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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심장에서 조선의 독립을 외치다

 

2005년 2월 해방 60년 만에 국가보훈처에서는 몽양 여운형(1886~1947)에 대해서 독립유공자로 인정했지만, 등급은 2등급으로 발표되었습니다. 당시에 심사위원장을 맡은 신용하 한양대 석좌교수는 “(일반적인) 애국지사들에 대해서는 심사위원들이 (훈격을) 후하게 드리려고 하는데 여운형 선생의 경우는 관심이 집중돼 있고 포상 자체를 반대하는 여론도 많아 너그럽게 하지 못하고 엄격히 규정에 따라 무기명 투표를 통해 결정했다”고 설명했습니다.

 

독립을 위해서 평생을 바친 인물에 대해서 등급을 매기는 것도 우습지만, 몽양 여운형과 같은 인물이 2등급으로 구분되었다는 것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일본 제국주의 세력도 감히 함부로 하지 못했던 조선의 양심이었으며, [조선중앙일보]의 사장으로 민족과 민중의 편에서 활약하였고, 해방 이후 건국준비위원회를 통해서 혼란한 정국을 수습하기 위해서 노력한 여운형에 대해서 우리는 상당히 많은 부분을 외면하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몽양에 대해서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가 식민지 시절에 친일 행각을 했으며, 해방 이후에는 좌익계열에 서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러한 비판을 하는 사람들 자체가 일본의 식민정책에 음으로 양으로 도움을 준 사람들이고, 해방이후에는 한민당과 이승만 세력에 붙어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몽양을 공격했던 것입니다.

 

임시정부와는 다른 길을 걷겠다

 

1919년 3월 12일 밤, 중국 상해 프랑스 조계에 있는 한 허름한 셋집에 30여명의 청장년들이 조선독립에 관한 토론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토의에 대한 주된 내용은 임시정부의 조직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이들의 토론 과정 중에서 임시정부의 수반을 누구로 할 것인냐에 대한 문제에서 이승만이 정부 수반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습니다. 이에 대해서 신채호는 ‘이승만은 나라가 독립도 하기 전에 미국의 위임통치를 진정한 매국노’라고 주장하며 반대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수는 이승만을 지지했고 신채호는 퇴장하고 그들과 뜻을 같이 하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다음으로 조선왕가에 대한 처우 문제에 있어서도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표결까지 간 상황에서 조선왕가에 대한 우대론이 다수를 차지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제정한 헌법 제8조에는 대한민국은 황실을 우대한다고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이 황실우대론이 통과되자 여운형은 임시정부의 어떤 자리에도 앉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몽양 여운형은 독자적으로 민간외교를 전개했습니다. 일본의 정부는 상해에 모인 사람들 중에서 임시정부의 직위는 갖지 않았지만 신망이 높고 외국인과 교제가 높은 여운형을 회유하기 위하여 상당히 노력했습니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 일본은 여운형에게 조선 통치에 관한 의견을 교환하자고 제의하면서 신변의 안전과 자유활동을 보장하겠다는 약속까지 하면서 동경으로 초대하기도 했습니다.

 

일본의 심장에서 조선의 독립을 외치다

 

여운형의 일본행에 대해서 찬반 양론이 대두되었는데, 이동휘 같은 노장파는 반대하고 나섰지만 안창호와 이광수 등은 여운형의 동경행을 적극적으로 찬성했습니다. 고심 끝에 여운형은 결국 동경행을 선택하였습니다.

 

동경에 도착한 여운형은, 1919년 12월 17일 동경 제국호텔에 모인 5백여 명 내외의 신문기자와 각계각층 인사들 앞에서 여운형은 조선 독립에 관한 일대 연설을 하였다. 여운형은 적국 일본의 수도에서 조선독립의 절대적 필요성과 그 의의를 당당히 주장하였습니다.

 

“우리 민족이 생명을 걸고 주야 분투하는 한국 독립운동의 진상과 그 의의를 밝히려고 나는 이곳에 왔다. 지금 이 자리를 빌어 그것을 말하게 된 것을 기쁘게 그리고 감사히 생각한다.... 일본에게 생존권이 있다면 똑같이 우리 조선 민족에게도 생존권이 있을 것이다. 일본은 이같은 천리를 역행하고 있다. 왜 일본은 생존권의 자연적 발로로서 자유와 독립을 갈망하는 조선인들을 총검으로 위협하여 탄압하고 있는가. 한일합병은 순전히 일본의 이익만을 위해 강제된 치욕적 유물이다. 일본은 자신을 수호하고 상호 안전을 위해서 부득이 합병을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지만 러시아가 물러난 오늘날에 있어서도 그러한 궤변을 고집할 수 있는가.”

