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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밖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코끝이 시림을 느낀다. 최저 기온 -3°, 최고기온 6.3°. 오늘의 날씨란다. 입동이 언제였더라. 어느새 가을은 저만치 물러가 있고 겨울이 성큼 다가옴을 온몸으로 느낀다.

전보다 두꺼워진 옷의 무게로 양쪽 어깨가 무겁다. 옷은 두꺼워지고, 내 몸과 마음은 어디 하나 내보일 것이 없다. 전보다 많이 닫고, 감추고, 여미고, 닫고, 감추고 여미고……. 두꺼운 옷가지로 동여맨 몸에 마음마저 묶여버린 기분이다.

이런 내 몸과 마음이 싫어진다. 부단히 느끼고, 생각해서라도 꽁꽁 묶여버린 아니 꽝꽝 얼어버린 마음을 움직일 수만 있다면! 어느새 저만치 멀어진 가을을 아쉬워하며, 다가올 겨울은 좀 더 따듯한 마음으로 맞이하기 위해, 마음을 동(動)하러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여전한 그 모습에 감사하며- 덕성초등학교 방문기

사실, 이 여행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를 두고 많은 고민을 했다. '바로 어디론가 곧장' 가기는 싫었다. 그래서 생각난 곳이 바로 모교인 덕성초등학교! 얼어붙을 것 같은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선 어쩐지 이곳부터 들러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곳도 담이 없다.
▲ 청주 덕성초등학교 놀이터 이곳도 담이 없다.
ⓒ 이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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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먹으면 언제라도 힘들이지 않고 갈 수 있는 거리임에도 발을 끊은 지 오래인 것 같다. 오랜만에 찾은 모교엔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곳다운 풍경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학교에 들어서자마자 눈에 띄는 변화 한 가지. 간혹 버스를 타고 초등학교를 지날 때, 담을 허물고 있거나 이미 담을 허물어버린 학교를 본 적이 있는데 이곳도 담이 없다. 탁 트이고 생동감 있어 보이는 게 참 좋아보였다. 하지만 축구라도 하다가 공이 멀리 날아가면 그만한 낭패는 없겠지. 

예닐곱쯤 모여 야구를 하는 아이들의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연을 날리고 있는 부자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순간, 가을 하늘에 무작정 연을 날려 보냈던 예전 그 때가 떠올랐다. 여전히 그 곳 다운 모습에 예전 추억을 되새길 수 있음에 감사하리라. 조금은 훈훈한 마음에 용기 내어 본격적인 여행지로 출발하였다.

전통과 마음이 살아 숨 쉬는 곳, 문의문화재단지

여기 어딘가 내 소원이 담긴 돌도 올려져 있다.
▲ 단지 내 돌탑 여기 어딘가 내 소원이 담긴 돌도 올려져 있다.
ⓒ 이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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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찾은 곳은 중학생 시절 소풍 장소로 애용되던 문의문화재 단지. 충북 청원군 문의면 문산리에 위치한 문의문화재단지는 1997년 개장한 역사 교육장으로 청원군 향토문화유적, 선조의 삶과 지혜를 엿볼 수 있는 학습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매표소이자 입구인 양성문을 지나 먼저 내 눈에 들어온 건 여러 개의 돌탑이었다. 대체로 예쁘게 잘 정리된 모습이었지만 드문드문 정리가 덜 된, 아직 누군가의 소원을 기다리고 있는 미완성의 돌탑도 있었다.

발길을 옮기다 주막집에 다다랐다. 주막집 마루에는 짚을 꼬아 만든 소쿠리가 여러 개 놓여있었다. 호기심에 자리를 뜨지 못하고 그 근처를 기웃거리는데 주막집 안에, 앙 다문 입술로 새끼 꼬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보였다. 한참을 망설이다 용기를 냈다.

"할아버지, 죄송한데 사진 한 장 찍어도 될까요?"

막상 말을 건네고도 어찌할 바 모르고 있는 나에게 할아버지께서 의외의 말을 던지신다.

"그려, 그려. 늙은 몸인데 사진 한 방 찍히면 어때."

이내 터져 나오는 너털웃음. 사진을 찍고 있던 내게 할아버지께서 새끼 꼬기를 권하셨다. 곁눈질을 해가며 얼기설기 새끼를 꼬아 봤지만 모양은 자꾸 이상해져 갔다. 그럴 때마다 할아버지는 손을 맞잡아 바로 고쳐주셨다. 순간순간 느껴지던 할아버지의 따뜻한 손길. 할아버지의 손길이 따뜻하다고 느낀 이유는 비단 체온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맞잡은 두 손에서 오가는 마음과 마음, 바로 그것이었으리라.

새끼를 꼬는 얼마 되지 않는 시간동안 할아버지, 할머니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간간히 주막집 밖으로 웃음소리가 새어나가기도 했다. 물론 그 웃음소리엔 나도 포함돼 있었다. 낯선 사람, 그것도 한참 나이 차가 나는 사람과 함께 웃고 떠든 것이 몇 년 만이었는지. 어쩐지 이런 경험도 이곳이기에 가능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끼 꼬는 일을 마치고 할아버지, 할머니께 감사의 말을 전하고 문 밖을 나섰다.

