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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곡사에서 명효릉(明孝陵)으로 이동하는데 비가 오고 있다. 가랑비보다는 조금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다. 빗속에 왕릉을 산책하는 셈이 되었다. 안개가 자욱하여 수목 사이로 보이는 건축물들이 흐릿하다. 바람에 떨어진 나뭇잎을 밟으며 걷자니 아직 한여름인데 벌써 가을이 성큼 다가온 느낌이다.

빗속에 왕릉을 산책하자니 한여름인데 가을 같은 분위기가 났다.
 빗속에 왕릉을 산책하자니 한여름인데 가을 같은 분위기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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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명효릉은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의 무덤이다. 주원장은 안휘성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전염병과 기근으로 17세에 부모형제를 잃고 한때 떠돌이 중으로 유랑생활을 하다가, 홍건군에 가담하여 눈부신 무공을 세우고 중국 황제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달리 말하면 떠돌이 중에서 황극의 자리까지 오른 인생역전의 주인공이 바로 주원장이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지 않음을 보여준 인물이다. 흔히 명태조라고도 하며, 재위 기간의 연호는 홍무제(洪武帝)였다.

명효릉은 1381년에 건축하기 시작하여 1398년에 주원장이 이곳에 묻히고 난 뒤 1413년에야 비로소 완공이 되었으니 수십 년에 걸쳐 만들어진 능이다. 명효릉은 규모 면에서도 세계적으로 손꼽을 정도로 방대하다고 한다. 명의 왕릉이 모두 북경에 있는 반면 유일하게 남경에 남아 있는 능이다. 명 효릉은 2003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항간에 떠도는 말로, 주원장이 죽은 후에 남경의 13개의 성문에서 주원장의 관이 동시에 나와 매장되었기 때문에 과연 이곳 종산에 주원장이 묻혔는지 의심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주원장의 능묘가 조천궁의 삼청전(三淸殿) 아래에 있다고 하는 설도 있고, 황성의 만세산(万岁山) 아래에 있다고 하는 설도 있었으나 이곳 명효릉의 지하에 주원장과 그의 황후 마씨가 함께 묻힌 것이 틀림없다고 한다.

왕릉에는 문무방문(文武方門), 비전(碑殿), 향전(享殿), 내홍문(內紅門), 승선교(升仙橋), 명루(明樓), 보정(宝頂)이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고 그 좌우로 동서정정(東西井亭), 어주(御廚), 구복전(具服殿), 동서비전(東西妃殿)등 주요 건축물이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서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것은 문무방문(文武方門)이다. 여기에 특별고시비(特別告示碑)가 있는데 이색적이다. 일어, 독일어, 이태리어,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 등 6개국의 언어로 쓰여져 있는 이 비는 명효릉을 보호하자는 취지의 내용이 쓰여져 있다. 1909년에 작성한 것이다.

청나라 강희제의 어필이다.
 청나라 강희제의 어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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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강희제 때 만들어진 비전(碑殿)에는 1699년에 어필로 쓴 ‘치융당송(治隆唐宋)’이라는 네 글자가 또렷하게 보인다. 명태조의 치적이 당송시대만큼 융성하였다는 뜻이다. 이곳을 지나면 또 하나의 전각이 있는데 향전(享殿)이다. 효릉전이라고도 한다. 이곳에는 주원장과 그의 부인 마황후와 소실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주원장은 고금의 여느 임금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여인을 가까이 두어 26명의 아들과 16명의 딸을 얻었지만 유독 마황후를 총애하였다고 한다. 마황후는 곽자흥의 수양딸이었다. 곽자흥은 홍건군(紅巾軍)의 장수로, 주원장이 곽자흥의 군문에 참가하여 무공을 세우게 되고, 곽자흥과의 이 같은 인연으로 마씨를 부인으로 맞이하기까지 하였다.

마씨는 마음씨가 착하고 인자하고 예의 바른 여성으로 알려져 있다. 이른바 현모양처형인 마씨 부인에게도 단 하나 흠이 있다면 그것은 발이 크다는 것이었다. 마씨 부인의 큰 발과 관련된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전하고 있다. 마씨 부인은,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전쟁터에서 많은 생애를 보낸 생부 덕분에 전족을 할 수 있는 가정형편이 되지 못하여 여느 여인들보다 발이 훨씬 컸다고 한다. 나중에 황후가 된 뒤에, 마황후의 발을 크게 그렸다고 하여 명태조의 노여움을 사서 그림을 그린 화사(畵師)뿐만 아니라 그림을 보고 웃은 사람조차도 죽임을 당하였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명효릉은 전쟁으로 대다수가 파괴되었다. 그나마 온전하게 남아 있는 용과 봉황이 새겨진 석주로 영화로웠던 당시를 회상하게 한다.
 명효릉은 전쟁으로 대다수가 파괴되었다. 그나마 온전하게 남아 있는 용과 봉황이 새겨진 석주로 영화로웠던 당시를 회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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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실 주원장이 마황후의 발을 커다랗게 그렸다고 하여 화사를 처형한 사건은, 마황후를 몹시 사랑한 증표라기 보다는 비천한 출신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던 주원장의 심리 표출이라 여겨진다. 그 당시에 일어난 필화(筆禍) 사건이 다른 예가 될 것이다.

주원장은 한때 중이 되었던 것과 홍건적에 가담하였던 사실을 부끄럽게 여겨서 공식문서에 ‘승(僧), ‘독(禿)’과 ‘적(賊)’ 등의 글자를 쓰는 것을 금지했을 뿐만 아니라 ‘승(僧)’과 발음이 비슷한 ‘생(生)’, ‘적(賊)’과 발음이 비슷한 ‘칙(則)’도 쓰지 못하게 하였다. 그래서 “예성생지(睿性生知)”, “의칙천하(仪则天下)” 등의 글귀를 써서 처형되었다는 믿기 어려운 사건들이 부기기수였다고 한다.

