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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80년 5·18에 이어 87년 민주항쟁을 통해 국가단위 정치권의 민주화는 이뤄냈으나 사회 속의 민주화는 아직 감지되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어느 대학의 조태훈 교수는 ‘남이나 북이나’라는 제목의 칼럼을 통해서 북한은 큰 독재자가, 남한은 사회 속의 작은 독재자들이 온존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명박 정부가 제시한 교육부 폐지는 일단 잘하는 것이다. 교육정책 결정권을 대학 및 지방 교육청으로이양하는 것은 민(民)이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라는 대세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지금껏 교육부는 교과서 정책, 학생 생활규정, 교원인사를 포함하여 흔히 낙하산 인사라고 지칭되는 교육부 관리들의 공직생명 이어가는 것, 교육과정 편성권 등에 있어서 사실상 독점적 결정권을 행사해왔다.

 

그러나 이명박 당선인의 별명이 '불도저'라는 점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그의 국정기조인 시장논리가 약자에 대한 세심한 배려에 약하다는 일반적 속성을 감안할 때 우려가 앞선다. 이미 지적된 바와 같이 대학입시를 사실상 총괄하게 된 대학교육협의회의 정책적 오류, 초중등 교육을 책임지게 될 시-도 교육청의 권력남용을 감시할 장치가 없다는 점이다. 우선 대학입시와 관련해 볼 때, 강원대학교 최현섭 총장이 언급한 바와 같이 학생, 학부모, 교사가 함께 참여하는 공동 협의체를 구성함으로써 공공성을 강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지금도 상위권 대학에서 본고사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논술 및 심층면접 시험을 치른다. 그런데 논술을 위한 독서 및 첨삭지도는 학교에서 수용하지 못할 만큼 학생과 교사들의 일상은 과다한 교과목, 과다한 학급당 학생수, 수능준비를 위한 공부, 내신관리 등으로 시달리고 있다.

 

한국대학교육협의회(대교협)에서 이러한 현실을 공통으로 인식하고 대응책을 함께 강구하지 않으면 자유의 오용으로 흐를 개연성이 높다. 만일 중등교육 현실을 개선하는 노력없이 일본과 같이 본고사를 치르게 되면, 우리의 경우 입시만능으로 더욱 치닫게 되고 학생들의 창의성 향상을 통한 교육경쟁력은 더욱 떨어질 것이다. 수능시험 응시과목을 줄이는 것도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평소 배우는 과목을 줄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미 경쟁일변도의 중등교육을 거치고 있는 우리나라 학생들에게서 타인에 대한 배려를 찾기 어렵다는 개탄의 소리를 쉽게 듣게 된다. 교사가 시키지 않으면 아이들은 능동적으로 움직일 줄 모르는 것이다.

 

양보와 타협, 다름을 인정할 줄 아는 능력, 약자를 끌어안을 줄 아는 등 좀더 포괄적인 지성과 인성교육의 면역주사를 맞지 않고 나가는 우리 학생들은 결국 혈연-지연-학연의 집단 이기주의, 가족주의, 권력 지상주의, 냉정한 이성이 배제된 즉흥적인 감정위주의 판단 등 한국사회의 모순을 그대로 수용, 계승하고 있다.

 

시-도 교육청 권한은 다시 학교로 돌려줘야


다음으로 시-도 교육청의 위상이 한층 강화되게 된 것 역시 고무적인 일이다. 그러나 교육청이 권한을 어떻게 행사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역시 의심의 눈길을 주지 않을 수 없다. 예컨대 지난날 냉전이 만들어낸 관변단체 중에 ‘자유총연맹’이 있다. 이 단체는 남북의 대결구도가 사라지고 있는 지금도 전국 교육청의 협조공문을 빌어 학교현장에 견학이나 그들 단체에서의 교육을 종용하고 있다. 일정한 만큼의 견학비용을 학교에 요구하고 있으며 강제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이려고 선택사항으로 한다는 조건을 달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교장, 교감이 소신껏 거부하지 못한다. 교감의 경우, 교육청에서 50%의 평가권을 쥐고 있어서 승진하는데 장애가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교육청의 지시사항에 거의 절대 복종해야 한다. 따라서 관변단체의 요구사항이 선택이 아닌 의무가 되어 있다. 게다가 새터민(탈북자)를 초청하여 대담을 하는 생동감있는 교육도 아니고 형식적으로 비디오를 보여주는데 그치고 있어 동원된 고교생들은 90% 이상이 졸다가 온다. 이런 일이 매년 되풀이되고 있다. 실무진인 교사들이 직접 자유총연맹이나 교육청에 문제를 제기해도 소용없다.

