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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서가 지나면 모기도 입이 비뚤어진다"

산골에 살면 24절기를 더욱 절감하게 된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일년을 네 계절로 나누고, 이를 다시 세분하여 24절기로 나눴다. 우리 조상들은 이 24절기에 따라 농경생활과 관혼상제를 치르며 살아왔다. 이 절기가 21세기 오늘날에도 아주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진다. 새삼 조상의 슬기에 감탄한다.

▲ 용둔막국수집, 횡성~둔내간 6번 국도변 우천면 용둔리에 있다
ⓒ 박도
어제는 더위가 물러난다는 '처서(處暑)' 절기로 이제는 신선한 가을의 문턱에 들어서게 되는 셈이다. "처서가 지나면 모기도 입이 비뚤어진다"는 속담처럼 앞으로는 여름 내내 시달렸던 불청객 모기의 공습으로부터 다소 해방될 수 있는 게 가장 반갑다.

얼마 전 아내는 나에게 홀로 살기를 익히라고 열심히 강의하더니, 요즘은 실습을 시키는지 이런저런 일로 집을 비우는 일이 잦다. 하기는 푹푹 찌는 삼복더위에 마주 쳐다보는 것조차 짜증 나는 계절에 며칠씩 혼자 지내는 것도 피차 정신 건강에 좋을 것이다.

혼자 지내게 되면 아무래도 밥 먹는 시간이 들쭉날쭉하게 마련이다. 처서날인 어제 늦은 아침을 먹고 가장 하기 싫은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전재 고개 너머 우천면 두곡리에 사는 자작나무 미술관 관장이 별일 없으면 점심에 막국수라도 같이 나누자고 전화가 왔다.

감히 생각지 못했지만 얼마나 솔깃한 유혹인가. 그동안 나는 글이 잘 써지지도 않는 흙집 글방에서 얼마나 궁싯거리며 스트레스를 받아왔던가. 작품이 잘 되지 않자 정신착란을 일으켜 당신의 귀를 잘랐다는 빈센트 반 고흐나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권총 자살한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이해가 된다.

이럴 때는 기분전환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장마로 눅진한 이불들을 뙤약볕에 말리고 서둘러 글방의 안팎을 쓸고 닦고는 카메라를 메고서 12시 40분 횡성행 버스를 타고 전재를 넘었다. 두곡리 마을에 이르자 관장이 지프차를 몰고 어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가까운 용둔막국수집으로 갔다. 점심시간을 넘긴 때인 데도 차들이 길을 메우고 있다. 요즘은 맛있다고 입소문만 조금 나면 거리에 관계없이 사람들이 몰려든다.

▲ 소박한 차림, 막국수와 감자전
ⓒ 박도

담박하고 쫄깃쫄깃한 막국수

▲ 메밀전을 부치는 주인 김해수씨
ⓒ 박도
내가 늘그막에 시골로 내려와 살면서 시골사람들을 위하는 일은 그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를 진솔하게 써서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며 다소 그들에게 도움을 주는 일이다.

이태 전에는 이웃 마을인 정금리 큰터 손두부집 이야기를, 지난해는 우리 동네 오미자 이야기를 썼더니, 주인으로부터 내 기사가 다소 살림에 보탬이 되었다고 고맙다는 인사를 들었다.

어디 시골사람에게만 득이 되는가. 가짜에 너무 속아 진짜에 목마른 도시사람들도 이곳에 와 맛을 보고서 믿을 수 있는 진짜 토종 농산물과 강원산골의 순수한 토속 음식을 맛보게 되었다고 인사를 들으니, 이 얼마나 보람된 일인가. 하지만, 나는 여간해서 나서지 않는다. 서너 차례 시식해 보고, 주인의 순박함과 진정성에 믿음이 가고, 어쩐지 내 마음이 내켜야 취재한다.

관장과 둘이서 막국수와 감자전을 시킨 뒤 기다리는 시간, 마침 옆자리에 앉아있는 부부 손님에게 말을 붙였다. 그들은 서울 화곡동에 살고 있다는데, 몇 해 전 이곳을 지나다가 하도 차가 많이 늘어서 있기에 들어와 먹어보고는 단골이 되었다고 하면서, 간밤에는 오크벨리에서 묵고 일부러 예까지 막국수를 먹으러 왔다고 했다.

▲ 막국수의 맛은 손끝에서 나온다고 일일이 손으로 반죽한다.
ⓒ 박도
- 이 집 막국수가 왜 맛있습니까?
"맛이 담박하고 쫄깃쫄깃합니다. 한 마디로 옛날의 맛, 자연의 맛 그대로입니다."

건너편에서 메밀전에 좁쌀동동주를 마시던 원주 학성동에 산다는 손님이 불쑥 참견했다. 음식 맛은 손끝에서 나오는데 막국수가 정갈하고 주인의 정성이 듬뿍 들었기에 맛있다고 거들었다. 곧이어 푸짐하게 나온 막국수와 감자전을 들었다.

그새 나는 이집에서 네 번째 먹는데도 맛이 한결같고 뒷맛이 가뿐하고 개운했다. 맛의 비결을 더 자세히 살피고자 주방으로 갔다. 이 집은 어머니 김해수(63)씨와 딸 김진영(43)씨, 아들 김진승(32)씨가 역할 분담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주로 메밀전과 감자전을 부치고, 아들은 막국수를 뽑고, 딸은 양념과 손님접대를 맡고 있었다.

불시의 방문이라 통메밀 빻는 것은 볼 수 없었는데, 손님이 주문을 하면 그 즉석에서 메밀가루를 손으로 반죽하여 기계로 곧장 눌러 삶아 면을 찬물로 여러 번 씻은 다음 갖은 양념을 해서 손님상에 올리고 있었다.

▲ 용둔막국수를 만드는 사람들, 주인 김해수(왼쪽), 아들 김진승, 딸 김진영씨.
ⓒ 박도
김해수씨는 20년 전 하도 생활이 어려워 살림집에 그대로 이 가게를 냈다는데 아직도 간판만 떼면 일반 여염집과 다름이 없었다.

"손님이 드신다고 생각지 않고 그저 내 식구가 먹는 듯이 막국수를 말지요"라는 주인의 말이 바로 이 집 막국수 맛의 비결이라고 판단했다. 계산을 치르려고 하자 오늘은 특별한 날이라고 돈을 받지 않겠단다.

"나중에 아주 장사가 잘 되면 그때 대접받지요."

나는 굳이 셈을 치르고 지프차에 올랐다. 행여 나잇살 먹은 사람이 카메라 메고 다니면서 취재를 빌미로 공짜 밥 얻어먹는다면 얼마나 치사하고 볼썽사나운 일인가.

"우리 집에 가서 커피나 한 잔 들고 가세요."

관장은 자기가 치를 셈을 나에게 빼앗겼다면서 굳이 차머리를 자작나무 미술관으로 돌렸다. 자작나무 숲 카페 유토피아에서 향기 좋은 커피를 마신 뒤, 안흥행 버스를 타고 전재를 넘어 내 집으로 돌아왔다.

상큼하고 기분 좋은 하루였다.

▲ 자작나무 숲 미술관의 카페 유토피아
ⓒ 박도



태그:#막국수, #감자전, #횡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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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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