주원장에 대하여 역사가들은, 강력한 전제정치를 통하여 민생을 안정시켰다고 하는 반면 개국공신마저 잔인하게 숙청한 공포정치를 실시하였다고 엇갈리는 평가를 하고 있다. 그래서 주원장의 초상화는 온화하고 인자한 모습으로 그려진 것과 뽀족한 턱과 부리부리한 눈매로 몹시 포악하게 보이는 두 종류가 전하고 있다.

명대 무늬가 새겨진 돌난간과 용과 봉황이 새겨진 석주가 남아 있다.
 명대 무늬가 새겨진 돌난간과 용과 봉황이 새겨진 석주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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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보이는 향전은 청나라 때 전란으로 소실되어 동치 연간(1862~1874)에 다시 보수한 것이다. 지금도 주춧돌 56개는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한다. 향전 앞에는 명대의 무늬가 새겨진 돌난간과 용과 봉황이 새겨진 석주가 상당히 많이 훼손된 채 불구의 형상으로 남아 있다. 많이 훼손되었음에도 당시 얼마나 화려하고 풍격이 있었는지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향전 북쪽의 내홍문(內紅門)을 지나 명루(明樓)까지 쭉 뻗은 길에는 양쪽에서 마치 호위라도 하듯 울창한 수목이 늘어서 있었다. 똑똑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와 함께 수풀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 높은 나무에서 콕콕 찍어대듯 우는 새소리가 듣기 좋았다. 짙은 운무 속의 왕릉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진풍경이라 신비하기까지 하였다.

사방에 쌓아 올린 성벽과 명루.
 사방에 쌓아 올린 성벽과 명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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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효릉에서 가장 끝에 있는 명루에 올랐다. 네모난 성벽 위에 있는 건축물이 명루라고 하는데 전쟁으로 훼손되어 지금은 황색 벽면만 남아 있다. 휑한 느낌이다. 명루를 둘러싼 성벽은 벽돌로 정교하고 단단하게 쌓아 올렸는데, 흥미롭게도 벽돌마다 제작자의 이름과 만든 곳이 새겨져 있다. 성벽을 쌓으면서 불량 벽돌이 나올 경우, 벽돌에 새긴 이름을 보고 그 사람을 잡아서 처단하였다고 하니 진시황의 병마용을 연상하게 하였다. 포악하고 잔인했던 역대의 군주에게서 볼 수 있는 공통점인가보다. 일찍이 조선시대의 성호 이익(李瀷))은 “주원장의 사납고 각박한 성질은 진시황과 같았다”라고 하였으니 맞는 말인 것 같다.

성벽에 ‘차산명태조지묘(此山明太祖之墓)’라고 쓰여져 있다. 그러니까 명루 뒷편의 완주봉(玩珠峰)에 주원장과 그의 부인 마황후가 묻혀 있다는 것이다. 송백나무가 울창하고 방초가 무성한 이곳에 한 시대를 호령했던 군주가 깊이 잠들어 있다고 하니 왠지 모르는 숙연한 느낌이 들었다.

전쟁으로 훼손되어 황색 벽면만 남아 있는 명루.
 전쟁으로 훼손되어 황색 벽면만 남아 있는 명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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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명루에서 내려와 이번에는 능의 입구에 해당되는 신도(神道)로 향했다. 영성문(櫺星門)을 지나니 위엄 있게 생긴 문관과 무관의 석인(石人)이 양쪽 길에 우뚝 서서 사람들을 반겼다. 이 신도석인은 바로 능을 지키는 파수꾼 역할을 한다. 문무석인이 호위하는 양쪽 길에는 원백(圓柏)이라는 나무가 줄을 맞춘 듯 나란히 서 있다. 측백나무과에 속하는 이 나무의 줄기는 마치 S자 모양으로 휘감겨 올라갔다.

한참을 걸어가니 또 다른 신도가 보였다. 이번에는 사자, 낙타, 코끼리, 기린, 말, 해태 등의 6종류의 석수(石獸)가 호위하는 길이다. 커다란 돌을 깎아 만든 것인데 대단히 정교해 보인다. 능 앞에 낙타를 세워 놓은 것은 명효릉이 처음이며, 서역 지방의 안녕을 기원하는 뜻에서라고 한다. 석수에 올라타고 사진을 찍으려는 아이들이 눈에 띄었다. 물론 아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신도는 800m 정도 이어져 있었다.

코끼리 석수가 호위하는 신도.
 코끼리 석수가 호위하는 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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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수가 호위하는 신도를 끝까지 걸어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으로 명효릉 답사는 끝났다. 왕릉 답사는 때로 아이들에게 지루하고 고답적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왕릉을 막론하고 방대한 규모라 한없이 걸어야 하는 것이 기본이요, 빽빽한 수목 속에 덩그러니 남아있는 옛 건축물들뿐,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색적인 볼거리가 많지 않으니 말이다.

그래도 엄마와 함께 타국의 왕릉을 호젓하게 걸어본 것이 아이에게는 소중한 추억이 될 것이며, 조금이나마 영혼을 살찌우는 자양분이 될 것이라는 나름의 위로를 해 본다. 아침 아홉 시부터 오후 다섯 시까지 이어진 오늘 답사가 아이에게도 버거웠던지 민박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내내 꾸벅꾸벅 졸았다. 물론 나에게도 고단한 하루였다.


태그:#남경, #명효릉, #주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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