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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에서 연락이 왔다. 추석에 방송 예정인 토크쇼의 출연 의사를 물어온 것이었다. 올해 최대 이슈 가운데 하나인 학력위조가 테마가 될 것인데, <오마이뉴스> ‘내가 겪은 학력콤플렉스’에 응모한 것이 인연이 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참여하고 싶었다. 살면서 방송에 나가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만, 특히 전업 작가인 내게 방송 출연은 매우 긍정적인 효과를 창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용하기에 따라서는 적절하게 편집하여 경력으로 포함시킬 수도 있겠지만 정중하게 사양 의사를 밝혔다.

나는 이미 방송 출연의 경험이 있었다. 두 번째 작품- 굳이 제목을 말하지는 않겠다 -이 제법 잘 나갔던 덕택에 TV와 라디오에 초대작가로 한 번씩 출연한 경력이 있었다. 거의 1개 분대에 달하는 방송국 팀이 우리집을 방문하고 꼬박 하루를 소비하여 출판사와 교보문고까지 강행군하는 TV 출연은 생각 외로 힘들었지만 대체로 만족하게 끝마칠 수 있었다.

문제는 라디오였다. 드넓은 스튜디오에 들어가는 순간 목 부위가 석고상으로 변하기라도 한 것처럼 딱딱하게 응고되었다. 시작에 앞서 작가에게 설명을 듣고 진행자와 간단한 대담을 나눌 때는 그럭저럭 지나갔지만 방송에 들어가자마자 마치 목에서 콘크리트 조각이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그동안 지긋지긋하게 괴롭혔던 증상이 다시 발작한 것이었다.

나는 “말더듬이”였다. 말더듬인 나에게 30분이 약간 넘는 그날의 녹음은 표현하기 어려운 고문과도 같았다. 겨우 녹음이 끝난 다음 철인3종경기라도 마친 것처럼 그만 녹초가 되고 말았다. 대사가 그리 많지 않고 가족들과 했던 TV 출연에서는 그런 장면은 편집하거나 다른 것을 찍는 것으로 대체할 수 있었지만, 엔지니어들이 내려다보는 가운데 진행자와 둘이 마주 앉아 처음부터 끝까지 말로 일관해야 하는 라디오는 고역도 그런 고역이 없었다. 만일 또 다시 라디오에 출연할 일이 생긴다면 신정아처럼 아예 잠적하는 길을 택할 것이 분명하다.

이만하면 KBS의 토크쇼 출연 제의를 정중하게 사양할 수밖에 없던 이유를 충분히 서술한 것 같다.

해부학적으로 이상이 없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그렇듯, 나 역시 처음부터 말더듬이가 아니었다. 처음 말을 더듬게 된 것은 22여년이 지난 중학교 1학년 무렵이었다. 내가 입학한 중학교는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남녀공학이었다. 입학한 지 오래 지나지 않아 경복궁으로 사생(寫生)을 나왔는데, 그때 사건이 시작되었다. 사실 사생대회는 이른 봄 소풍이나 진배가 없었다. 화판(畵板)과 수채화 물감을 챙겨든 어린 남녀 중학생들은 그림을 그리면서 서로를 흘끔거렸다.

그림을 마친 나에게 초등학교 동창이었던 이웃 동네 여자아이들이 접근해 왔다. 그 아이들은 제법 예쁜데다 성숙해가는 기미가 뚜렷했다. 어쨌든 남자인 내가 용돈과 비상금을 털어 음료수와 아이스크림을 사주어야 했다. 경회루 앞의 벤치에 앉아 이러저런 이야기를 주고받거나 함께 거닐며 깔깔대다보니 정말 시간가는 줄 몰랐다. 나에게도 여자친구들이 생기게 될 것이 확실했다. 어느덧 집합 시간이 되어 헤어져야 했지만 다시 만날 약속을 정한 상태였다.

그림을 제출하려고 화판을 열었는데, 그 안에 있어야할 도화지가 사라지고 없었다. 아마 여자애들과 넋 놓고 어울렸을 때 빠져나간 것 같았다. 잠시 후 담임선생님이 "그림을 내지 않은 놈은 당장 나오라!"며 고함을 질렀다. 거기에 해당되는 학생은 내가 유일했다. 일단 나가서 사실대로 변명을 하려는 순간, 번쩍하는 고통과 함께 얼굴이 휙 돌아갔다. 입이 터져 피가 줄줄 흘렀다. 너무나 어이없는 상황에 멍하게 담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얼굴이 반대쪽으로 돌아갔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 했다.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에 버무려진 사랑의 매는 뺨을 20대 이상이나 갈긴 다음에야 그쳤다.