이 할아버지께서 내게 새끼 꼬는 걸 가르쳐주셨다.
▲ 새끼를 꼬고 계신 할아버지, 할머니 이 할아버지께서 내게 새끼 꼬는 걸 가르쳐주셨다.
ⓒ 이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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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향한 곳은 민가와 양반가옥이었다. 노현리 민가는 문의면 노현리의 연안 이씨 괴정 이현승 참봉이 살던 가옥으로 1993년 손자인 이양훈씨에 의해 이전·복원되었다고 한다. 민가를 구경하던 중 마루에서 눈에 띄는 물건 하나를 발견! 그것은 다름 아닌 소화기였다.
옛것만 고스란히 간직돼 있는 줄 알았는데. 드라마 속 옥에 티를 찾아내기라도 한 듯했다.

양반가옥은 중부지방의 양반이 살았던 옛 가옥을 재현한 것으로 양반가 중에서도 문벌이 높은 사대부가옥에 가까운 건축구조라 한다. 민가의 경우 하나의 문으로 구성된 반면 양반가옥은 대문 말고도 여러 개의 문이 연결돼 있었다. 

충북 유형문화재 제 220호로 등록되어 있다.
▲ 노현리 민가 충북 유형문화재 제 220호로 등록되어 있다.
ⓒ 이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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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가옥이라 그런지 민가보다 여러 채로 구성돼 있었다.
▲ 양반 가옥 양반가옥이라 그런지 민가보다 여러 채로 구성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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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안 곳곳에 있는 조형물들을 지나 여막으로 향했다. 여막은 묘소 또는 궤연(혼백이나 신주를 모셔두는 곳) 가까이에 지어놓고, 상주가 3년 간 탈상(脫喪)할 때까지 거처하는 곳이라 한다. 신세대들에게 경로효친사상을 일깨워주고자 건립된 여막 안에는 전통 상례 및 제례절차안내문과 관련사진, 제사상, 상제 모형 등을 전시하고 있다.

친절하게 쓰여 있는 안내판을 읽고 만반의 준비까지 하고 들어갔지만 그 곳에 한발 들어서기 무섭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닌가.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보니 상복을 입은 모형이었다. 순간 어찌나 놀랐던지.

제사상, 상제 모형 등이 전시되어 있다.
▲ 여막의 내부 제사상, 상제 모형 등이 전시되어 있다.
ⓒ 이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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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막 구경을 마치고 나서는데 한 부부가 그곳에 뒤 따랐다. 이내 들려오는 ‘꺄’ 하는 외마디 비명. 순간, 웃음이 나온 건 왜인지. 

어느새 달이 뜨고 있었다.
▲ 오후 4시 20분경 올려다 본 하늘 어느새 달이 뜨고 있었다.
ⓒ 이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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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경을 마치고 돌아가는데 성벽이 눈에 들어왔다.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신라 자비왕 17년에 축성한 것이라 하는데 적당한 어두워진 날씨와 어울려 무척 예뻐 보였다.

난 이 성벽이 참 마음에 들었다.
▲ 단지 내 성벽 난 이 성벽이 참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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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가까운 곳에서 숨 쉬는 법- 대청호

문의문화재단지를 뒤로 하고 찾은 곳은 근방에 위치한 대청호. 대청호는 1980년에 건설된 대청댐이 탄생시킨 남한에서 세 번째로 큰 규모의 인공호수다. 금강을 가로막아 만든 이 호수의 명칭은 인근 대도시인 대전(大田)과 청주(淸州)에서 한 글자씩 따온 것이라 한다.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대청호의 모습이다,
▲ 대청호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대청호의 모습이다,
ⓒ 이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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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에 서서 대청호를 바라보고 있는데 서른 너댓쯤 돼 보이는 여인들 간의 대화가 귓전을 스친다.

“그래도 숨통이 트이지?”
“그래. 좀 살 것 같다.” 

그리고 그 옆을 지키고 서 있는 꼬마의 물음.

“엄마. 즐거운 여행이지?”

무슨 대답이 필요하랴. 웃는 얼굴로 화답하는 여인의 모습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도시 가까이에 있어 언제라도 찾을 수 있는 곳. 삶에 지친 사람들이 부담 없이 쉬어갈 수 있는 곳. 대청호는 사람들에게 그런 곳이었다.

어린 시절 지극히 평범하다고 느꼈던 곳, 세월이 지나 오히려 특별함이 느껴지는 이곳에서, 지금은 평범하게 살고 있지만 시간이 흐른 뒤 자신만의 개성과 능력으로 각자 특별한 삶을 살아갈 우리들의 모습이 그려지는 것만 같았다.

고대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세상은 한 권의 책과 같다. 여행하지 않는 사람은 단지 한 페이지만을 읽은 것과 같다"고 했다. 마음을 동(動)하러 떠난 나의 여행은 이렇게 세상의 한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태그:#청주 덕성초등학교, #문의문화재단지, #대청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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