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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고 2학년이던 문형범군은 지난해 KBS의 '독서골든벨'에서 우승했으며, 올 7월 <18세, 책에서 꿈을 묻다>는 책도 펴내며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춘천고 2학년이던 문형범군은 지난해 KBS의 '독서골든벨'에서 우승했으며, 올 7월 <18세, 책에서 꿈을 묻다>는 책도 펴내며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 KBS / 황소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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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6년 10월 KBS 주최로 <도전! 독서 골든벨>이라는 '고교 독서왕 선발대회'가 열렸다. 전국 100개 고등학교에서 내로라 하는 '독서왕'들이 겨루는 대회라 전국 학생들의 관심이 집중됐다. 이날 '독서 골든벨'의 우승자는 강원도 춘천시에서 올라온 문형범(18)군이었다.

당시 춘천고 2학년이었던 문군은 '독서 골든벨'의 우승자가 되면서 전국적인 인물로 떠올랐다. 게다가 그는 이듬해(2007년) 7월 <18세, 책에게 꿈을 묻다>(황소자리)라는 책까지 펴내며 언론의 주목을 한몸에 받았다.

엄기영 MBC <뉴스데스크> 앵커는 문군이 펴낸 책을 두고 "내 아이의 모범이 될 만한 이야기를 찾는다면 멀리 갈 것 없다"며 "어른들이 그릇된 욕망에 매달려 있는 동안 책을 통해 스스로를 성장시킨 18세 소년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여기 있다"고 호평했다.

문군이 이렇게 언론과 출판계의 주목을 받은 건 그가 어떤 '사교육'도 없이 '독학'과 '공교육'만으로 독서·논술왕의 경지에 올랐다는 점 때문이었다. 한 일간지는 이렇게 보도한 바 있다.

"문군은 실제로 중· 고교 시절 대외 글짓기·논술대회에 15차례 참가해 모두 우수한 성적을 거뒀고, 모의 논술고사에서도 항상 전교 1등, 전국에서는 다섯 손가락에 들 정도의 우수한 성적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논술학원을 따로 다니지는 않는다. 다만 학교에서 논술수업을 듣고 2주일에 한 번씩 대학별 기출문제나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는 주제를 선택해 한편의 글을 완성한다."

하지만 문군의 '독서·논술왕 신화' 뒤에는 한 소설가의 개인지도가 숨겨져 있었다.

중 1년부터 고 1년까지 3년 동안 독서·논술지도 받아

'독서골든벨' 우승자 문형범군이 소설가 서예일씨의 지도를 받으며 작성한 논술 자료의 일부. 문군은 중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1학년 초반까지 서씨의 지도를 받았다.
 '독서골든벨' 우승자 문형범군이 소설가 서예일씨의 지도를 받으며 작성한 논술 자료의 일부. 문군은 중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1학년 초반까지 서씨의 지도를 받았다.
ⓒ 오마이뉴스 안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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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골든벨'의 우승자인 문군은 중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1학년 초반까지 한 소설가로부터 집중적인 논술·독서지도를 받아온 것으로 확인됐다. 문군을 3년여 동안 지도해온 '스승'은 강원도 정선출신의 소설가 서예일(44)씨였다.

한 지역일간지 사회부 기자 출신이자 현역 소설가인 서씨는 춘천지역에서 꽤 인정받고 있는 '논술강사'이다. 그는 98년부터 '서예일의 문예창작교실'이라는 이름으로 초·중·고 학생들의 논술·독서를 지도해왔다. 지난 10월 13일 '제2회 전국 청소년 독서논술 토론대회'에서 고등부 으뜸상을 수상한 맹태호(춘천고 1학년)군도 그의 지도를 받았다.

서씨를 아는 한 인사는 "문형범뿐만 아니라 이곳 춘천에서 외국어고·과학고·춘천고 상위권 학생들, 서울대·고려대·연세대에 간 학생치고 서씨에게 독서·논술지도를 안 받은 학생이 없을 정도로 그들의 숨은 스승"이라고 평했다.

서씨는 희곡 <금초>로 등단한 이후 <문학세계>와 <문예사조> 등에 시와 소설을 발표해왔다. <내가 먹은 빨간 사과에는 일곱난장이가 없었다>(2005년), <붉은 벽돌집>(2006년), <유레굴루스>(2007년)의 소설집과 <푸른 고등어>, <새들이 풀잎에게>의 시집을 펴냈다. 

