는 모두 소통을 원한다’라는 뜻이다.
 
만국의 인민들이 자유로이 소통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만들어진 에스페란토어. 애초에 서양의 언어들만을 혼합해 놓았다는 한계를 갖지만, 어쨌거나 만국 공통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음에도 실제로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대신 만국 공통어의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언어는 우리 시대의 제국, 미국의 언어인 영어다.
 
하지만 영어가 만국의 인민들의 합의를 통해 만국 공통어로 결정된 것은 아니다. 영어가 만국 공통어처럼 쓰이기까지는 미국 자본의 힘, 특히 컴퓨터와 인터넷 자본 그리고 음악과 영화 자본의 힘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따라서 윤상이 우리는 모두 소통을 원한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 영어로 대변되는 언어 제국주의에 대항하고 언어 불평등을 해소하려고 하는 평화주의 언어인 에스페란토어를 사용한 것은 무척이나 적절해 보인다.

 

아무튼, 우리는 모두 소통을 원한다. 그렇기 때문에 집에서도 직장에서도 버스 안에서도 쉴 새 없이 휴대전화로 통화를 하거나 문자를 보내는 것일 게다. 흔히 휴대전화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 세대는 20~30대라고 하지만 요즘은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바야흐로 모든 인민이 휴대전화 없이는 살아가기 힘든 시대가 된 것이다.

 

어린이들 역시 예외가 될 수는 없다. 그들도 휴대전화를 통하여 끊임없이 제 친구들과, 또는 제 식구들과 소통한다. 소통에 대한 목마름을 느끼는 것은, 또는 소통이 원활하지 못할 때 아파하는 것은 어른들이나 어린이들이나 마찬가지이다. <좋은 엄마 학원>(김녹두, 문학동네어린이, 2004)은 어린이들이 소통에 관하여 겪는 문제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좌파가 특이한 사람이 되어버린 시대에 계급을 말하는 것은 마치 현실 감각이 떨어지는 것처럼 여겨지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지만, 계급은 엄연히 존재한다. 오히려 실재하는 계급의 존재를 애써 부정하려고 하는 태도야말로 지극히 현실 감각이 떨어지는 태도이며, 애써 현실을 부정하려는 너절한 발악에 지나지 않는다.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인 어린이들의 사회에도, 그들이 계급이라는 개념을 인지하고 있든지 또는 그렇지 않든지에 관계없이, 이미 계급은 엄연히 존재한다. <눈사람 카드>에서 공주 같은 미나는 하녀 같은 명숙이가 자신과는 다른 계급의 존재라고 생각한다. 미나는 자신과 생활방식이 다르고 사고방식도 다른 명숙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공주 같은 미나는 외톨이다. 그 까닭이 다름 아닌 자신의 공주 같음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미나는 의도적으로 명숙이와 친한 듯한 모습을 다른 아이들에게 보여주려 한다.

 

그러다가 미나는 명숙이의 어려운 집안 사정을 알게 된다. 특히 미나는 어머니의 병간호도 하고 동생들을 보살피는 명숙이를 보며 자신보다 못하다고 생각했던 명숙이가 오히려 자신보다 훨씬 어른스러운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명숙이에게 진심으로 손을 내밀게 된다. 미나와 명숙이 사이에는 심각한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계급의 벽이 존재한다.

 

하지만 어린이들의 세계에서는 이렇게 서로의 마음과 마음이 만나서 급기야는 계급 관계를 역전시키기까지 하는 소통도 가능하다. 하지만 공주 같은 아이와 하녀 같은 아이라는 설정, 그리고 공주 같은 아이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하녀 같은 아이의 어른스러운 면모에 감동하여 결국에는 진심으로 손을 내민다는 결말은 상당히 작위적이고 진부하기까지 하다.

 

그에 비하면 <뻐꾸기 엄마>의 결말은 상당히 전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미돌이는 아빠가 커다란 가방을 들고 집을 나간 뒤로 엄마와 함께 살고 있는데, 엄마는 삼교대 근무를 하는 간호사이다. 집에 자신을 돌봐줄 어른이 없는 미돌이는 이모네 집에서 밥을 먹고 잠을 자기도 한다. 이모네 아이들은 미돌이를 멧새 둥지에서 살고 있는 뻐꾸기로, 미돌이의 엄마를 뻐꾸기 엄마로 여긴다. 그러던 어느 날 이모가 맹장염으로 입원을 하게 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이모네 아이들에게 미돌이가 밥을 차려주며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인다.

