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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은 지금 아주 빠른 도시화의 걸을 걷고 있다.
ⓒ 오마이뉴스 김대홍
1960년 우리나라 도시인구 비율은 28.3%. 하지만 본격적으로 산업화가 이뤄지면서 도시인구는 1970년 50.1%로 농촌인구를 앞질렀고 30년이 지난 2000년엔 88.3%에 이르렀다. 건교부에 따르면, 2006년 8월 도시계획구역에 사는 인구(도시화율)는 무려 90.2%이다.

선진국 평균 도시인구 비율이 75%라는 점에 비춰보면 인구의 도시 집중은 산업화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대세처럼 보인다. 가파른 성장곡선을 그리고 있는 중국도 마찬가지. 과거 대부분 중국인이 농촌에 살았지만, 이제 중국인구 40%가 도시에 살고 있다. 2010년이 되면 13억 중국인구 중 절반 정도가 도시에 살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그런데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선 이런 대세를 거스르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농촌에 생태농장을 만들어서 도시로 떠나는 사람들을 붙잡겠다는 것이다. 게다가 '소농' 중심의 협업 농장 형태를 통해 기업농에 맞서겠다고 한다. 무모한 꿈일까, 새로운 대안일까.

지난 24일부터 25일까지 연변 '민들레마을(民德來村)'에서 열린 제3회 연변민들레생태문화예술절은 바로 그 대안의 꿈을 공개적으로 알린 행사다. 이번 축제에선 제12회 중국조선족발전연구회 학술세미나, 제1회 연변민들레전통된장 축제, 제1회 연변민들레생태쌀 꿀 축제가 열렸다.

고성장에 무너지는 연변조선족자치주

▲ 연길 공항에서 멀지 않은 강가엔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건설되고 있었다.
ⓒ 오마이뉴스 김대홍
24일 연길 공항에 내렸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글자는 '연길'이라는 뚜렷한 한글이었다. '延吉'이라는 한자는 그 옆에 나란히 있었다. '연길호텔' '삼꽃거리' '연길교' '국자거리' '신화거리' 등 모든 간판은 한글이 우선이고, 그 다음에 한자가 적혀 있었다.

민들레마을까지 안내를 맡은 이창화씨는 "연변자치주에선 모든 게 한글 우선"이라면서 "중국어를 전혀 몰라도 이 곳에서 불편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공항 주변에선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자전거가 많이 보였지만, 시내에 들어서자 택시와 버스, 개인 승용차 등 자동차가 자전거를 압도했다. 성장의 소리가 시내 곳곳에서 들렸다.

하지만 이런 발전이 연변자치주에겐 기회이자 한편으론 비극이다. 이미 성장의 고속계단에 몸을 실은 조선족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큰 대도시로 떠나거나 한국행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자치주 내 조선족 비율은 점점 떨어지고 있다.

2006년 연길시통계국이 발표한 바에 따르면 연길시 호적인구는 43만여명. 그 중 조선족인구는 24만8천여명으로 전체 인구의 58% 정도를 차지한다. 하지만 연변조선족자치주 전체로 범위를 넓히면 이 비율은 뚝 떨어진다. 현재 자치주 인구는 218만명. 전체 조선족은 84만명으로 채 40%가 안된다.

조선족자치주란 이름이 무색한 상황이다. 더욱 큰 문제는 조선족 비율이 낮아지는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 중국의 주 교통수단인 자전거. 하지만 지금 중국에선 경제 발전과 함께 자동차가 계속 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김대홍
이번 페스티벌에서 '우리 민족 문화와 치부의 길'이란 논문을 발표한 손춘일 연변대학 민족연구원 원장은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앞날에 대해 무척 비관적인 진단을 내렸다.

손 원장은 "많은 조선족들이 일확천금의 욕망을 안고 한국·러시아·일본으로 떠나거나 중국 관내로 떠나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이어 "조선족들의 이러한 대이동으로 인해 조선족 농촌마을이 빠르게 해체되고 있고, 특히 조선족 출생률 감소에 따라 조선족 학교도 잇달아 폐교되면서 민족교육의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에 따르면 1996년부터 2000년까지 4년간 연변조선족 인구는 해마다 마이너스 성장을 했고, 2000년에는 1999년에 비해 5013명이나 줄었다. 1990년대 초기 해마다 1만여명의 신생아가 태어난 데 비하면 10년 사이 출생률이 반 토막 난 것이다.