서씨는 지난 5일과 6일 이틀에 걸친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형범이가 중학교 1학년이었을 때 처음 만나 고등학교 1학년 초반까지 1주일에 두세 번 정도 (논술·독서와 관련한) 수업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한 달 수강료는 7만원에 불과했다"며 "형범이의 경우 가정형편이 어려워 수강료를 못낸 적도 있고 내가 책을 사라며 수강료를 돌려준 적도 있다"고 말했다.

이어 서씨는 "한국 단편소설부터 <노동의 종말> <과학혁명의 구조> <거꾸로 읽는 세계사> 등 비문학분야의 책까지 독서를 많이 시켰다"며 "동서양고전인 <맹자> <노자> <플라톤> <군주론> 등도 어려운 책이긴 하지만 수업을 병행하며 읽혔다"고 말했다.

그는 "한 권의 책을 읽으면 질의·응답시간을 갖은 뒤 아이들한테 반드시 그날 독후감을 쓰게 했다"며 "나도 그것을 인쇄해 아이들과 함께 보면서 첨삭지도를 했다"고 밝혔다.

<군주론>에서 <노동의 종말>까지... 3년여 동안 약 1000매 분량 글쓰기 

서씨가 문군에게 읽힌 독서 목록에는 김유정·김동인·하근찬·박종화의 단편소설에서부터 <국가론>(플라톤), <군주론>(마키아벨리), <연금술사>(파울로 코엘료), <과학혁명의 구조>(토마스 쿤), <노동의 종말>·<엔트로피>(제레미 리프킨), <제3의 물결>(앨빈 토플러) 등 비문학분야까지 포함돼 있었다.

여기에 <맹자> <논어> <장자> <삼국유사>(일연), <백범일지>(김구), <무소유>(법정) 등 고전은 물론이고 <어린 왕자>(생떽쥐베리), <변신>(카프카>, <아큐정전)(루쉰), <테스>(토마스 하디) 등 외국소설도 추가됐다.

서씨는 6일 기자에게 문군이 자신의 지도 아래 중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1학년까지 써왔다는 논술자료의 일부를 공개했다. 그는 "첨삭지도한 자료를 학생들에게 돌려주기 전에 항상 따로 인쇄해 놓는다"며 "그 원고지 양이 한 트럭분 정도 된다"고 말했다.

문군은 서씨의 지도 아래 1년에 200자 원고지 300매가 넘는 글을 썼다고 한다. 3년여 동안 1000매에 가까운 글을 쓴 셈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의 글쓰기 실력도 크게 성장했다고 한다. 

서씨는 "형범이가 중학교 1학년 때 썼던 글은 일반 학생들과 거의 차이가 없었다"며 "하지만 학년이 올라갈수록 책읽는 속도도 달라지고 글도 달라졌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중학교 3학년에서 고등학교 1학년으로 올라갈 때 쑥쑥 크는 모습이 보였다"고 덧붙였다. 

그는 "고등학교에 가면 학교에서 애들을 학교에 잡아두기 때문에 형범이도 고등학교 1학년 중간에 그만두었다"며 "다만 중간중간 자신이 쓴 글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여주곤 했다"고 전했다.

또 서씨는 "형범이는 다른 학생에 비해서 하고자 하는 의지가 아주 강했다"며 "특히 고등학교에 진학했을 때 전교 1등을 빼앗겼을 때 좌절했을 정도로 지는 걸 싫어한다"고 평했다.  그는 "형범이 어머니가 장래문제, 공부문제 등을 상담하기 위해 세 번 정도 나를 찾아왔다"며 "어머니는 자식교육에 열의가 높지만 평범하고 소박한 분이었다"고 전했다.

왜 3년여 간 논술 지도한 스승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을까?

3년여간 문형범군을 지도해온 소설가 서예일씨.
 3년여간 문형범군을 지도해온 소설가 서예일씨.
ⓒ 오마이뉴스 구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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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문군은 지난 7월 펴낸 <18세, 책에게 꿈을 묻다>에서 3년여 동안 자신을 지도했던 서예일씨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저자의 서문에는 학교 선생님과 가족에 대한 감사인사만 적혀 있었다. 

