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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 이전, 사회주의 칠레를 상징했던 세 인물
▲ 살바도르 아옌데, 파블로 네루다, 그리고 빅토르 사하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 이전, 사회주의 칠레를 상징했던 세 인물
ⓒ www.nerav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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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9월 11일 화요일, '며칠 있으면 칠레의 아옌데 정부가 군사 쿠데타에 의해 무너진 지 꼭 34년째 되는 날이 된다'라고 기억할 만한 사람은 별로 없다.

우리가 아는 역사는 9·11을 2001년 9월 11일 화요일 뉴욕에서 일어났던 한 사건만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빌딩으로 돌진하던 비행기와 잿빛 화염에 휩싸인 건물, 그리고 건물 잔해를 뒤집어쓴 사람들의 혼란스러움을 비추던 영상은 어떤 그래픽 효과보다도 설득력 있고 현실적이었다.

2001년 이후 9·11을 감히 다른 어떤 일과 연관 짓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렇지만, 역사에서 9월 11일은 또 하나의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던 날이다.

<칠레 전투>, 민중의 힘에 대한 기억

아옌데 정부에 대해...
1970년 칠레 대통령 선거에서 아옌데는 인민연합(Unidad Popular)의 후보로서 36.2%의 득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이후 아옌데 정부는 "사회주의로의 평화적인 이행"이라는 독자적인 사회주의적 실험을 추진했다. 쿠바 혁명 성공 이후 중남미에서 사회주의가 확산되는 것을 우려했던 미국의 닉슨 정부는 아옌데가 대통령 당선을 막으려 노력했으나 실패한 후, 칠레에 대한 경제원조 중단 등 경제압력정책을 통해 아옌데 정부를 압박했다.

또한 아옌데 정부에 반대하는 집단의 파업활동을 지원을 통해 칠레를 혼란에 빠뜨리고자 했다. 결국 아옌데 정부는 1973년 9월 11일 화요일, 미국 CIA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던 피노체트 등 군부 세력의 쿠데타에 의해 전복되고 만다. 아옌데는 그날, 무장을 하고 동료들과 함께 마지막까지 대통령궁을 지키다가, 군부세력에 의해 대통령궁 밖으로 끌려나오던 순간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알려졌다. / 탁선호
영화 <칠레 전투(The Battle of Chile)>를 기억하는가. 1970년 민주적 선거에 의해 선출된 인민연합의 아옌데 정부는 사회주의적 개혁을 추구했으나, 1973년 미국의 지원을 받은 군부 세력에 의해 무너지고 만다.

파트리오 구즈만의 <칠레 전투> 3부작은 아옌데 정부의 사회주의적 개혁과 민중들의 정치 참여, 그리고 부르주아들의 저항과 미국의 지원을 받은 군부 쿠데타로 인해 아옌데 정부가 전복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필름이다.

이 영화는 새로운 사회주의적 실험에 대한 생생한 기록과 비판, 그리고 혁명과정에 대한 성찰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이면서 동시에 칠레 민주주의의 비극에 대한 하나의 슬픈 서사시이기도 하다.

라모네다궁에서 뿜어져 나오던 화염, "당신 뒤에는 우리가 있다"라고 외치며 아옌데에 대해 지지를 보내던 민중들의 함성, 새로운 정치적 실험의 현장, 그리고 민중의 힘과 역사의 진보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보여주었던 아옌데의 감동적인 마지막 연설. 몇 년 전 비디오를 통해서 본 <칠레 전투> 3부작은 새로운 정치에 대한 상상력과 감수성을 자극했다.

사실, 우리는 미국보다 칠레와 더욱 비슷한 역사적 경험을 가지고 있다. 군부 쿠데타의 발생, 오랜 독재의 경험, 수많은 고문과 실종, 그리고 민주주의의 파괴. 그렇지만, 우리 중에 1973년의 9월 11일을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역사는 강자에 의해 쓰이기 마련 아닌가.

미국은 우리에게 제국주의 국가이기 이전에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 구원자이다. 또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르는 초강대국이기 이전에 우리가 닮아야 할 부와 민주주의를 누리고 있는 국가이다.

그리고 뉴욕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달콤한 유혹의 언어인가. <섹스 앤 더 시티>의 사만다가 쇼핑백을 어깨에 메고 거닐던 5번가가 있는, <프렌즈>의 주인공 녀석들이 모여 살던 아파트가 지척에 있는, 유혹의 도시.