 

교장선출보직(공모)제와 학생회법제화가 관건


이러한 유사한 관행들이 사라지도록 하는 방안은 교육청이 받은 자율권을 다시 이양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는 다름아닌 노무현 대통령의 대선공약이었다가 사실상 실현되지 못한 것으로서 교장선출보직제와 학생회-학부모회-교사회 법제화이다. 교육청도 학교민주화, 교실민주화를 위해서 현장지원기관으로 거듭나야 하지 않는가?

 

학교민주화는 지금까지의 감독과 통제위주의 교장의 권한을 역전시키지 않으면 달성될 수 없다. 교장이 교사들로부터 선출되어야 교육청 눈치를 안보고 신념껏 행동할 수 있고 때로 교육청에 대해 적극 제언하면서 교육청을 현장지원기관으로 거듭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교장이 학생과 교사를 위해 지원역할에 충실하려면 이들의 결집된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렇다면 법적으로 승인된 학생회와 교사회의 견해를 들어야 하는 것이 마땅히 거쳐야 하는 수순이다. 지금도 전국의 중-고교 학급시간표에 있는 월요일 학급회의 시간은 잡담이나 입시공부하는 시간으로 변질되어 있다.이제 이것을 복원시켜야 한다.

 

이렇게 중등교육에서 미시적으로 세분화되어 나가는 권한은 다시 최종적으로 학생들의 교과선택권, 학교운영에의 참여 등으로 귀착되어야 하고, 교사들에게는 교과서를 보조교재로 다루면서 가르치고 싶은 내용을 가르치고 가르친 학생들에 대해 소신껏 평가하는 평가권을 보장하는 것 등으로 현실화되어야 한다.

 

이에 따라 학생들이 이제 학기당 이수과목을 선진국과 같이 7개가 되도록 하는 것, 필수과목을 지정한 후 선택과목을 학생들이 골라 시간표를 짜서 교과교실로 이동하는 수업, 선진국과 같이 학생대표를 학운위 공식 구성원으로 인정하는 것, 학생회를 실질적으로 가동시켜 두발문제를 포함한 교내 주요사안을 스스로 결정하도록 민주적 의사결정의 장을 마련하는 것 등이 보장되어야 한다.

 

교사들은 지금도 동일교과를 여러 명이 나눠 가르치면서 평가는 모두 함께 한다. 예컨대 수학교사 3명이 고 3학년 12개반을 각기 4개반씩 나눠 가르친다. 이 때 교과서와 문제지가 동일하다. 그러나 가르치는 과정에서 교사의 능력과 관심분야에 따라 강조하는 내용이 달라질 수 있으며, 학생들의 특성에 따라서도 좀더 오래 머무는 단원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중간, 기말고사를 치를 때 시험문제는 똑같다. 그러면 학급간 평균성적은 원래 차이가 나게 마련인데 이 차이가 더 커질 수 있다. 평균성적의 차이에 영향을 주는 다른 요인이 있을 수 있어도, 이 차이가 마치 전적으로 교사능력의 차이에 있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다행히 지금은 그 정도가 완화되긴 했어도 여전히 학교 관리자인 교감, 교장들은 이 차이의 책임을 교사들에게 돌리고 있다. 교육청에서 이를 학교장학의 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국의 중-고교 교사들은 한 개 학년을 전담하지 않고 나눠 가르치는 한 늘 시험결과에 초조해한다. 학생과 교사들의 지적 호기심과 교육적 실험정신이 발휘될 수 없는 구조다. 이제는 한 명의 수학교사가 가르친 4개 학급에 대해 신념껏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평가권 회복이다. 이러한 잘못된 관행들을 걷어내는데 이명박 정부가 능력을 보일 수 있을까? 이러한 요인들이 개선되지 않는 한 교실혁명은 불가능할 것이다.

 

끝으로, 권한과 역할이 축소되었다고 해도 교육당국은 여전히 할 일이 있다. 즉 학벌주의를 극복하여야 하며, 기업과 함께 직업교육을 정상화시켜 맹목적인 대학입시 열기를 분산시키야 한다. 학벌과 입시에 포획된 상황을 개선하지 않으면 권한을 이양받은 시-도 교육청이 학교현장에 대해 입시실적을 내고 이를 공개하도록 요구하면서 무한경쟁으로 치닫도록 할 가능성이 높다. 이미 학원가는 재도약을 준비하고 있지 않은가? 이명박 정부의 교육적 혜안이 과연 이렇게 세밀하게 작동할 지에 대해서 우리는 의문의 시선을 멈출 수 없다.


태그:#교육부 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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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소리'에 교육평론 45편 정도 기고했으며, 현재 인천교육청 공립 대안교육 자문위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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