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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이 마침내 기자들과 결별을 선언했다. 진보언론과도 마찬가지다. 지난 8월 31일 여의도 63빌딩에서다. 한국방송프로듀서연합회 창립 20주년 기념식 자리였다.

 

노대통령은 급기야 보도·편집국장들까지 나서 결의문을 채택한 취재지원 방안에 대한 일선 기자들의 반발에 대해 "얼마나 자신만만하면 기자와 맞서겠느냐"며 물러서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그 정도가 아니다. "정치에, 언론에 무슨 대의가 있냐"고도 했다.

 

"복잡한 얘기, 기자들은 쓸 수 없다"

 

나아가 기자들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오늘 내가 복잡한 말을 했는데, 이 복잡한 얘기를 기자들은 쓸 수 없다"고 했다. 한마디로 기자들은 대의는 말할 것도 없고 복잡한 얘기는 아예 쓸 수 없는 단순 무식한 직종으로 치부했다. 한마디 더 했다. "앞으로는 기자들이 오라는 데는 이제 안 간다"고 했다. 기자들과의 '결별선언'임이 분명하다.

 

진보언론에 대해서도 사실상 결별을 선언했다. "(언론의) 특권을 인정하지 않고 소위 개혁을 하려고 했고, 서로 공생관계를 완전히 청산하려고 하니까 옛날에는 편을 갈라서 싸우던 언론이 전체가 다 적이 돼 버렸다"고 말했다. "그래도 나를 편들어 주던 소위 진보적 언론이라고 하는 언론도 일색으로 나를 조진다"고도 했다.

 

노 대통령은 대신 프로듀서들을 앞으로 함께 할 '동지'로 정한 듯하다. 기자들은 쓸 수 없는 '복잡한 얘기'를 "프로듀서들은 담아 낼 수 있다"고 했다. "우리 사회가 어디로 가느냐는 피디 여러분의 손에 달려 있다"고도 했다. 기자들이 오라하면 가지 않겠지만 "피디가 오라고 하면 간다"는 말도 했다.

 

노 대통령의 이런 언급은 어느 정도는 예고됐던 바다. 한국방송프로듀서연합회의 영상 메시지 요청에 직접 참석하기로 했을 때부터 이미 '작심'했을 터다. 바로 하루 전 전국 43개 신문 방송사의 편집·보도국장들이 60년대 이후 처음으로 보여준 언론자유를 위한 '행동'과 '결의'가 노 대통령의 전의를 한층 더하게 했을 법하다. 어쨌든 노무현 대통령은 이제 '기자'들과는 물론 '진보언론'과도 결별을 선언한 꼴이 됐다.

 

기자와 진보언론으로서도 이미 결별은 예고됐던 바다. 취재지원선진화 방안을 놓고 정부 측과 협상을 벌이던 한국기자협회는 '전면 반대'라는 내부 강경 방침에 따라 대정부 협상을 중단해야 했다. 사실상 대화 창구가 사라진 셈이다. 그런 가운데 일선 기자들은 잇달아 반대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마침내 보도·편집국장들까지 나섰다. 기자들의 지휘관들이 '배수진'을 친 셈이니, 일선 현장의 기자들은 이제 물러서기도 어렵게 됐다.

 

정부와 진보언론과의 불편한 긴장 관계는 한미FTA를 거치면서 고조됐다. <경향신문>과 <한겨레>, <오마이뉴스>, <프레시안> 등 이른바 진보 매체들은 일제히 한미FTA 협상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보도했다. '청와대브리핑'과 '국정브리핑'은 <경향신문>이나 <한겨레> 보도를 정조준해 '공격'하기도 했고, 이들 신문들의 재반박 등 공방이 이어지기도 했다. 한미FTA 때는 오히려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보수적인 신문과 방송들이 정부를 적극 지지하는 '관계의 역전 현상'이 벌이지기도 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이번 발언은 바로 이 같은 정부와 진보언론, 기자와의 관계가 파탄 났음을 공식 확인한 것이라 할 만하다.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이 단지 취재지원 선진화 방안에 대한 논란을 넘어서는 이유다.

 

기사들은 모두 언론개혁 저항세력?