또한 태풍의 끝만 스쳐 지나가도, 지하철이 2시간만 멈추어 있어도 한국의 <뉴스데스크>에 보도되는 아주 익숙한 도시가 아니던가. 우리의 머릿속에서 9·11이라는 숫자가 2001년 9월 11일과 연결되는 건 당연하다. 아무도 우리에게 1973년의 9월 11일에 대해서는 가르쳐주지 않았다.

때문에 2001년 9월 11일과 1973년 9월 11일 사이에서 미국을 바라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하물며 당사자가 아니면서 누가 30년도 지난 남의 일을 굳이 다시 끄집어내 기억하고, 의미를 되짚어 보려고 하겠는가.

뉴욕 한 모퉁이에서 칠레의 9월 11일을 기억하다

뉴욕 맨해튼에 있는 작은 필름 센터로서 대안적이고 실험적인 영화를 주로 보관, 상영, 연구하는 공간이다.
▲ 앤솔로지 필름 아카이브즈(Anthology Film Archives) 전경 뉴욕 맨해튼에 있는 작은 필름 센터로서 대안적이고 실험적인 영화를 주로 보관, 상영, 연구하는 공간이다.
ⓒ 탁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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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여기는 뉴욕이다. 사람들이 버릇처럼 내뱉고 하는, 다양한 사람들이 공존하는 도시 뉴욕. 여기 맨해튼에 있는 앤솔로지 필름 아카이브즈(Anthology Film Archives)는 9월 5일부터 13일까지 <칠레전투> 1, 2부와 3부 '민중의 힘'을 비롯해 <살바도르 아옌데> <칠레, 지울 수 없는 기억> <피노체트 재판> 등 파트리오 구즈만의 다큐멘터리 필름들을 상영한다.

그라운드 제로에서 불과 수 마일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공간에서 2001년 9월 11일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1973년의 9월 11일에 대한 영화를 상영하려는 이들의 신선한 상상력에 박수를 보낸다.

물론, 영화마니아들이 즐겨 찾는 소규모 극장에서 칠레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 몇 편을 상영하는 것이 주류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킬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아마 주류 언론에 보도는커녕, 몇몇 필름 마니아들과 여전히 아옌데를 기억하는 칠레인들, 그리고 좌파 성향의 지식인들이 모여 앉아 보는 수준에 그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9·11에 대한, 나아가서는 미국의 진정한 모습에 대한 논의의 지평을 확장시켜보자는 의미로 해석하고 싶다. 많은 사람들이 보았겠지만, 마이클 무어의 화씨 9·11이나 음모론에 바탕한 다큐멘터리 루스 체인지는 부시 행정부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할 뿐이다.

그렇지만 9월 11일 뉴욕에서 <칠레 전투>를 상영한다는 것은 그리고 본다는 행위는, 미국을 포함한 문명세력 대 테러세력이라는 9·11에 대한 가장 보수적인 해석의 구도를 넘어서면서도, 부시 행정부와 반부시 진영이라는 지극히 미국적인 정치적 구도에도 갇히지 않는 것일 수 있다.

영사기는 어둠을 뚫고 관객들 앞에 34년 전의 진실을 그려 보일 것이다. 관객은 스크린을 통해서 1973년의 9월 11일 화요일을 목격하면서, 스크린 바깥의 이제 곧 6주년을 맞이하려는 2001년의 9월 11일 화요일을 떠 올려야 한다. 공교롭게도 2007년 9월 11일 화요일에 말이다. 그것은 미국인들이 느껴야 할 또 다른 '불편한 진실'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호흡하고 있는 민주주의의 이중성과 허약함을 발견하려는 것일까. 칠레인 작가 아리엘 도르프만의 말처럼, 실제 9월 11일에 일어나지 않았지만 역사 속에서 발생한 수많은 비극적인 9·11들을 기억하고 반성하려는 것일 수도 있다.

2007년 9월 11일 화요일, 어둠이 깔리면 두 개의 레이저 광선이 또다시 그라운드 제로 위로 쏘아 올려질 것이다. 그것은 뉴욕의 심장이었던 쌍둥이 빌딩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혹은 11이라는 상징적인 그날을 사람들에게 각인시키려는 것일 수도 있다.

또 어떤 이들은 높이 치솟은 광선에 하늘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닿고 싶은 소망을 담아 보낼 수도 있다. 물론, 끊임없이 팽창해왔던 미국의 역사처럼 그저 뻔뻔스럽게 하늘로 뻗어나가는 빛에 불과할 수도 있다. 이건, 유혹의 도시 뉴욕 한구석에서 벌어질 일이다.