 

동경의 각 신문은 여운형의 연설의 전문을 게재했고, 전 세계의 눈과 귀가 동경으로 쏠렸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일본 국회와 정계는 발칵 뒤집혔습니다. 일본 정부는 한국 문제를 논의하기 전에 여운형에게 일본의 발전상을 보여주면서 조선 독립은 비현실적이고 자신들에게 협조할 것을 유혹했지만 여운형의 대답은 “내가 수행할 사업은 우리나라 자유 독립을 위한 투쟁 뿐 그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단호하게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동경에서의 체류 당시에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때론 회유로, 때론 협박으로 여운형의 마음을 돌이키려고 노력했지만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당시 조선 총독부 정무총감으로 있던 미즈노(水野)와의 대면 당시에 미즈노가 “그대는 조선을 독립시킬 자신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여운형은 그의 말이 끝나기 전에 “그대는 조선을 통치할 자신이 있느냐”고 되물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이렇듯 일본 제국주의자들 앞에서 당당한 모습으로 일관하고, 일본의 고위 인사들과 많은 접촉을 하였기 때문에 차후에 조선총독부는 여운형의 존재에 대해서 함부로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조선총독부의 배려(?)가 해방 후에 여운형이 무언가 일본 정부에 협조한 것이 아니냐는 모함을 받기도 한 것입니다.

 

몽양은 임시정부의 직위는 거절했지만 나름대로 독자적인 외교활동을 통해서 조선의 독립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세계 만방에 널리 알리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레닌, 손문, 그리고 세계 열강의 유력한 인사들과의 접촉은 오히려 ‘외교론’의 핵심에 있었던 이승만보다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승만이 주로 미국을 상대로 외교를 펼쳤지만 매번 찬밥 신세였던 것을 생각해보면 여운형의 외교가 얼마나 효과가 있었는지를 알수 있을 것입니다.

 

[조선중앙일보]와 일장기말살사건

 

여운형은 조선에서 1933년에 [조선중앙일보] 사장으로 취임하였습니다. 우리가 절대로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은 여운형이 운영한 [조선중앙일보]는 오늘날 조선일보나 중앙일보와는 전혀 성격이 다르고 활동 자체도 달랐다는 사실입니다.

 

[조선중앙일보]는 그야말로 조선의 독립을 위해 옳은 말을 하는 민족의 양심이었습니다. 그가 채용한 사람들 중에는 독립운동을 함께 했던 동지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민중을 위하는 이 신문은 변절한 친일 거두들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폭로하였습니다.

 

조선총독부로서는 눈엣 가시의 존재였던 [조선중앙일보]가 1937년 베를린 올림픽 당시에 마라톤에서 우승을 차지한 손기정 선수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삭제하고 게재하는 소위 ‘일장기말살사건’을 일으키자 기다렸다는 듯이 관계자들을 소환했고, 사장을 바꾸면 속간시켜주겠다는 통보를 했습니다. 그러나 주주들은 “이는 종래 지켜온 [조선중앙일보] 정신에 위배되는 일이므로 차라리 옥쇄주의에 따라 회사를 해산한다”고 폐간을 선언하습니다. 이리하여 4년여에 걸친 몽양의 [조선중앙일보]의 사장 생활은 신문의 운명과 함께 막을 내렸습니다.

 

어떠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오로지 민중의 편을 들었고, 조선의 독립을 위해 노력한 [조선중앙일보]는 우리나라 언론의 양심이 어때야 하는지를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건국동맹... 건국준비위원회와 몽양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고 일본의 광적인 모습이 극에 달했을 무렵, 몽양은 일본 제국주의의 운명이 그리 멀지 않았음을 직감하고 ‘건국동맹’이라는 지하조직을 만들었습니다. 일본은 조선에서 몽양의 영향력이 상당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그를 회유해서 친일행각을 하게 만들고 자신들에게 협조하도록 시도했지만 몽양을 끝내 굴복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이러한 몽양의 태도와 일본의 반응에 대해서 [여운형 평전]을 쓴 이기형 씨는 TV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신사참배를 거절하고 또는 그 창씨 개명을 직접 거절했을 때, 형사가 그 뒤를 쫓아가지고 뭔가 트집을 잡아가지고 그 사람을 납아넣을 수 있어요. 그런데 몽양 앞에서는 감이 그걸 못해요. 그거는 뭐냐하면 몽양이 원체 거물이기 때문에 이 사람을 함부로 다뤄가지고 신문에 나봤자, 자기네 이득이 전혀 없다는 걸 알아요. 오히려 몽양의 인기가 올라갈 뿐이라는 걸 자기들이 알기 때문에 그것을 감히 말 못해요.”