어린 학생에게 가해지는 무자비한 폭력은 주변의 모든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너무나도 충분했다. 씩씩거리는 담임의 표정을 보아서는 더 때리고 싶었지만 주변의 이목 때문에 억지로 참는 것 같았다. 잠시 후 담임이 내뱉듯 “네가 맞게 된 이유를 아느냐”고 말했지만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나중에 생각하니 그것은 폭력의 합리화에 불과할 뿐이었다. 내가 입을 다물자 담임은 크게 선심이라도 쓰는 것처럼 변명할 기회를 주겠다고 말했다. 사실대로 말하고 용서를 구하면 너그럽게(?) 사면하겠다는 판결은 주변에 몰린 사람들을 의식한 제스처에 지나지 않았다.

나도 잔혹한 폭력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든 변명을 하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숨이 콱 막혔다. 목구멍 아래에서 손이 뻗어 나와 혓바닥을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호흡을 고르려고 잠시 고개를 들었다가 그만 소스라쳤다. 얻어맞는데 정신이 팔려서(?) 여학생들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었다는 것을 그제야 인식하게 된 것이었다. 얼른 고개를 숙이다가 아까 함께 어울렸던 여자 아이 가운데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참으로 비참한 순간이었다. 담임에게 당한 폭력은 남자의 자존심에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가했다. 그때 당했던 모멸과 치욕은 죽어서야 지워질 문신처럼 깊고 선명하게 새겨졌다.

며칠 후 기가 막힐 일이 다시 발생했다. 조회시간에 발표된 사생대회의 수상자에 내 이름이 포함된 것이었다. 어이없게도 나는 ‘가작’ 가운데 한 명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담임이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에게 빨리 한 장을 그리라고 하여 내 이름으로 내게 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가작을 받고 정작 그 아이는 아무런 상을 타지 못했으니 담임으로서도 어이가 없었을 것이었다.

그날 종례시간에 상장과 상품을 수여했지만 도저히 받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묵묵히 고개를 떨어뜨리고 앉아 있는데 담임은 굳이 나를 앞으로 나오게 하여 상장과 상품을 수여하고는 수상소감을 발표하라고 말했다. 미안하다거나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등등의 사과성 발언을 한 다음 상장과 상품을 본래의 주인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그러나 그때도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기를 써도 두뇌에서 선별한 단어가 목구멍을 통과하여 공기 중으로 나오지 못했다. 엑기스 같은 진땀을 줄줄 흘리는 나를 아이들은 킬킬거리며 비웃었다. 그때는 정말이지 담임을 죽여 버리고 싶었다. 지금도 가끔씩 그런 꿈을 꾸다가 소스라쳐 깨어나고는 한다.

역시 여자아이들이 나를 못 본 척 외면했다. 정말 억울한 심정에 뭐라고 변명을 하고 싶었지만 혹시 말이 나오지 않을까봐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다음부터는 내가 피하게 되었다. 왜 내가 피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것 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작가가 된 다음 은사(恩師)님들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게 되었다. 그때마다 은사님들은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셨다. 이미 은퇴하신 은사님들은 잘 된 제자가 찾아오는 것처럼 기쁜 일이 없다며 눈물까지 글썽거리셨다. 하지만 그 때의 담임은 절대 찾아가지 않았다. 길거리에서 만나지 않은 것이 피차간에 다행스러웠다.

각설하고, 중학교 1학년에 시작된 언어장애가 지금까지도 나를 괴롭힌다. 그리 심각하지는 않아도 언제 말을 더듬게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중요한 자리나 처음 뵙는 분들을 만나는 자리는 참으로 곤혹스럽다. 특히 곤혹스러운 것은 전화로 이야기 할 때다. 통화를 하다가 갑자기 말이 끊기는 경우가 이따금씩 발생한다. 내가 그런 증상이 있다는 것을 아는 분들이야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겠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은 대단히 불쾌할 것이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전화를 받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 나에게 문자 기능이 있는 핸드폰은 정말 사랑스럽다.

말더듬이는 장애에 가깝다. 그 고통을 모르는 사람들은 천천히 말해보라고 하지만 그렇게 간단하다면 어느 누가 말을 더듬어 망신을 자초하겠는가, 말더듬이에게 천천히 말해보라는 것은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여 절뚝이는 사람에게 천천히 똑바로 걸으면 되지 않겠느냐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 말을 더듬는 것이 사회생활에 아주 치명적으로 기능하지는 않겠지만 자신감을 잃게 하고 눈치를 보게 만드는 것은 사실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심각한 손해를 가져올 수도 있다. 당장 나부터도 방송국의 출연 제의를 사양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방위병 시절에 보고를 제대로 하지 못해 당했던 고초를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신체를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는 등의 중증 장애는 아니지만 말더듬이가 편히 살기에 그리 세상은 그리 적합하지 못하다. 킥킥 웃거나 뭔가 모자란 사람으로 취급하기 때문에 더욱 고통스럽다. 말을 더듬는 것을 흔하게 있을 수 있는 현상의 하나로 받아들이면 고마울 것 같다. 우리 사회는 정상과 비정상의 구획이 너무 높고 견고하다. 비단 말더듬이처럼 가벼운 증상 뿐 아니라 모든 장애자들을 평등한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터넷한겨레 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말더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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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권 출판을 목표로 하는 재야사학자 겸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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