마지막 9월 11일(The Last September 11)
- 아리엘 도르프만(Ariel Dorfman)

1973년 칠레가 군사 쿠데타에 의해 민주주의를 잃어버렸던 날, 그리고 되돌이킬 수 없는 죽음들이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와 우리들의 삶을 영원히 바꾸어 버렸던 그날 이후, 나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9월 11일 화요일은 슬픔의 날이었다. 그리고 거의 30년이 지난 지금, 가혹한 역사의 운명은 다른 한 나라에 우울한 그날을, 죽음으로 가득 채워진 9월 11일을, 그것도 또다시 화요일에 가져다주었다.

사람들은 칠레와 미국을 나누는 차이가 적지않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를 공격한 사악한 테러리스트들은 인류 전체에 영향을 끼쳤다.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것은 부시 대통령이 말한 것처럼 3차 세계대전의 시작일 수도 있다.

또한 아마도 인류의 역사가 영원히 앞으로 미끄러져 나갔던 날로서 미래의 역사책에 기록될 것이다. 반면에 오늘날 1973년 9월 11일의 칠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기억하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나는 두 번째 비행기가 세계 금융 센터 안으로 부서져 들어가는 것을 본 이후 줄곧 두 9·11의 일치 속에 숨겨진 의미에 대해서 이해할 필요성을 느껴왔다. 내 경우에 그것은 좀 더 복잡하게 얽혀져 있는 개인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 경험의 밑바닥을 형성한 두 개의 도시, 10년 동안이나 유년 시절의 피난처를 제공했던 뉴욕과 나를 한 남자로 만들어 주었던 청소년기의 안식처 산티아고를 한데 묶어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그 두 도시로부터 지금 내가 사용하는 영어와 스페인어를 배웠다. 나는 지금 내면의 충격을 극복하기 위해 천천히 숨을 쉰다. 나는 높은 빌딩으로부터 수직으로 떨어지는 한 남자가 찍혀 있는 훼손된 그 사진을 보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또한 자신들에게 닥쳐올 운명이 무고한 수많은 동포들을 죽일 것이라는 알고 있는 승객들을 떠올리는 것을 멈추려고 한다.

지금 나는 뉴욕 맨해튼에 있는 친구들이 무사한지 미친 듯이 전화를 해대던, 그렇지만 그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던 그 순간에 있다. 지금은 미국인들이 겪고 있는 이 상황 안에 끔찍하게도 친근하면서도 명확히 감지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달으려는 혼란한 순간이다.

1973년 칠레와 2001년 미국에서의 테러는 한 국가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건물을 하늘로부터 공격해 파괴한 것이었다. 칠레에서는 산티아고의 대통령궁을, 미국에서는 뉴욕의 금융과 워싱턴의 군사적 힘을 상징하는 건물을 공격했다. 그렇지만 내가 환기시키려는 유사함은 이런 추상적인 비유에 그치지만은 않는다. 내가 알아차린 것은 좀 더 심오한 것이다.

9월 11일 그날, 우리가 칠레에서 겪었던 것이 다시 여기에서 메아리친다. 칠레의 그것과 닮아있는 고통과 아픔, 그리고 혼란스러움이. 여전히 믿을 수 없지만, 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식들과 부모와 사랑하는 연인들의 사진을 움켜쥐고, 그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기 위해 뉴욕의 거리를 헤매던 모습이 스크린 위에 똑같이 재현되는 것을 보았다. 온 미국은 실종된 사람들을 위한 장례식도 없이, 그냥 불확실함만 가진 채, 행방불명 된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 위해 심연을 헤매야만 했다.

나는 또한 인류의 사악함이 만들어낸 대재앙 속에서 사람들이 가지게 되는 극단적인 비현실성에 대한 감각들이 되풀이되는 것을 알아차렸다. 사람들은 자연이 만들어내는 커다란 재해보다 인간이 만들어낸 끔찍한 모습들에 더욱 대처하기 힘들어 한다.

지금 나는, 나 같은 사람들이 칠레의 군사 쿠데타 기간과 그 이후에도 중얼거리곤 했던 말들을 떠올리게 하는 목소리를 되풀이해 듣는다.

"이것이 정말 우리에게 일어날 리 없다. 이 엄청난 폭력은 우리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일어났다. 우리는 단지 영화나 책이나 사진들을 통해서 이것을 보아왔을 뿐이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의 악몽이라면, 왜 우리는 깨어날 수 없는가."

