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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8일 오마이뉴스에  실린 '수구꼴통 돕는 분열선동, 당장 멈춰라'는 김창현 민주노동당 전 사무총장의 글은 지난 26일 필자가 공동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여한 '새로운 진보정당운동'에 대한 격렬한 비판문이었다. 그 글을 끝까지 읽어가며 착잡한 심경을 가누기가 굉장히 힘들었다.

 

그런데 편집자가 이른바 '평등파'의 반론과 생산적인 토론을 기대한다고 했기 때문에 필자가 반론의 글을 쓰는 것이 적절한지를 따져 보며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나는 조직적으로 어떤 정파에도 가담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양극화에 의해 민생이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는 현실에서 제대로 된 좌파 진보정당이라면 민생중심 노선에 보다 무게를 싣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런 입장을 평등파라고 한다면 그렇게 불러도 좋다.

 

그리고 김창현 전 사무총장이 제기한 문제들에 대해 책임이 없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리고 오해하고 있는 몇 가지 문제에 대해 해명도 하고 더 나아가 생산적인 토론의 쟁점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이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감당하기 어려운, 무서운 저주의 언어에 망연자실

 

김창현씨는 '새로운 진보정당운동'에 대해 "수구 꼴통을 돕는 분열선동"일 뿐만 아니라 정체성에서는 반북선동을 일삼는 이회창의 자유선진당과 같다며 엄한 철퇴를 내리치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진보정당운동은 진보운동 자체를 음해하는데 앞장설 것이며 보수정당과 야합의 길을 걸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리고 이런 행위는 "당권에 접근하지 못하는 절망감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했다.

 

감당하기 어려운, 무서운 저주의 언어를 대하니 망연자실해질 따름이었다. 미력하나마 우리 사회의 진보를 위해 힘을 보태려는 노력이 '수구 꼴통과 야합'하는 결과로 된다면 그 같은 비극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현재 우리의 모습은 김창현씨가 지적한 것처럼 분열이 아니라고 말하기 어려우며 이런 상황을 수구세력이 고소해 하고 있다는 것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비록 분열의 고통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를 근본부터 성찰하지 않으면 폐허의 진보정치를 새롭게 일으켜 세우기 힘든 것도 사실 아닌가 ? 새로운 진보정당운동이 던지는 메시지는 그것이 비록 분열로 비춰지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잘못된 과거와 결연히 단절하겠다는 것이다.

 

당이 올바른 노선의 노동운동을 배타적 지지해야

 

김창현씨는 우리가 당 뿐만 아니라 진보운동 전체를 분열시키려 한다며 "민주노동당에 대한 민주노총의 배타적 지지방침을 철회시키려고 한다"고 했는데, 그것은 민주노총의 일이지 우리가 의도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단절하려고 하는 것은 민주노총에 대한 민주노동당의 '도구적 의존관계'다. 민주노동당은 그동안 민주노총의 배타적 지지에 안주해서 민주노총에 대해 마땅히 해야 할 쓴소리도 제대로 못 해왔다. 

 

예를 들어 2005년 12월 진보정치연구소가 여론조사 결과를 통해 한국 위기 10대 주범과 노동운동 위기의 주범으로 대기업노조를 포함시켜 발표했을 때, 민주노총은 이를 '심각한 도발'로 규정하고 공식 항의하며 진상조사를 요구한 적이 있었다.

 

민주노총이 '대공장, 정규직 중심의 노조운동'으로 고립되면서 계급 대표성을 잃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객관적인 여론조사를 통해서 환기하고자 했으나, 민주노총 지도부는 이 지적을 달게 받아들여 자신을 혁신하려고 하기 보다는 진보정치연구소의 입을 틀어막으려 했던 것이다. 민주노동당 역시 민주노총과의 도구적 의존관계에 얽매여 생산적인 토론을 회피했다. 노동자의 계급적 대의에 서기보다는 대공장 노조의 눈치 보기에 급급하지 않았느냐는 비판이 내외에서 쏟아졌다.

 

이번 선거 결과를 보라. 권영길 후보가 얻은 표가 민주노총 80만 조합원 수보다 적은 71만 표에 그치지 않았는가? 지도부가 배타적 지지 방침을 밝힌 것과는 무관하게 조합원은 배타적 지지를 보내지 않았다. 왜 그런 것일까? 우리는 민주노동당이 민주노총에 대해 비판할 것은 비판하고, 보다 노동계급적 대의에 입각한 노동운동으로 안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스스로 반성한다. 계급적 자각이 없는데 어떻게 민주노동당을 배타적으로 지지할 수 있겠는가?

