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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에 닿은 차가움이 그리 싫지만은 않다. 날이 맑게 개었다. 이런 날엔 산행이 제격이다. 아내한테 산에 가자고 졸라대는데 반응이 시큰둥하다. 친구들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싫단다. 갑자기 할 일이 없는 사람처럼 무력감이 든다.

 

'애라 모르겠다. 낮잠이나 실컷 자두자!'

 

뜨뜻한 구들을 짊어지고 TV나 보는 게 상책인 듯싶다. 한숨 푹 잤나보다. 그런데  몸이 가뿐하지가 않다. 어깨가 찌뿌드드하고 머리는 멍멍하다.

 

추운 겨울 방에서 뒹구는 일도 고역이다. 내가 딱해 보였는지 아내가 보던 책을 덮으며 기분 좋은 말을 꺼낸다.

 

"당신, 바람 쐬고 싶지?"
"그래! 어디라도 나갔다 오면 좋겠구먼!"

 

아내가 주섬주섬 옷을 입는다. 웬일일까? 아침에는 나 몰라라 하던 사람이! 빨간 등산복까지 꺼내 입고 폼을 잡는다.

 

"광성보에 가면 어때요? 산행하기는 좀 늦고…."

 

호젓한 산책으로 광성보가 안성맞춤일 것 같다. 몇 번 가보았지만 갈 때마다 새로운 맛이 나는 곳이다.

 

신미양요 무명용사들의 함성이

 

주말이어서일까? 광성보 성문인 안해루(按海樓) 앞에는 꽤 많은 사람들로 붐빈다. 역사체험을 하러 온 학생들이 단체로 움직여 더욱 왁자지껄하다. 인솔하는 선생님이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다독인다.

 

 

"애들아, 안해루는 무슨 뜻이 담겨 있지? 말 그대로 바다를 지킨다는 의미일 거야. 성문을 건너면 바로 바다가 보여! 이 바다를 염하라고 부르지. 이곳 광성보를 차근차근 둘러보면 많은 역사공부를 할 거야. 호국의 얼이 담긴 곳이니 마음을 바로하고 교과서에 배운 것을 몸으로 느끼면 좋겠어!"

 

애들 표정이 사뭇 진지해진다. 아마 이곳에는 호국영령들의 숨결이 숨어 있다는 것을 느끼는 모양이다.

 

 

광성보는 강화 12진보의 하나로 사적 제227호로 지정되었다. 강화해협을 지키는 천혜의 요새를 구축하였다.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고려가 강화도로 수도를 옮긴 후에 흙과 돌을 섞어 해협을 따라 길게 쌓은 성이다.

 

조선 광해군 때 헐어진 데를 다시 쌓고, 1658년(효종9)에 강화유수 서원이 광성보를 설치하였다. 그 후 1679년(숙종5)에 강화도 국방시설을 확장할 때 석성(石城)으로 축조하였다.

광성보 하면 근대에 겪었던 신미양요(1871)를 떠올린다. 이곳은 어재연(魚在淵) 장군을 비롯한 병사들이 미국 군대와 이틀간 치열한 전투를 벌인 전쟁터였다.

 

당시 광성보전투에 참여했던 미국 측 종군 기록은 뭇사람들 입에 회자되고 있다.

 

"조선군은 용감했다. 그들은 항복 같은 건 아예 몰랐다. 무기를 잃은 자들은 돌과 흙을 집어 던졌다. 전세가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되자 살아남은 조선군 100여명은 포대 언덕을 내려가 투신자살했고, 일부는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했다."

 

광성보는 열세한 무기로 목숨을 바쳐 싸운 무명전사들의 한 맺힌 절규가 느껴지는 역사의 현장임이 틀림없다. 그날의 처절한 함성이 들리는 듯싶다.

 

호젓한 역사의 현장을 걸어본다

 

우리 부부는 안해루를 끼고 왼쪽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광성보는 20여만평의 자연공원으로 조성되었다. 호젓한 길을 따라 산책삼아 걸어야 제격이다. 광성돈대를 거쳐 소나무 길을 걸으면 쌍충비각, 신미순의총과 만난다. 그리고 손돌목돈대와 용두돈대를 돌아 산책로로 나오는 코스가 좋다.

 

맨 먼저 찾은 곳은 광성돈대. 여기에는 신미양요 당시 사용한 홍이포(紅夷砲), 소포(小砲), 불량기(佛狼機)를 복원하여 전시해 놓았다. 예전 화약 냄새는 풍기지 않았지만 전쟁의 포화가 들리는 것 같다.

