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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주최 '제2회 전국 대학생 기자상 공모전' 응모기사입니다. 장일호 시민기자는 명지대학교 정치외교학과 2학년에 재학중입니다. <편집자주>

서울지역에 첫 눈이 내렸다. 첫 눈 오는 소식을 알리는 손전화 메시지를 보며 들뜬 마음도 잠시, 임시로 지은 판잣집에서 밤을 맞이하고 있을 한 가족을 떠올렸다. 서울 용산구 용산동5가 19번지. '타워팰리스를 능가하는 최고급 주상복합 아파트'를 목표로 한 파크타워 공사장 맞은편에는 '주거생존권'을 요구하며 4년째 외롭게 싸우고 있는 한 가족이 살고 있다. 어머니 이영희(41)씨와 자녀 박재형(10), 박건형(9)이 그들이다. 평당 분양가 2000만 원을 상회하는 파크타워에 이씨 가족의 자리는 없다.

 

지난 17일과 18일. 이틀에 걸쳐 아이들의 공부방 선생님들과 함께, 영희씨네 가족이 살고 있는 판잣집을 방문했다. 합판으로 지은 집안으로 들어서자 나무냄새에 코가 매웠다. 도로 바로 옆에 위치해 차 지나다니는 소리가 무척이나 시끄러웠다. 눈감고 누우면 몸 위로 차가 지나가는 것 같은 굉음이 이어졌다. 촛불을 밝힌 굴 속 같은 공간에 오도카니 앉아, 방에 없는 아이들을 생각했다.

 

가만히 앉아있는 것 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두운 방 안. 타 지역 철거민 투쟁에 참여하러 간 엄마. 축구하러 나갔다는 형제를 기다리며, 그 아이들이 어두워질 때까지 뛰어 놀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촌역 1번 출구로 나와 조금만 걷다 보면 만날 수 있는 영희씨의 '집'. 얼마 전까지 이 판잣집을 대신해주었던 봉고차는 시동을 걸어 급한 전기를 연결해 쓸 수 있기 위해 언제나 집 바로 앞에 주차되어 있다.

 

집안과 주변을 둘러보는 사이 영희씨가 도착했고, 곧이어 아이들이 가쁜 숨을 내쉬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여느 또래 아이들처럼 축구를 좋아하는 개구쟁이 형제는 오늘 자기가 몇 골을 넣었노라며 자랑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발갛게 상기된 볼이 무척 귀여웠다.

 

"엄마 여기 진짜 집 같아. 너무 좋다"

 

철거투쟁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물었다. 두서없는 물음에도 척하면 척 알아들으시고, 묻지 않는 말도 헤아려 답해주시는 모습에서 지난 세월의 흔적을 읽는다. 4년. 그 오래된 투쟁기간을 더듬으며, 새삼 놀랐다.

 

파크타워 공사장 앞 공원 안에 있던 천막에서 쫓겨날 때의 상황을 물었다.

 

"용역이 왔고. 뭐 경찰은... 물론 저항했죠. 때리고 이러는 건 너무 비일비재한 일이라 말하기도 귀찮네(웃음). 애들도 엄마가 맞는 거 다 봤어요. 얼마나 많이 맞았는지 몰라."

 

 지난 초여름 이영희씨 가족은 몸도 제대로 펼 수 없는 봉고차에서, 그 찜통같았던 더위를 견뎠다.

영희씨는 자신이 착하게 보이지만, 사실은 악바리라 말하며 웃는다. 그 천막이 철거된 때가 지난 3월, 이후 7개월 가까운 시간 동안 봉고차 안에서 생활했다. 몸을 제대로 펼 수 없을 만큼 좁고 불편한 생활이었다. 기온까지 뚝 떨어지자 보다 못한 '동지'들이 힘을 모았다. 목수일과 막노동 등에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 제 일처럼 나서자 새 보금자리가 하루만에 뚝딱 지어졌다. 그렇게 지난 15일, 새 판잣집이 지어지던 날 밤, 막내 건형이는 "엄마 여기 진짜 집 같아. 너무 좋다"며 한참을 뛰어다녔다고 했다.

