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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7월 성공회대 대학원 사회학과에서 나온 한 논문이 발표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주목을 받게 된다. 그것은 논문이 담고 있는 주제 때문이었다.

 

이 논문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몇몇 30대 후반의 사람들. 그들이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바로 지나간 자신들의 과거가 다뤄진 데 있었다. 10대 후반,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았던 이들에게 한편의 논문이 묻혀진 기억을 슬며시 끄집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아련한 기억의 저편을 떠오르게 만든 그 논문의 주제는 '고등학생운동'이었다.

 

논문을 통해 끄집어 낸 잊혀진 기억

 

양돌규씨가 석사학위 논문으로 발표한 <민주주의 이행기 고등학생운동의 전개과정과 성격에 관한 연구>는 제목처럼 사회운동의 한 분야로서 바라본 '고등학생운동'에 대한 연구서다.

 

20년 동안 주목되지 못했던 '고등학생운동'을 사회학적 관점에서 정리하고 있다는 데서 그 의미가 있다.

 

또한 미지의 분야를 개척했다는 점에서 일부 언론의 관심을 받기도 했다. 선행연구가 전혀 없었던 분야였고 구전으로만 떠돌던 내용이 학문적 연구를 통해 정립된 데 따른 것이다.

 

구술사적 방법을 통해 기술된 논문은 87년 이후 전개된 당시 운동의 상황을 비교적 세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87년 6월 항쟁 영향으로 등장한 서울지역고등학생연합을 기점으로 이후 각 지방의 움직임. 그리고 94년까지 이어진 고등학생운동을 담아내면서 사회학적인 정의를 내리고 있다.

 

논문은 마지막 부분에서 현재 청소년운동과의 연관성을 언급하며 이런 결론을 내리고 있다.

 

과거의 고등학생운동이 현재의 청소년 인권운동과 잇닿아 있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한국의 교육현장이 그만큼 경직된 채 스스로를 유지해 왔다는 것을 반증한다. 어떤 의미에서 고등학생운동과 청소년 인권운동은 서로 과거이며 미래이며 현재진행형인 운동인 것이다
...  따라서 고등학생운동은 현재 청소년 인권운동과의 연관성속에서 현재화시켜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현재의 청소년들이 자신의 존엄성과 주체성을 삶으로서 표현해 낼 수 있도록 해야 하며 능히 그렇게 할 수 있는 역능이 있다. 본 연구의 대상인 고등학생운동은 청소년들이 스스로 사회적 주체로 설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20년 전 고등학생운동은 지금의 청소년운동과 연결된다. 20년간 변한 것이 없는 게 교육현실이고, 신자유주의적 분위기 속에서 사교육이 늘어나며 교육현장은 더욱 열악해지고 있다. 고등학생운동과 청소년운동은 그 교육주체들이 자발적으로 벌이는 자기 목소리 내기라는 점에서 잇닿아 있는 것이다.

 

 
양돌규씨가 '고등학생운동(이하 고운) 연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고운과 관련된 글을 쓰거나 연구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고운과 관련 있는 사람들이다"라는 그의 말처럼 자신이 고등학생운동을 했기 때문이다.

 

고등학생운동은 청소년운동과 잇닿아 있어

 

1973년생인 양돌규씨는 1987년에 중학교 2학년이었다. 일간지 해직기자 출신 아버지와 노동소설을 쓰신 어머니 영향 탓에 중학교 때부터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래서 87년 이후 이어진 고운의 발전기 당시 그는 각종 집회를 찾아다니며 현장을 목도하게 된다. 

 

그런 배경은 대학원에 들어가면서 논문 주제로 '고등학생운동'을 생각하게 됐고, 그 당시 자료들이 제대로 존재하지 않는 현실을 감안해 구술사를 통해 치열했던 시절의 한 부분을 복원시켜 낸다.

 

"사회학에서 구술기록에 근거하는 구술사 연구는 마이너리티집단들의 드러나지 않은 기억들을 드러내는 작업이예요. 보통 여성이나 노동자가 예가 될 수 있었지만 과거가 있으나 역사가 되지 못한 고운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세대연구를 하고 싶었는데 너무 광범위해서 좁힌 게 고운이기도 하지요."

