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주>

"그거 이미 일단락됐는데요, 늦으신 거 아닌가?"

 

취재원에게 이런 말을 들을 때, 참 민망하다. 기자라면 당연히 현장 및 현상을 가장 빨리 포착해야 하는데, 취재원에게 이런 답변을 들으면 그 다음 말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난처하다.

 

하지만 이번 취재는 좀 달랐다. 보도가 늦긴 했지만, 충분히 쓸만한 거리는 된다고 생각했다. '뒷북'이라 하더라도 부끄럽지 않은 '뒷북'인 셈이다.

 

기자가 취재원에게 "늦었다"는 잔소리를 들으며 뒤늦게 뛰어든 사안은 지난달 31일 면직된 한 경제신문의 편집국장과 관련된 것으로, 장본인인 A 전 국장은 논설실장으로 발령났다가 10여일 만에 해직됐다.

 

A 전 국장이 퇴사하게 된 직접적 배경은 지난달 22일 열린 기자총회 때문. 참석자 48명(재적인원 59명)의 찬성으로, 기자들은 국장의 면직을 사측에 요청했다. 한 참석자는 "A 국장이 그동안 <헤럴드경제>에서 해온 역할이 있다고 판단해, 최소한의 예의 차원으로 의원면직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편집국장의 낯뜨거운 문자... "사랑한다"

 

기자들이 24년 언론인 경력의 A 전 국장을 사실상 '탄핵'한 이유는 편집국 내 떠돌았던 A 국장의 성추문 때문.

 

관련 소식은 이미 지난 19일 <오마이뉴스> 기사제보 게시판에도 올랐다. A4 두 장짜리 장문의 제보는 <오마이뉴스>뿐만 아니라 일부 언론사 자유 게시판에 올랐다.

 

지난 22일 타 매체 기자가 "한 일간지 편집국장의 성희롱 사건을 아느냐"고 물을만큼, 소식은 언론계에 파다해졌다.

 

A 전 국장과 관련된 추문이 외부까지 알려지자 편집국 기자들이 전 국장의 퇴진을 결정하게 된 것이다.

 

제보의 제목은 '여기자 성추행건 규탄'. 내용은 이렇다. 자신을 석간 H경제신문 기자라고 밝힌 익명의 제보자는 A 전 국장의 오래된 '만행'을 고발했다. 제보에 따르면, A 국장이 3년전부터 여기자들과 여직원들을 상대로 성희롱을 했다는 것.

 

A 전 국장은 "직원들과의 모임에서 여기자와 귀엣말을 나누고, 손을 잡는 등 스킨십을 한 데 이어 모임 이후에도 '너와 함께 해서 즐거웠다', '오늘따라 너무 아름다웠다' 등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고 제보자는 주장했다.

 

여기까지는 부하 직원에 대한 애정 정도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제보에 따르면, A 전 국장은 모임 다음날 새벽 여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사랑한다", "너의 얼굴이 가슴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등의 말을 쏟아낸다는 것이다. 다음날 출근해서는 여기자들을 불러, 새벽에 전화를 받지 않은 여기자를 나무라기도 했다고 제보자는 전했다. 

 

제보자는 "여기 쓴 피해는 빙산의 일각이다, 기자협회가 파악한 바로는, 피해를 당한 여기자가 30여명에 달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사실무근" vs "피해자, 분명 있다"

 

제보 내용이 알려지자, 제보의 진실성을 두고 회사쪽과 기자들의 견해는 갈렸다. "사실무근"이라는 당사자와 회사에 맞서, 기자들 내부에서는 "피해자가 분명히 있다"고 반박한 것.

 

무엇보다 당사자인 A 전 국장은 "게시물 내용은 사실무근"이라며 "의혹만 있고 실체가 없는 날조되고 과장된 글"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지난달 30일 통화에서 "기자들을 살갑고 격의없게 다독여준 것인데, 일부 악의적인 기자들이 선동해서 일을 이렇게 만들었다"며 "(게시물 작성자에 대해) 명예훼손소송을 제기할 생각이다, 어떻게든 명예회복을 할 것"이라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A 전 국장은 총회 당시에도 직접 출석해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명예를 회복할 수 있도록 시간을 달라고 호소했지만, 기자들은 '즉각' 사퇴로 뜻을 모았다.