이런 목소리들은 28년 전에도 지금 여기에서도 끊임없이 이어진다. "우리는 우리의 순수함을 잃어버렸다. 세상은 이제 예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물론 결론은 그 유명한 "미국 예외주의"일 수밖에 없다. 이 나라는 자국의 국민들로 하여금 세상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그 모든 비참함과 슬픔과는 전혀 동떨어져 있다고 상상하게 만든다.

20세기에 일어났던 어떤 큰 전투들도 미국 본토를 건드린 적은 없다. 미국인들이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던 치욕의 날, 진주만 공격 사건이 유일하게 비슷한 것이지만, 그것 또한 수천 마일 떨어진 곳에서 벌어졌다. 하지만 영원히 지속될 것 같았던 자기만족적 예외주의는 이제 산산조각났다. 이제부터 미국에서 산다는 것은 지구상의 수많은 사람들처럼 일상적인 불확실함과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묵시론적인 범죄가 미국 사회에 가져다준 엄청난 고통과 참을 수 없는 상실들에도, 이따금 나는 이 사건이 어떤 나라들에 자각과 변화의 기회를 주지는 않았는지 알고 싶다. 이 커다란 위기는 재건 또는 파괴를 위해 이용될 수 있다. 그것은 선을 위해, 혹은 악을 위해 이용될 수 있다. 그것은 또한 평화를 위해, 전쟁을 위해, 공격을 위해, 화해를 위해, 복수를 위해, 정의를 위해, 혹은 한 사회의 군사화를 위해, 아니면 인간화를 위해 사용될 수 있다.

미국인들이 자신들의 트라우마와 두려움을 이겨내고, 느닷없이 자신들을 삼켜버렸던 불안전함 속에서 번성하면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들의 고통이 유일무이하지도 배타적이지도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인류를 비추는 커다란 거울을 통해 스스로 자신을 보려는 노력 속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서 오랫동안 고통과 분노의 상황에 처해 있었던 수많은 다른 사람들과 자신들이 연결되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이 운명의 신이 미국의 심장부가 우리 시대의 첫 공격의 목표물이 되도록 결정한 이유가 될 수 있는가? 또한 칠레가 군사 쿠데타에 의해 점령(워싱턴의 정부가 미국 국민의 이름을 통해 번성시켜왔고 유지시켜왔던 점령)당한 그날에 정확히 이 사건이 일어나도록 한 이유가 될 수 있는가?

이들이 이제 희생자가 된다는 것이 정말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또한 묻어버릴 것조차 남겨두지 않고 사라져버린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올릴 때마다 참아야 하는 생존자들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수많은 다른 사람들과 나라들이 견뎌야 했던, 세상에 뿔뿔이 흩어져 있는 복수의 9·11들을 이해하고 그들에게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기회를 얻었기 때문에, 이것은 또 하나의 커다란 도전이 미국인들을, 특히 젊은 미국인들을 기다린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는가?

테러리스트들은 미국을 하나의 사악한 국가로서 고립시키고 배제하기를 원해왔다. 그러나 미국의 오만함과 개입의 대상이었던 많은 나라의 사람들을 포함한 지구상의 나머지는 이러한 악마화를 거부한다. 세상 사람들 대부분은 한마음으로 슬픔을 표출하고 도움을 제공하고 연대를 표현한다. 또한 대학살로 인한 죽음을 우리의 죽음처럼 생각한다.

물론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에 보인 이러한 동정심이 되돌아 올 것인지는 지켜봐야 한다. 재난과 기근과 독재와 박해로부터 스스로 자신을 멀리함으로써 형성된 광활한 이 나라가, 또한 희망과 관용으로 가득 차 있는 이 나라의 사람들이, 버림받은 채 있는 인류 구성원들의 슬픔과 고통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인지는 여전히 확실치 않다.

우리는 새롭게 태어난 미국인들이 아픔과 부활을 통해서 우리 모두의 훼손된 인간성을 바꾸어나가려는 꾸준한 노력의 과정에 기꺼이 동참할 것인지 다가올 미래에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 함께, 애도해야 할 또 다른 끔찍한 9월 11일이 없는 세상을 만들어 나가면서.

(2001년 아리엘 도르프만이 썼던 글을 저자의 동의하에 번역 게재합니다. 이글은 2004년에 출간된 아리엘 도르프만의 산문집 <Other Septembers, Many Americas: Selected Provocations, 1980-2004>와 아리엘 도르프만 등 여러작가의 글이 수록되어 있는 <Chile: The Other September 11>에 실려 있습니다.)


태그:#칠레, #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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