 

 

우리는 광성돈대를 나와 소나무길을 걸었다. 둔덕 위로 뻗은 뿌리가 얽히고설키어 있다. 비바람에 쓸려 내려가는 흙을 안으려다 속살을 드러낸 소나무들이 안쓰럽다. 그래도 쓰러지지 않는 생명력으로 역사의 한을 담고 서 있는 모습이 대견하다. 소나무길이 맑은 공기와 어우러져 겨울 정취를 자아낸다.

 

얼마 안 올라 쌍충비와 신미양요무명용사비가 눈에 띈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신미순의총도 보인다.

 

신미양요 때 조선군은 약 300여명이 광성보전투에 참여했다고 한다. 전투가 끝나고 시신을 헤아려보니 50여구밖에 없었다. 이는 포로가 되기를 거부하여 바다로 뛰어들어 자결한 전사가 상당수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쌍충비는 광성보전투에서 순절한 어재연 장군과 59명의 넋을 기린 비이다. 이름 없는 용사들의 시신을 화장시켜 7기의 묘에 합장한 것이 신미순의총이다. 안내문을 읽는 학생들의 표정에 숙연함이 묻어 있다. 살신성인을 한 선인들의 혼이라도 느끼는 것일까?

 

슬픈 역사의 현장에 '손돌'이 있었다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손돌목돈대에 올랐다. 이곳은 광성보전투에서 최대격전지로 사상자가 가장 많이 발생했다고 한다. 화약연기 자욱했을 손돌목돈대가 원형의 아름다움으로 고즈넉하게 남아 있다. 고지를 향해 옥죄어오는 적들과 맞서 싸운 전사들의 처절함과 죽음을 목전에 둔 긴박함을 생각하니 가슴 한쪽이 뭉클해온다.

 

어느새 우리가 걷는 곳이 용두돈대이다. 광성보에서 가장 수려한 경치를 자랑한다. 용머리처럼 바닷가로 삐죽 나와 있는 모양이 요새처럼 버티고 있다.


용두돈대 앞의 바다를 손돌목이라 부른다. 손돌목은 김포군 대곳면 신안리에서 강화군 광성보 사이에 있는 좁은 해협을 말한다. 여기에는 뱃사공 손돌의 슬픈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이곳은 물줄기가 거칠고,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하다. 숙련된 뱃사공이 아니고서는 쉽게 건너지 못한다.

 

임금의 강화도 피난길에 손돌이란 사공이 뱃길을 안내하게 되었다. 워낙 급한 물살에 배가 뒤집힐 것 같은 불안함으로 임금은 안절부절 못하였다. 그런데 손돌은 험한 물살을 가르며 바다 가운데로 태연히 노를 저었다.

 

임금은 '이 놈이 첩자로 나를 죽이려는 것은 아닐까'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손돌을 죽이라고 명령했다. 손돌이 이곳 물길의 특성을 설명하였지만 임금은 손돌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손돌은 바가지를 바다에 띄워 바가지가 흘러가는 곳으로 배를 저으라는 말을 남기고, 결국 죽음을 맞이하였다.

 

침몰 위기를 넘긴 임금 일행은 무사히 강화도에 도착하였다. 손돌의 충정을 뒤늦게 깨달은 임금은 뼈저린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 임금은 손돌의 무덤을 만들고, 제사를 지내 그 영혼을 위로하였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곳을 손돌의 목을 밴 곳이라 하여 '손돌목'이라 부른다. 손돌의 한이 서려서일까? 손돌이 죽은 음력 10월 20일에는 큰 바람이 불고, 강추위가 몰아온다는 말이 있다. 이 때 부는 매서운 바람을 손돌바람이라 부른다.

 

신미양요의 아픈 역사와 손돌의 슬픈 전설을 간직한 광성보. 돈대를 둘러싼 담과 적을 향해 포를 쏘았을 작은 구멍 사이로 염하의 물줄기가 오늘도 거세게 굽이치고 있다. 슬픔과 한을 숨겨두기가 억울하여 크게 함성이라도 지르고 싶은 듯이.

 

광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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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갑남

덧붙이는 글 | 지난 주말(19일)에 다녀왔습니다.


태그:#광성보, #신미양요, #손돌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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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마니산 밑동네 작은 농부로 살고 있습니다. 소박한 우리네 삶의 이야기를 담아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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