 

1945년 8월 15일 조선이 해방되자 몽양은 재빠르게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여 혼란한 정국을 수습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익의 거두인 고하 송진우는 몽양과 손을 잡기를 거절하고 ‘임시정부 추대’라는 명분을 내세웠습니다. 당시 우익은 그 이전까지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별다르게 한 일이 없기 때문에 몽양과 손을 잡았다가는 모든 주도권을 몽양에게 넘겨줄 것이라고 판단하였을 것입니다. 따라서 건국준비위원회는 좌익의 세력이 상당히 잠식하게 되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몽양은 좌익분자가 아니라 민족주의자였다.

 

8ㆍ15 후 여운형의 정치활동의 변화과정을 살펴볼 때 그가 ‘진보적 민주주의’ 성향이 있어 당시 친일파와 극우세력을 대변하고 있던 이승만 및 한민당과 노선이 같을 수는 없었으나, 그렇다고 여운형을 한민당 계열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이 공산주의적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몽양과 가깝게 지낸 미군정의 인사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몽양에게 있어서 좌익이냐 우익이냐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는 오로지 조선의 완전한 독립이 그의 목표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돌아가더라도 조선이 정치적으로 성숙하게 되는 과정인 ‘신탁통치’를 찬성했습니다.

 

그러나 국민의 정서상 더 이상 다른 어떤 존재로부터 지배받지 않겠다는 심정을 재빠르게 간파한 한민당과 이승만은 국민적인 지지를 얻고자 반탁 운동을 벌였습니다. 한마디로 반탁운동은 8ㆍ15 이후 약세에 몰려있던 우익이 세력을 만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것입니다.

 

미군정의 고위직을 보낸 윌리엄 R. 랭던은 몽양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습니다.

 

“몽양이 비명에 숨졌을 때 나의 기억에 남아 있는 그의 모든 말과 행동을 종합하고 분석함으로써 내가 도달한 결론은 몽양이 개인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소련보다는 미국과 더 가까웠지만 정치적으로는 이들 양국에 대하여 절대적으로 중립이었으며 그가 갖고 있던 유일한 목적은 미소 양국으로 하여금 가급적 빨리 한국으로부터 물러가게 하는 일이었다.”

 

잊혀져버린, 그러나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우리의 지도자

 

몽양 여운형은 남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하려는 세력에 의해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시절, 일본조차도 감히 함부로 하지 못했던 몽양이 같은 민족의 손에 죽음을 당한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이렇듯 위대한 지도자를 허무하게 죽음으로 보내버렸습니다. 그의 묘소는 가매장 처리되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그의 동생 여운홍은 아래와 같이 설명했습니다.

 

“형님의 장례는 임시로 가장을 했다. 남북통일이 이루어지고 양쪽에 흩어져있는 가족과 동지들이 함께 모여 또 한 번 장사를 지내기 위하여 관을 철로 만들고 관 속에 방부제를 많이 넣어서 30년간은 방부할 수 있도록 해두었다. 그리고 가매장이었으므로 치산을 영구적으로 하지 않았고 비석이나 그밖의 기념물도 세우지 않아 묘소에 가보면 퍽 황량하게 느껴진다. 하루속히 이 땅이 통일되어 내가 죽기 전에 다시 한번 형님의 얼굴을 보고 완전한 장사를 지내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그러나 그의 동생 여운홍 역시 조국 통일을 보지 못하고 1973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제 그의 동생 여운홍이 이루지 못한 꿈을 우리가 이어받아야 할 것입니다.

 

“몽양 여운형은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암살당했다. 단독정부를 수립하려 했던 세력들에게 좌우합작과 남북통일을 위해 노력했던 몽양 여운형은 없어져야 할 존재였다. 총탄이 관통한 흔적과 핏자국이 확연한 몽양의 속옷, 저격범의 총탄은 한평생 조국 독립을 위해 피 끓었던 심장의 박동을 멈춰버렸다... 몽양의 시신은 포르말린으로 방부처리되어 철제관에 넣어졌다. 몽양의 염원처럼 통일된 조국에서 다시 장례를 치르기 위해서였다... 몽양 여운형. 그는 잊혀질수 없는 지도자다.”[KBS 다큐멘터리, ‘잊혀진 지도자 몽양 여운형’ 중에서...]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미디어다음, U포터뉴스, 뉴스큐, 개인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몽양, #여운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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