 

회사쪽도 이번 사건에 대해 A 전 국장과 같은 입장이었다. 회사쪽 관계자는 해당 게시물에 대해 "근거 없는 '찌라시'일뿐"이라고 일축하면서 "성추행 피해자라고 나선 여직원은 없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본인(피해자)의 자존심 때문이거나 성추행 사건이니 만큼 들춰내기 힘든 상황이다, 피해자가 있는지 없는지 여부는 모른다"고 말했다. 그는 A 전 국장의 면직에 대해 "24년 언론인으로 생활하신 분이 성추행범으로 낙인찍혔다"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하지만 기자들의 견해는 달랐다. 익명을 요구한 한 남자 기자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이번 사건에 대해 들었는데, 분명히 피해자는 있다"며 "여기자 모임(20일)에서도 참석자들이 A 전 국장에게 당한 피해 사실을 성토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중견 남자 기자도 "게시물에 과장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A 전 국장은 분명 잘못했다"며 "개인적으로 억울한 부분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편집국장으로서 여기자들에게 할 수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노조 또한 A 전 국장에 반발했다. 언론노조 헤럴드미디어 지부는 22일 발표한 노보에서 "회사가 이같은 사실을 감지하고도 은폐, 봉합하려 했다"며 "경영진이 A 전 국장의 행태에 대한 정보를 접했음에도 안이한 시각과 감싸기로 일관했다"고 비난했다.

 

노조는 "자신들의 동생 또는 딸이 그런 꼴을 당한다해도 '회사의 명예' 등을 운운할 수 있겠느냐"며 "만약 이 일이 사실로 드러나면, 당사자를 징계 및 해고하고 사법처리 해야 한다"고 공동 조사위원회를 구성할 것과 철저한 진상 규명을 사측에 촉구했다.

 

가해자 사퇴로 성추행 사건은 일단락?
 
기자는 제보를 접한 뒤 취재에 들어갔지만, 기사화는 쉽지 않았다. 익명의 제보만 있을뿐 '내가 피해자'라고 나서는 이가 없었다. 지난달 20일 열린 여기자 모임에서 참석자들이 A 전 국장에 대해 성토를 쏟아냈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여기자협회측은 "논의 내용은 회사에도 알리지 않았다"며 공개를 거부했다.

 

기사화는 실패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피해자가 원치 않는 성추행 기사는 공개가 되레 피해자들에게 2차 피해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대로 놔두기엔 꺼림칙했다. 취재에 응한 남성 기자들마다 "A 전 국장이 의원면직되면서 사태는 일단락됐다"고 입을 모았다. A 전 국장이 사퇴함으로써 가해자가 회사에서 사라지고, 사건의 공개를 원치 않는 피해자들도 보호했기 때문이란다.

 

과연 그럴까. 제보자는 "여기자들이 별도 모임을 갖고 A 전 국장을 탄핵하려고 하지만, 사측의 압력과 협박으로 사건이 공개되지 않고 있다"며 도움을 호소했다. 회사는 A 전 국장의 면직으로 사태를 매듭지었지만, A 전 국장은 '작성자에 대한 명예훼손'이라는 으름장을 놓았다.

 

박성호 노조 사무국장은 "원인은 제거됐다"면서도 "피해자들이 사건의 공개를 원치 않았다고 하지만, 이번 일이 명확한 해결없이 잊혀지게 돼서 아쉽다"고 말했다. 진상조사단은 피해자들이 원치 않는다는 이유로 구성되지 않았다.
 
성추행 사건은 이제 그다지 큰 뉴스도 아니다. 최연희 의원, 이형모 전 <시민의신문> 사장, 박명수 전 농구감독 등이 그랬듯, 당시에는 비난 여론이 들끓다가도 어느새 망각 증상이 나타난다. 어떤 사회조직보다 진보적이고 투명해야 할 언론사도 예외가 아니었음에 더욱 씁쓸하다.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장은 "사회 부조리를 모니터링하고 여론을 끌어가기 위해 어떤 사회조직보다 맑아야 하는 언론사가 내부의 성추행 사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것은 문제"라며 "언론사라도 성추행 사건의 성역이 될 수 없다, 조직 보위론에 묻혀 '가해자가 나가면 그만'이라는 해결 방식은 문제를 더 키우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태그:#헤럴드경제, #편집국장, #성추행, #의원면직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