 

우리 사회에서 '민주노총당'이라는 이름은 그 앞에 '대공장·정규직 중심'이라는 수식어가 들어 있는 부정적 용어다. 이제는 솔직히 말해야 한다. 우리는 민주노총의 배타적 지지에 안주해 노동자계급을 형성하는 운동에 실패했다. 그래서 새로운 진보정당운동은 민주노총이 민주노동당을 배타적으로 지지하는 방식에 의존하기보다, 계급 형성을 위해 브라질 노동자당이나 서독 사민당처럼 당이 역으로 올바른 노선을 추구하는 노동운동 세력에 대해 배타적 지지를 보내는 '역전'을 실현하고자 한다. 이것은 분열이 아니라 노동운동의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간곡한 호소다.

 

 

북한식 국가사회주의의 오류 극복은 당 강령에 명시

 

이른바 '종북주의'와의 단절도 마찬가지다. 김창현씨는 '종북 논쟁'을 촉발시킨 분당파(김씨는 흔히 '신당파'라 불리는 이들을 '분당파'라 불러 분열주의로 공격하고 싶은 모양이다)들이 북한을 "군사 왕조집단"으로 부르며 시대착오적인 반북이념을 유포하는 수구 꼴통 집단과 다를 바 없다고 비난하고 있다. 아울러 지난 1월 26일 새로운 진보정당운동 발족식에서 "한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민족적 특수 관계에 앞서 주권국가로서 국가 대 국가의 관계로 설정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영구 분단을 인정하는 친미적 주장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사실 북한에 대한 인식만큼 우리 사회의 진보운동 진영에게 심각한 고민을 던지는 화두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한 주체적 입장을 정리해 내기 위해서라도 많은 토론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제기한 것이 이번 종북 논쟁의 성과인 셈이다. 북한에 대해 군사 왕조집단과 같은 공격적 표현이 나온 배경은 역으로 그만큼 우리 운동 내부에서 북한 문제에 대한 인식이 왜곡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종북'이란 표현 또한 얼마나 자극적인가? 그러나 이처럼 강렬한 문제 제기가 아니고서는 민주노동당을 비롯한 진보운동 진영의 발목을 잡는 친북 이미지로부터 벗어나기 힘들다는 것이 조승수씨를 비롯한 여러 문제 제기자들의 핵심적인 문제의식이라고 생각된다.

 

필자 또한 북한에 대한 인식이 정확하다거나 충분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실제로 필자는 박노자씨가 2002년 5월 <아웃사이더>에 기고한 글을 보고 상당한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박노자씨는 그 글에서 자신이 모스크바에 살던 1980년대 소련의 많은 중산층들이 북한 선전 잡지의 러시아어판을 정기 구독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친북파라서가 아니라 폭소의 바다를 만들어내는 '유머의 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고 술회하고 있다.

 

즉 스탈린 시대의 아나운서를 연상시키는 묵직한 목소리와 딱딱한 어투로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품에서 안식을 되찾은 여성 동무는…" 같은 문구를 낭독하면 당시 성 문제에 예민해 있던 소련인들은 편집인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그 문구를 이해하고 낄낄거렸다는 것이다. 1956년 스탈린 격하운동이 본격화되면서 스탈린주의는 전세계 진보정치운동 내에서 급격히 청산돼 나갔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에서는 스탈린체제의 북한판인 주체사상이 뿌리를 내리면서 오늘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신랄하게 야유한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이 주체사상은 북한뿐만 아니라 남한 진보운동 진영에도 폭넓게 확산되어 21세기 진보운동 세력 전체의 발목을 잡고 있다. 바로 이런 불구화된 의식 때문에 진보진영 전체가 대중과 유리돼 왔던 것이다.

 

"남과 북을 주권국가 대 주권국가의 관계로 설정한다"는 주장을 "영구 분단"으로 독해하는 것은 자주파 특유의 운동권식 논리라고 볼 수 있다. 만약 남과 북을 주권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남한의 입장에서는 북한이 '미수복 지역'이고 북의 입장에서는 남한이 '미적화 지역'이라는 냉전적 시각을 가지라는 얘기와 다를 바가 무엇이겠는가? 국가 대 국가로 설정한다는 것이 통일을 지향하는 특수 관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를 바로 친미적 논리로 둔갑시키는 것이야말로 논리의 비약이 아닐 수 없다.

