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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에서 33번 국도를 따라 지릿재를 넘으면 경남 합천 땅에 들어선다. 합천은 삼국시대 대야성으로, 백제와 신라가 이 땅을 차지하기 위해 쟁패를 벌이던 장소다. 또 가야산 해인사라는 큰 절이 있어 한국의 불교문화를 대표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옥전동 고분이 발굴되어 가야문화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합천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 낙동강에 합류하는 황강을 경계로 북쪽과 남쪽지역으로 나누어진다. 황강 북쪽으로 합천읍이 자리하고 있고, 합천군의 가장 북쪽 가야산 자락에 해인사가 위치한다. 합천읍의 동쪽 황강 남쪽으로 넓은 들이 발달해 있는데 이곳이 초계면이다. 황강을 경계로 초계 북쪽 쌍책면에는 옥전동 고분군이 있다. 그리고 합천군의 남서쪽 가회면에는 황매산 군립공원이 있다.

 

우리가 찾아가는 영암사지(사적 제131호)는 가회면 둔내리 모산재(767m) 남쪽 기슭에 있다. 크게 볼 때는 황매산 자락이지만 영역을 세분하면 모산재 자락이 된다. 영암사가는 길은 정말 멀고 험하다. 합천읍에서 삼가면까지는 33번 국도를 따라가니 길이 괜찮은 편이다. 그런데 삼가면에서 가회면을 지나 영암사지에 이르는 길은 70년대식 구불구불 오르락 내리락 산골길이다.


 

 

몇 개의 산을 넘어 영암사지에 도착하니 시간이 벌써 오후 4시이다. 늦여름의 뜨거운 햇살이 폐사지에 쏟아진다. 안내판을 보니 이 절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절의 정확한 이름과 내력을 알 수 없다. 지난 1984년 발굴조사를 통해 절의 배치를 확인할 수 있었고, 그것을 토대로 석축의 일부를 복원해 놓았다.

 

먼저 석축을 살펴본다. 잘 다듬은 장대석으로 쌓았는데 그 모양이 단정하기 이를 데 없다. 석축의 일부는 원래의 모습 그대로이고, 나머지 대부분은 새로운 돌을 사용 다시 쌓았다. 이 석축 위로 평지 한 가운데 3층석탑이 자리 잡고 있다. 3층석탑은 단순 소박하며 옥개부가 훼손됐다. 탑의 형태, 지붕돌 아래 4단 주름을 통해 9세기 후반경의 석탑으로 추정된다. 탑 옆에는 연꽃무늬가 있는 깨진 불좌대가 보인다. 그리고 탑 좌우에 민가가 두 채 있는데  원래 그 자리에 부속건물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3층석탑에서 다시 계단을 통해 축대 위로 오르면 쌍사자석등을 만날 수 있다. 쌍사자석등은 현재 영암사지에 남아있는 유물 중 가장 아름답고 의미 있는 작품이다. 연꽃이 새겨진 1단의 받침돌 위에 쌍사자가 2단의 받침돌을 형성하고 있다. 이들 두 마리의 사자는 꼬리를 치켜들고 앞발을 들어 3단의 받침돌을 떠받치고 있다. 쌍사자석등은 이처럼 두발로 서 있는 사자를 통해 역동성과 함께 힘에 부치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3단의 연꽃무늬 받침돌 위에는 8각의 화사석이 있다. 이들 중 4면에는 창이 나 있고, 다른 4면에는 사천왕상이 부조되어 있다. 화사석 위로는 덮개가 있으며 덮개 끝이 기와지붕처럼 약간 위를 향하고 있어 날렵한 느낌을 준다. 이와 같은 계열의 쌍사자석등은 모두 세 점이 있다. 그 중 속리산 법주사의 것이 가장 많이 알려져 있으며, 광주박물관에 중흥산성 쌍사자석등 또한 유명하다.

 


이 석등에서 다시 모산재 쪽을 바라보면 1단으로 축대를 쌓은 정사각형의 금당터가 보인다. 영암사는 금당 앞에 석등이 있고 그 앞에 석탑이 있는 가람 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금당터 가운데 불상을 안치한 지대석이 있고 그 주변에 16개의 주춧돌이 있는 것으로 보아 목탑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통상 목탑에서 발견되는 심초석이 없는 것으로 보아 3층 정도의 작고 낮은 목탑이었을 것이다.

 

불상 받침돌과 주춧돌 바닥에는 마루돌이 있으며, 탑지 바깥에는 석축 기단을 쌓고 이곳에 8부 중상과 사자를 조각을 했다. 8부 중상의 모습은 마멸되어 확인이 쉽지 않지만 사자의 모습은 뚜렷하게 남아 있다. 더욱이 사자가 해학적으로 표현되어 아주 친근한 느낌을 준다. 얼핏 보면 사자가 아닌 강아지처럼 보인다.

 

 

이곳 금당에서 서쪽으로 약간 높은 곳에 금당터가 또 하나 있다. 먼저 본 목탑 금당만큼 완벽한 형태는 아니지만, 가운데 불상 지대석이 있는 사각형의 금당이다. 낮은 기단을 쌓아 바닥면과 구별하였고, 앞에 두 개의 낮은 계단을 통해 올라갈 수 있도록 만들었다. 금당 앞에는 부처님을 모신 불대좌가 있어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다.

 

 

 

금당 좌우에는 두 개의 부도비가 있었음을 알리는 두 기의 귀부가 있다. 비신과 이수가 없어져 완벽한 모양을 알 수는 없지만 귀부의 양식이나 조각으로 보아 9세기말 작품으로 추정된다. 등에는 육각형의 귀갑문이 선명하고 거북의 머리는 용처럼 보인다. 그러나 두 귀부에는 다른 점도 있다. 하나가 남성적이라면 다른 하나는 여성적이다. 그리고 비석 받침의 문양도 다른데, 하나는 인동운권문(忍冬雲卷紋)이고 다른 하나는 쌍어문(雙魚紋)이다.


쌍어문은 가야의 유적과 관련이 깊은데, 김해의 수로왕릉에서부터 합천의 영암사에 이르기까지 가야국의 영역에서 주로 발견된다. 특히 머리를 아래로 하고 꼬리를 위로 한 이 물고기 모습은 일본의 성(城)에서 발견되는 치미와 그 모양이나 기법이 유사하다. 이를 통해 우리는 가야문화가 일본에 전달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황매산, 모산재, 영암사지 모두 이번에 처음 찾아보는 곳이다. 그러나 산세나  땅기운, 절의 배치 등으로 보아 말 그대로 신령스런 장소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 절의 맥이 끊기고 만 이유가 뭘까? 그것은 황매산과 모산재의 기가 너무 세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신령스런 땅기운은 그것을 수용할만한 인재가 있어야 나타날 수 있는데, 언제부턴가 영암사에는 땅기운을 받아들일만한 사람이 찾아오지 않은 것이다.

 

절을 내려오면서 모산재의 신령스런 바위들(靈巖), 우아한 쌍사자석등, 웅장한 축대를 다시 본다. 저러한 대상들이 우리 같은 답사객이 아닌, 선정과 정혜를 닦는 진정한 스님들과 함께할 때 영암사는 옛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땅에 서 진정한 스님을 찾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으니 그것이 언제나 가능하려는지?

덧붙이는 글 | 지금까지 3회에 걸쳐 경북 고령의 문화유산을 소개했다. 앞으로 4회에 걸쳐 경남 합천의 문화유산을 소개할 예정이다.


태그:#영암사지, #황매산, #모산재, #쌍사자석등, #3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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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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