손 원장 또한 한국으로 떠난 조선족 덕분에 이 곳 사회가 많이 발전한 것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는 "한국이란 고국의 경제력 덕분에 연변조선족자치주가 다른 민족들과 다르게 상당한 경제적 혜택을 입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경제발전만 추구하다 보니 물질적인 부는 다소 만들었지만, 조선족사회의 정신문명이 피폐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의 지적엔 조선족이란 정체성이 사라질지 모른다는 우려가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이번 행사에서 '록색기지로 우리 민족의 삶의 근거지 건설하자'를 발표한 연변일보사 장경률 논설주임 또한 "급속한 인구이동으로 인한 농촌집거지의 해체와 소실, 이로 인한 교육수준의 저하와 인재 유실, 홍닝난, 발전위축 등 많은 문제점들이 노출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세계 녹색당 대회를 연변에서 치러보자"

대한민국 발전에 힘입어 고성장을 기록하고 있는 조선족 사회. 하지만 그 때문에 조선족사회가 무너지고 있다는 모순을 어떻게 이겨내야 할까. 민들레마을을 만든 현 연변민들레생태산업연구유한회사 리동춘 동사장이 고민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 지점이었다.

리 동사장이 민들레마을을 만든 것은 2004년. 1990년대 초반 흑룍강성 촌장을 맡고 있던 그는 한·중 수교 이후 사람들이 농촌을 떠나는 현실을 해결해야 했다.

그는 버려진 촌을 묶어서 '신합촌'을 만들었고, 여기서 산·학 협동의 생태공동체를 만들었다. 이 실험은 성공을 하고, 1998년 제9기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를 역임하며, 성공사례를 베이징에서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후 그는 이 성공사례를 전국에 퍼트릴 계획을 세웠다. 흑룡강성 사례는 도시인접형 성공사례, 농촌에서도 성공할 수 있다는 본보기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그 가운데, 생명평화재단 이사장이자 중국두레공동체운동 임진철 본부장을 만나게 된다.

▲ 리동춘 동사장은 연변조선족자치주 민들레마을에 '소농' 중심의 가족기업을 통해 생태공동체 실험을 시작했다.
ⓒ 오마이뉴스 김대홍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생명평화의 씨를 뿌릴 거점을 만들고자 했던 임 본부장의 뜻과 리 동사장의 뜻은 어렵지 않게 만났다. 이렇게 해서 1990년대 중반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김진홍 목사가 사들인 130만평의 땅 중 30만평을 기반으로 2004년 '민들레마을'(民德來村)을 만들게 된다. 여기서 '득래'는 순우리말인 '두레'의 중국식 '음차'(한자의 음을 빌려 우리말을 표기하는 일)다.

"동북아 평화를 위해서 한국(북한 포함), 중국, 일본, 미국, 러시아에 있는 한국동포들이 힘을 합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지요. 만약 이들의 노력으로 유럽연합(EU)와 같은 형태의 동아시아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면, 정치적 민족주의는 사라지고, 다원주의로서의 문화적 민족주의만 남을 것입니다. 저는 여러 민족과 인종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동북아 지역에서 그 터전을 마련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임진철 생명평화재단 이사장)

"두레마을은 단지 조선족들 잘 살자고 하는 일이 아닙니다. 점차 도시화, 산업화에 밀려 힘을 잃고 있는 생태의 꿈을 이곳에서 키우고 싶었습니다. 나중에 세계 녹색당 대회를 이 곳에서 치르는 게 꿈입니다."(리동춘 연변민들레생태산업연구유한회사 동사장)


현재 민들레마을에서 꿈을 일구고 있는 사람은 모두 10명. 리동춘 동사장과 문성근 부총경리, 현직 경찰인 이창화씨 등 3명과 함께 7명의 일꾼들이 이 곳에 상주하며 꿈을 일구고 있다. 10명이면 아주 적은 숫자다. 하지만 그들은 중국인 13억명이 꾸지 못한 꿈을 꾸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연변조선족자치주는 간판 등 모든 표기법에서 한글 우선 원칙을 지키고 있었다. 한자는 한글 다음에 썼으며, 지명이나 이름도 중국식 발음이 아니라 한글을 사용하고 있었다. 즉 '연길'의 경우 '옌지'가 아니라 '연길'이라고 발음했다는 뜻이다. 이에 따라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열린 제3회 연변민들레생태문화예술절(8.24-25)를 다룬 이번 기사에선 현지 발음 기준에 따라 중국식 발음이 아니라 한글 발음에 따랐다.


태그:#연변, #조선족자치주, #연길, #민들레마을, #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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