 

"북한 국가사회주의의 역사적 실패"를 선언하자는 주장을 두고 당의 강령을 폐기하자는 것이며 진보정당임을 스스로 부정하는 행위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런데 이미 민주노동당 강령에서 북한식 국가사회주의의 오류를 극복해야 한다고 분명히 명시하고 있기 때문에 이는 억지에 불과하다. 오히려 종북 논쟁에 대한 역공을 빌미로 민주노동당의 강령조차 왜곡하려는 시도가 아닌지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17대 대선은 자주파의 종파적 욕망의 제물

 

김창현씨는 분당파에게 역사로부터 배우지 않는다고 비난하는데, 이 또한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이다. 진보 정당 최초의 원내 진입이 확실시되던 2000년 총선에서 울산 북구의 실패를 통해 자주파가 배운 것은 무엇인가? 자주파가 종파적 이해를 앞세워 결국 민주노동당과 진보정치의 성장을 바라는 대다수 민중들의 염원을 4년간 지연시키고 나서도 자주파의 패권 장악 시도는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됐다.

 

당직 선거를 비롯해 지역위원회 장악을 위한 위장전입과 당비 대납 사건이 끊이지 않았다. 이로 인해 당내 정파적 갈등과 긴장이 첨예해졌다. 사실 자주파의 민주노동당으로의 대이동 이전에는 당내에서 이와 같이 첨예한 정파 대립이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2007년 대선마저 자주파의 종파적 욕망의 제물이 되어 민주노동당이라는 정치 프로젝트 자체를 물거품으로 만든 것이다.

 

사실 김창현씨는 민주노동당 대통령 후보 경선 과정에서 권영길 후보 선대본부의 상임본부장을 맡았고 또 대선 과정에서도 권영길 후보 선대본부장을 맡았기 때문에, 대선 패배에 대해 누구보다도 큰 책임을 져야 하는 위치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대선 이후 일련의 사태에 대해서도 누구보다 먼저 자기성찰과 반성을 했어야 하지 않을까?

 

책임 있는 정치인이라면 한국의 진보정당사에 조봉암 이후 가장 중요한 인물로 존경받을 수 있는 권영길 후보를, 민주노동당호를 격침시키는 가미가제로 만든 사태에 대해 어떻게 고개를 들 수 있겠는가? 어쩌면 김창현씨가 보여준 이러한 무책임한 모습이 민주노동당을 죽이고 결국 당원들로 하여금 당을 떠나게 만든 것이다.

 

필자는 한 사람의 당원으로서 그리고 부산시당 위원장으로서 지난 대선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왜 권영길이냐?"는 질문에 곤혹스러워 하면서도 지인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지지를 당부했다. 내가 진정 아쉬워하는 것은 경선 과정에서 자주파의 권영길 후보에 대한 조직적 지지 논의가 한참일 때 "대선까지 그래서야 되겠느냐? 당원들의 판단에 맡겨 두면 안 되겠느냐? 제발 당원들의 열정을 빼앗아가는 짓은 그만두라"고 공공연하게 비판하고 경고하지 못한 일이다.

 

김창현씨의 글에서 나타는 것처럼 '민주노총당'을 극복하자는 것이 민주노총을 부정하는 것으로, 친북 정당을 극복하자는 것이 수구꼴통과 동격으로 매도되는 상황에서는 제대로 된 토론을 하기 어렵다. 김창현씨가 주장하듯이 통일단결이라는 정언명령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맹목적인 통일단결을 공허하게 외치기보다는 뼈를 깎는 자기 성찰과 근본적인 변화를 모색해야 할 시간이다.

 

오늘날과 같은 상황에서 민족주의 운동이 가진 진보성과 유효성은 어디까지인가? 88만원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새로운 진보정당 운동의 이슈와 실천 양식은 무엇인가? 다원주의적 가치가 공존하는 진보정당 운동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이러한 수많은 질문들에 답하면서, 우리는 갈수록 살기 어려워지는 노동자 민중들의 아픔과 고통을 실질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실력 있는 진보로 거듭나야 한다.


태그:#민주노동당, #민노당 분당, #자주파, #평등파, #종북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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