"미흡한 글에 충고와 칭찬을 아끼지 않아주셨던 주OO 선생님, 감사드립니다. 저를 여기까지 이끌어주신 다른 선생들께도 감사드립니다. 항상 격려해주신 부모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이렇게나 부족한 오빠지만 항상 지켜봐 준 동생, 항상 미안했고, 항상 고마워."

또 자신의 독서편력을 서술한 '열여덟, 문형범의 독서편력'에서도 3년여에 걸친 서씨의 독서·논술지도는 빠져 있었다. 여기에는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던 아버지와 책 사는 데 돈을 아끼지 않았던 어머니, 많은 책을 만나게 해준 도서관, 체계적인 학습을 시켜준 논술·국어 교사 등만 언급돼 있을 뿐이다.

다만 문군은 자신의 책이 출간된 이후 서씨에게 건넨 책에 "많은 가르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책을) 쓰는 내내 가르침 잊지 않고 썼습니다, 잊지 않고 더 높은 곳을 보도록 하겠습니다"고 적었을 정도로 서씨의 지도에 큰 고마움을 나타냈다.

서씨는 "한 사회가, 한 출판사가 한 학생을 (공교육의) 영웅으로 만들었다"며 "사교육이 활성화된 조선시대에는 일반 (사교육의) 스승도 존경을 받았지만 지금은 공교육이 중심이다 보니 사교육 스승은 배제되는 것 같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는 최근 펴낸 장편소설 <유레굴루스>(아이올리브)에서도 이러한 현실을 우회적으로 암시했다.    

"(전국 독서왕 대회에서 우승하자) 내 이름을 모르는 학생은 없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내 이름보다 더 명성을 얻어가는 것은 담임선생님의 이름 세 글자였다. '이번 전국 독서왕 대회에서 유레굴루스에게 독서를 가르친 분이 '김OO 독서 선생님'이시라며.'

결국 죽 쑤어서 개 준 꼴이었다. 실제 나의 독서 선생님은 별마로 할아버지시다. 할아버지는 내게 필요한 책을 사주셨고, 갖고 계신 책을 빌려 주시며, '왜 이 책을 읽어야 하는지', '책은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독서토론은 어떻게 하는지'를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이어 서씨는 "사교육의 스승도 스승인데 우리 사회는 (전통적인) 스승과 제자 사이를 망가뜨리고 있지 않나 싶다"며 "지금은 스승이란 것도 없어지고 너무 이기적인 쪽으로만 발달해 아쉽고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는 "공교육이든 사교육이든 필요한 측면이 있다"며 "공교육에서 못한 것을 사교육에서 채울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문군 "그 분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못 왔을 것"

서씨와 문군의 관계를 잘 아는 한 인사도 "독서와 논술은 학교에서 배우는 과목이 아닌데도 학교와 출판사는 형범이가 홀로 독학해 영웅이 된 학생으로 만들었다"며 "아무것도 아닌 친구를 기초부터 가르쳐 튼튼한 재목으로 가르쳐 놓은 것을 학교 선생님이 생색을 다 내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지적했다.

그는 "형범이는 이미 우리나라의 모든 학생들에게 순수하게 학교공부에 열심인 정말 모범생으로 알려졌다"며 "왜 모두가 영웅이 되면 어렵게 혼자 독학해서 학교수업만 열심히 듣는 아이로 각색이 될까?"라고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문군은 7일 <오마이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서예일 선생님에게 많이 배웠고 그 가르침이 굉장히 많은 도움이 됐다"며 "그분이 없었다면 제가 여기까지 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서씨의 역할을 인정했다.

그는 "다만 책을 쓰는 동안 담임선생님이 집중적으로 저를 도와주셨기 때문에 그 분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며 "(그분의 역할에 대해선) 더 높은 곳에 가서 밝혀도 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서예일 선생님에게 배운 것이 인간의 사고를 다룬 글쓰기라는 점에서 그분은 공교육 스승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고 강조했다.

문형범군은 "많은 가르침 주셔서 감사드립니'라는 감사의 인사를 자필로 적어 자신의 저서인 <18세, 책에게 꿈을 묻다>를 서예일씨에게 건넸다.
 문형범군은 "많은 가르침 주셔서 감사드립니'라는 감사의 인사를 자필로 적어 자신의 저서인 <18세, 책에게 꿈을 묻다>를 서예일씨에게 건넸다.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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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수능성적 1등급을 받은 문군은 서울대 사회과학대에 지원할 예정이다.


태그:#문형범, #독서골든벨, #서예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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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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