 

이쯤에서 이모네 아이들과 미돌이가 화해하고 서로 잘 어울려 지내게 되었다는 결말을 지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미돌이는 이모가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오자, 더 이상 이모의 집에 가서 밥을 먹는 것을 거부하고 제 집에서 시리얼을 먹으며 지내는 쪽을 택한다. 뻐꾸기처럼 눈칫밥을 먹던 미돌이가 멧새 둥지 같은 이모네 집을 떠나 홀로서기를 시도하며 마무리된다는 점에서, 현재는 불안하지만 미래를 긍정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는 열린 결말로 평가할 수 있겠다.

 

<좋은 엄마 학원>은 요즘 아이들이라면 한 번쯤 해보았을 법한 상상을 재미있게 잘 풀어냈다. 전복의 상상력이 빛을 발하는 작품으로,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을 때가 많은 엄마를 자신이 생각하는 ‘좋은 엄마’로 바꾸고 싶다는 어린이들의 욕망을 해소해줌으로써 그들에게 상당한 통쾌함을 안겨줄 것이다. 하지만 무조건 부모 말에 순종하는 어린이가 문제가 있듯이 자식의 말에 무조건 따라주는 부모도 문제가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처음에는 자신의 엄마가 ‘좋은 엄마’가 되었다고 생각하며 좋아했던 다정이는 자신이 꿈꾸던 ‘좋은 엄마’의 모습에 문제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결국 어머니와 딸은 솔직한 대화를 통해 참된 소통을 이루게 되고 문제는 해결된다. 결국에는 소통의 부재가 문제였다는 점,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하나뿐인 방법은 솔직한 대화와 서로를 이해하기 위하여 애쓰는 것이라는 점은 비단 이 책을 읽는 어린이들뿐만 부모들에게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줄 것이다.

 

또한 엄마가 좋은 남편 학원 전단지를 손에 넣고 즐거워한다는 결말은 충분히 예상이 가능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다음에 이어질 내용을 예상하며 책을 읽는 어린이 독자들에게 또 하나의 즐거움을 안겨줄 것이다.

 

<미미가 치마를 입게 된 사연>의 결말은 책 속의 작품들 가운데에서 가장 통쾌하다. 대한민국에는 정말 다른 사람의 일에 이래라저래라 참견하지 못해 안달인 사람이 너무 많다. 다른 사람의 일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는 것이 하나뿐인 기쁨이라고 생각될 정도인 사람들도 많다. 그러한 모습들은 올바른 소통이 될 수 없다.

 

소통은 서로가 원할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생활에 대한 간섭이나 다른 사람의 문제에 대한 지나친 관심은 오히려 소통을 가로막는 벽이 될 뿐이다. 미미는 아직도 이런 집이 있나 싶은 집의 막내딸로 태어난 탓에 스스로 남자 아이 같은 행세를 하고 다닌다. 그것이 제 부모와 할머니를 기쁘게 해주는 일이라고 생각하여 치마나 드레스를 입고 싶어도 꾹 참고 바지를 입는다. 그러나 사회적 편견은 미미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는다.

 

옆집 아줌마는 남의 속도 모르고 성 전환 수술을 하라는 말까지 하며 미미와 미미의 엄마의 속을 뒤집어 놓는다. 결국 미미는 부모와 할머니에게 기쁨을 주는 것보다 자신의 기쁨을 택하기로 하고 마침내 치마를 입는다. 결말에서는 자신의 치마 입은 모습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는 옆집 아줌마에게 통쾌하게 한마디 해준다. “아줌마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세요”. 금자씨의 “너나 잘하세요”에 필적할 만한 명대사이다.

 

합의도 안 된 사회의 통념으로부터 조금만 벗어나도 혀를 끌끌 차고 손가락질해대는 사람들에게, 좌파는 도덕 교과서처럼 살아야만 한다고 웃기지도 않는 정의를 내리며 나의 명랑 생활에 간섭하는 자들에게, 꼭 한 번 읽어보라고 권해주고 싶은 동화이다. 소통을 원하는가? 그렇다면 소통에 앞서 당신의 눈앞을 가리고 있는 그 촌스럽고 흉측한 색안경부터 벗어던져라.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이 말을 꼭 들려주고 싶다.

 

“당신이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세요.”


좋은 엄마 학원

김녹두 지음, 김용연 그림, 문학동네어린이(2004)


태그:#좋은 엄마 학원, #김녹두, #문학동네어린이, #아동문학, #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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