 

 기존에 천막을 지었던 공간인 공원에서 영희씨 가족을 내쫓으면서, 공원 주변으로 펜스를 둘러 아예 주민 모두를 출입금지 시켰다. 도로가 인접하여 위험한데다, 펜스 때문에 한사람이 걷기에도 매우 좁은 길이 되었다. 구청에 문의하자 "거긴 원래 좁았고 별다른 민원은 없었다"고 대답했다.

용산동5가 주민이 되다

 

거리로 나앉게 된 사람들의 사연은 비슷하다. 아주 잠시 중심을 잡지 못했을 뿐인데, 때로 삶은 그 '잠깐'을 기다려주지 못한다. 평범하고도 단란했던 삶은 가속도를 타고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바닥은, 삶을 기다렸다는 듯이 끌어내린다.

 

넉넉하진 않았지만, 가난하지도 않았다. 활동적인 성격 탓에 오래 일손을 놓지 못했다. 경력을 바탕으로 시작한 디자인・인쇄 사업으로 재미를 본 것도 잠시, 거래처의 부도로 영희씨 사업도 함께 무너졌다. 연년생 어린 아들 둘을 앞뒤로 업고 각종 은행들을 돌며 울기도 많이 울었단다.

 

당장 전세금을 빼야했고, 남은 돈 500만 원으로 얻을 만한 집을 구하던 중, "재개발 말 나오고도 10년 살았어. 개발 되려면 멀었다"던 친구의 소개로 2004년 3월, 용산동5가 19번지로 들어오게 됐다. 야트막한 산에 다닥다닥 붙어있던 집들, 그 중 영희씨가 살게 된 집은 대문을 열면 여섯 집이 옹기종기 붙어 있던, 푸세식 공동 화장실을 쓰는 곳이었다. 평소 말이 없고 무뚝뚝하던 남편이 더 과묵해지고, 가정을 겉돌던 것도 그 때쯤이었다. '집안 말아먹은' 아내는 그 어떤 말도 남편에게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웃었다. "세상에 이런 복부인도 있나요?"

 

"사람들이 나보고 복부인이래요. 세상에 이런 복부인도 있나요?"

 

영희씨는 허허로운 웃음을 웃으며 내게 되물었다. 나는 퍼뜩 그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복부인이요?" 되물었다. 복부인은 부동산 투기로 큰 이익을 꾀하는 부인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란다.

 

그 해 초여름. 영희씨네가 용산동5가에 입주한지 두 달 만에 시작된 철거. 사람들은 영희 씨의 투쟁을 부동산 투기, 혹은 터무니없는 보상금을 노리는 것으로 매도했다. 그는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고도 남았을 거라며, 그 마음을 이해한다고 말했다.

 

"오래 투쟁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정말 투기목적으로 들어오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 하니까 저처럼 선의의 피해자가 생기는 거죠(웃음). 그런데 상식적으로 생각해봐요. 어느 복부인이 개발보상금 좀 더 받겠다고 길바닥에 4년을 앉아있겠어요."

 

세 식구가 몸을 뉘이면 꼭 맞을 만한 크기의 판잣집을 둘러본다. 투기의 목적만으로 이런 삶을 지속할 수 있을까?

 

 4년째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는 이영희씨와 막내 건형이

 

 연년생 말썽꾸러기 형제는 여느 남자 아이들처럼 씩씩하고 밝다. 왼쪽이 동생 건형이(9), 오른쪽이 형 재형이(10)

제일 힘들었던 기억을 물었는데 씩씩한 답변이 돌아온다.

 

"아이가 학습부적응자로 분류될 수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요. 저도 아이들 교육에 관심 많은 보통 엄마에요. 수영과 태권도, 공부방 등 여러 군데서 도움을 받고 있는데, 부끄러워하지 않고 받을 수 있는 만큼 받을 거예요. 그래야 우리 아이들도 나중에 도움 줄 수 있는 사람이 된다고 생각해요."

 

역사책을 좋아하는 재형이와, 수학을 특히 잘하는 건형이는 엄마가 살아가는 이유이자 목적이다. 예상되듯, 아이들의 교육비와 생활비는 최저생계비로 충당하고 지금은 떨어져 사는 남편이 비정기적으로 보내주는 돈도 큰 도움이 된다. 남편은 아내의 긴 싸움에 대해 그렇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지원하고 있었다.