 

노무현 대통령은 이번에 소위 진보언론까지 한 묶음으로 언론개혁에 저항하는 세력으로 단정했다. 이에 대한 소위 진보언론의 반응 역시 고울 리 없다. 취재지원 선진화 방안에 대한 소위 '진보언론'의 반응에는 상당한 편차가 있었다. <경향신문> 같은 경우는 국민의 알권리 차원에서 처음부터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이라 혹평을 하고 있지만, <한겨레> 같은 경우는 공무원과 정부에 대한 취재 제한 측면에 초점을 맞춰 비교적 냉정하게 대처해왔다.

 

그런 마당에 노 대통령이 "소위 진보언론도 일색으로 나를 조진다"고 말해 <한겨레> 같은 신문이 운신의 폭이 더욱 좁아졌다. 당연히 이들 소위 '진보적 언론'의 반발도 예상된다.

 

기자 사회 역시 마찬가지다. 취재지원 선진화 방안을 놓고 펼쳐지고 있는 기자와 정부와의 대립은 더욱 격화될 가능성이 커졌다. 노무현 대통령이 더 이상의 후퇴는 없다는 방침을 분명히 밝혔다. 기자들 역시 물러설 조짐이 없어 보인다. 정일용 한국기자협회장이 지난 주 각 기자실을 돌며 기자들의 의견을 수렴했는데, "끝까지 밀어붙여야 한다"는 식의 강경론이 많았다. '합리적인 대화' 자체가 불가능할 상황으로 읽힌다.

 

사실 취재지원 선진화 방안은 그 시작이 "기자들이 기자실에 죽치고 앉아 담합이나 하고 있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연초 발언이었다. 이 발언이 도화선이 돼 사태를 여러 가지로 꼬이게 한 측면이 적지 않다. 기자들의 정서적 반발부터 부른 측면이 컸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다. "기자들은 복잡한 얘기를 쓸 수 없다"면서 기자들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당연히 기자들의 반발이 예상되는 대목이다.

 

"기자들이 긴 이야기, 복잡한 이야기를 제대로 쓸 수 없다"는 이야기는 비교적 정확한 진단이다. 이른바 '기자 저널리즘'의 최대의 취약점을 정확하게 지적한 것일 수 있다. 이에 비해 이른바 'PD저널리즘'이 긴 이야기, 복잡한 이야기를 잘 풀어내는 대목 역시 맞는 이야기다. 언론에 대한 노무현 대통령의 이번 지적 가운데 기자들이 가장 뼈아플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그런 '지적'에 동의하더라도 기자집단과 PD집단을 단순 비교하는 식의 양분법에는 상당한 반감이 작용할 듯하다. 기자 저널리즘과 PD 저널리즘의 차이가 '기자집단'과 'PD집단'의 본질적인 성향의 차이에 따른 것일 수 있지만, PD저널리즘이 돋보이는 중요한 이유로 바로 '장르의 차이'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자들에게도 PD저널리즘과 같은 그런 긴 호흡의 시간과 지면, 그리고 취재 기간이 허용된다면 전혀 새로운 기자저널리즘을 선보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졸지에 추켜세워진 PD들, 그들은 기분 좋을까

 

그런 점에서 기자들이 긴 호흡의 기사, 복잡한 이야기를 제대로 쓰지 못한다는 지적은 현상적으로 맞는 지적이다. 기자들로서도 뼈아픈 대목이다. 하지만 바로 그 '뼈아픈 지점'에 대한 시각과 배려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기자들의 '간극'은 너무 커 보인다. 바로 그런 점이 노무현 대통령이 '맞는 말'을 했음에도 기자들이 결코 그 말에 '수긍'하려 하지 않는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어쨌든 PD들로서는 기분 나쁜 일은 아닐 듯싶다. 허나 그 반응을 보면 부담스럽다는 이야기들이 많다. PD저널리즘에 대한 노대통령의 '극찬'이 되레 '발목'을 잡을지 모른다는 우려도 있다. 황우석 관련 프로그램이나 한미FTA 관련 프로그램에 대한 청와대 등의 불만 등을 전해 들었던 한 PD는 "노 대통령이 평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줄 몰랐다"고도 했다.

 

분명한 것은 노무현 대통령이 언론계에 '기자저널리즘' 대 'PD저널리즘'이라는 또 하나의 '전선'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물론 '기자'와 'PD'들이 어떻게 반응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미 언론계 내부에서도 심심찮게 돌출되곤 했던 저널리즘과 관련한 '핵심 쟁점'을 짚은 것이어서 그 파장은 결코 작지만은 않을 것 같다. 왜냐하면 앞으로 저널리즘의 주도권과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태그:#백병규, #미디어워치, #노무현, #기자실, #진보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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