 

엄연한 사회운동이 한 부분이었지만 고운이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묻혀졌기에 그것을 새롭게 드러내는 작업은 그리 간단치 않았다. 자료 수집을 위해 발품을 팔아야 했고 수많은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때로 가슴 아픈 기억의 한편을 더듬도록 요구해야 하는 일은 그것을 부담스러워 하는 이들에게는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그러나 그 덕택에 운동사의 한 부분이었지만 제대로 된 평가를 받기 못했던 고등학생운동은 의미를 부여받게 된 셈이다.

 

"그때의 기억을 현재 어떻게 가지고 있는지가 주된 관심이었어요. 고통스럽지만 후회로 생각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는 어렵기도 했습니다. 개개인의 기억들이 다른 부분도 많아서 단편화된 기억들을 하나로 묶어내기는 어려웠어요."

 

만났던 사람들을 통해 "그들이 운동에 입문한 이유나, 급진화 된 계기, 운동을 하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들은 가정과 사회에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사회적인 부분에 영향을 받은 모습이었다"고  덧붙였다. 

 

한편으로 그는 "서고련을 고운과 결부시켜 내야할 것인가도 더 생각해 보는 부분"이라고 말했다.  "서고련이 87년 6월 항쟁의 일반적 좌절(당시 민주화진영의 선거 패배)로 생겨난 운동이었고, 고운과 결부 짓는다면 정치적 운동 측면에서는 현재가 더 크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또한, 대학에서 운동을 시작한 학생운동 출신들과 고등학생운동 출신들은 그 결이 달랐다고 본다. 1991년 사회에 거센 풍랑을 일으켰던 분신정국 당시 고운 출신들이 4명이나 있었고, 이들이 일찍부터 현실에 멍든 탓에 사회에 대한 비극적인 인식을 많이 하지 않았나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학생들은 현실을 평이하게 인식한데 비해 고운출신들은 현실을 비극적으로 인식했던 것 같아요. 학생운동 출신들은 운동을 즐겁게 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던 반면 고등학생운동 출신들은 결연한 마음으로 임했던 것 같거든요."

 

양돌규씨는 당시 분신했던 "김영균, 박승희 열사 등이 고운 출신이었다"며, "91년 5월 열사들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자기 역사 못 쓰면 계속 애 취급 당하고 묻히게 될 뿐

 

그는 또 "논문을 내고 나서 지방 고운 출신들한테는 '서울의 고등학생운동 역사만을 기록해 놨다'는 불만의 소리도 들었다"고 말하고, 서울을 중심으로 쓰여졌다는 안팎의 오해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우선 학생들 삶을 봤을 때 서울 대구 부산이냐 보다는 입시교육 학내비리 체벌 등 동질성이 강한 부분을 봤어요. 지역에는 큰 의미를 안 둔 것이지요. 그리고 사회학이 아닌 역사학 관점에서 보자면 모든 지역을 서술해야 마땅하지만 서술 자료로서 와 닿는 느낌이 없기 때문에 억지로 우겨넣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광주나 대구도 논문을 준비 중이고, 부산도 이를 정리하는 작업이 진행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자기 역사는 자기 스스로 쓰는 게 맞다"고 강조했다. 

 

"서고련에 대한 비판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으면 나머지 비합법적인 움직임이 부정될 수밖에 없듯이, 고운이 자기 역사 쓰기를 제대로 못하면 지금의 청소년운동이 계속 애들 취급당하게 되고 결국 역사가 되지 못한 채 묻히게 될 뿐입니다."

 

세상이 보수화되면서 오래전의 운동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할 수 있다는데 대한 우려감이 생기는 요즘, 양돌규씨의 연구는 고등학생운동을 조명하고 현재 청소년운동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 깊게 보였다.

 

그의 주장대로 "학교는 청소년들의 인권이 보장되는 방향으로 새롭게 재편되어야 하는 과제 앞에 놓여져 있고, 그것은 또한 앞으로 청소년운동이 해결해 나가야할 부분"이기 때문이다.


태그:#고등학생운동, #청소년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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