 

 언제 철거가 될지 모르는 집이기에 중요한 물건들은 방 안에 둘 수 없다. 학용품 등을 빼앗겨 본 경험이 있는 재형이는 "읽고난 책은 차에 가져다 둔다"고 했다. 집 앞에 서 있는 봉고차 안의 풍경.

"정부가 국민을 상대로 집장사 한다"

 

세입자들에겐 주거이전비(4인 가족 기준 700여 만원)와 공공임대아파트 입주권이 주어지지만, 주거기간이 짧았던 영희씨 가족에겐 임대주택도, 이주보상금도 약속되지 않았다. 당장 갈 곳 없었던 그가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을 결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무엇보다 영희 씨가 바라는 것은 '현실적인 임대아파트'였다.

 

"작은 평수가 드문 현재의 임대 아파트는 실제 어려운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하는 장소에요."

 

터무니없이 비싼 관리비 또한 월세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 영희 씨의 생각이다. 투쟁을 하면서 가장 뼈저리게 와 닿았던 건 '정부가 국민을 상대로 집장사 한다'는 느낌이었다고 한다.


"국민이 잘 살아야 나라가 잘 사는 것 아닌가요. 잘사는 사람 1%를 위해서 99%가 희생하는 지금 구조의 사회는 오래가지 못해요. 잘사는 사람이 돈 많이 갖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가난한 사람도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수준을 높여야죠. 그러려면 주거권은 반드시 보장되어야 합니다." 

 

함께 동행했던 신희철(31) '파랑새 공부방' 교장선생님은 긴 한숨을 지었다. "사람들은 삐까뻔쩍한 건물이 생기면, 전에 살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생각 안 해요. 와, 개발 잘했다 이러지."

 

 용산 구청 앞의 펼침막. "법대로"를 이야기하는 구청은 성의있는 협상 테이블 한 번 제대로 마련하지 않았다. 주민과 성의있는 대화를 하라는 내용은 법에 없어서 일까?

 

주민 요구조차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는 용산구청

 

용산구청의 입장은 어떨까. 도시정비과 김진철씨는 "지금도 본인이 원하면 주거이전비도, 임대주택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 사람들, 보상 더 받으려 하는 것이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그 '혜택'들이 영희씨에게도 해당되는지 여부를 묻자 "그건 알아봐야 한다"고 어물거렸다. 4년이나 시위를 해온 주민의 거주기간이나 요구조차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영희씨는 구청 쪽에서 "한 번도 성의있는 입장 표명을 하거나 논의를 위한 협상테이블을 만들지 않았다"고 얘기했다. 구청은 그저 "무조건 이주해야한다, 법적으로 하라"는 말만 습관적으로 되풀이하고 있었다. 

 

영희씨의 입장은 단호하다. 4년을 버텼는데 더 못 버틸 이유가 없다는 입장이었다.

 

"난 당연히 이겨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길 거라고 믿어요. 없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이런 거 밖에 없는데, 사람들이 (투쟁을) 조금 하다 포기하니까 세상이 안 변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무엇보다 엄마의 큰 힘은 변함없는 내 편, 아이들이다. "물론 갈 곳 없어 시작했고, 멋모르고 시작한 투쟁이지만, 아이들한테 포기하는 모습 보여주지 말자...이게 제일 커요."

 

 용산파크타운 공사현장. '주거권'을 요구하며 4년 째 투쟁하는 가족 앞에 새용산, 희망찬 등의 단어는 낯설기만 하다.

판잣집을 나서면 바로 보이는 공사장 벽에는 '아름다운 변화의 중심에 있는 용산! 우리는 용산에서 희망찬 미래를 만납니다' 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그 앞에 놓여진 목숨 건 투쟁의 삶. 희망찬 미래라는 단어가 무척이나 옹색해 보였다.


적당히 타협하며 살지 않겠다는 용기 있는 삶의 모습. 그것을 바라보는 일은 어렵고 부끄러웠다. 혹 우리는 우리가 갖지 못한 그 고집과 삶의 의지를 질투하기 때문에 쉽게 '보상금'을 운운하며 비난하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주말 지나고 맞는 월요일 아침이 제일 불안해요. 주말이 그래도 제일 마음이 편해"라고 말하며, "난 전쟁나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다"며 웃음으로 일행을 배웅하는 영희씨의 표정은 밝았다. 용산의 '희망찬 미래'는, 바로 이 얼굴에서 찾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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