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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남 뉴코아를 점거한 여성 노조원들이 지하1층 킴스클럽 바닥에서 잠을 자고 있다.
ⓒ 황승민
정영희(41·가명)씨는 세 딸아이의 엄마다. 큰딸은 중학교에 다니고 다른 두 딸은 초등학교에 다닌다. 세 딸은 집에 있지만 정씨는 29일 저녁 현재 강남 뉴코아아울렛 점거 농성 현장에 있다. 29일 새벽 2시께 이랜드-뉴코아 노동조합원 300여 명과 함께 기습 점거 농성에 참여한 것이다.

정씨는 지난 2년 7개월 동안 홈에버(전 까르푸) 방학점에서 계산원으로 일했다. 임금은 많지 않았고 일은 힘들었다. 그래도 육아문제로 5년 동안을 전업주부로 지내다 구한 일자리이기에 만족하며 일했다. 보람도 느꼈따.

그 때까지만 해도 정씨에게 노조는 먼 나라 이야기였다.

"전업주부를 하기 전에 다니던 직장에서도 노동조합에 가입돼 있었지만, 그 때는 민주노총이 뭔지 한국노동이 뭔지, 우리 회사가 어느 노조에 속해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관심이 없었어요. 뉴스를 통해 보는 노사간의 다툼은 시시콜콜한 싸움박질로만 생각했죠."

"'노조'의 '노'자도 몰랐던" 정씨는 비정규직으로 일을 다시 시작했고, 지난해 4월 그가 다니던 까르푸는 홈에버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 때부터 많은 동료들이 자신의 일자리가 어떻게 되는 것인지 몰라 불안해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사측은 1년이 훨씬 지나서 올해 7월 10일에야 교섭에 나오더라구요. 심지어 '9월 30일까지 평화의 시간을 갖자'는데, 참 노동자를 그렇게 무시해도 되는 것인지…."

'평화의 시간'이라는 사측의 표현을 전하며 그는 쓴 웃음을 지었다.

"여보, 앞에 있으면 다칠 수 있으니까 조심해"

▲ 점거 노조원들이 집회를 열고 있다.
ⓒ 황승민
비정규직 관련 법이 시행되던 지난 7월 1일, 동료들이 해고되는 걸 보면서 그는 "비정규직 노동자로서의 자신의 처지를 깊이 생각했다.

그러나 동료들이 홈에버 상암점과 강남 뉴코아아울렛에서 점거 농성하다가 지난 20일 모두 연행됐을 때 현장에 있지는 못했다. 그것이 못내 미안했던 정씨는 이번 점거 농성에 망설임 없이 참여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더 이상 버릴 것도 없이 벼랑 끝까지 왔습니다. 우리에게 더 무얼 버리라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지난 20일 이후 이랜드 사측이 조금이라도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성의를 갖고 협상에 임했다면 나는 여기에 들어오지 않았을 거예요."

정씨는 담담하게 말했다. 이야기 도중 뉴코아 직원들과 용역업체 사람들이 몰려온다는 전갈이 왔지만, 정씨와 주변 여성 조합원들은 "올테면 오라지"라고 말할 뿐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몇몇 조합원들은 "그래도 여성 경찰들이 왔으면 좋겠다"며 여유(?)를 부리기도 했다.

조심스럽게 "아이들이 엄마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정씨는 "자세히 말한 적은 없지만 아이들도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을 것"이라고 답했다. 아이들 이야기를 하자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는 20일 새벽 기습 점거 직전인 새벽 1시께 딸에게 받은 휴대폰 문자메시지 이야기를 꺼냈다. 딸이 보낸 문자는 이랬다고 한다. "문 잠그려고 하는데, 엄마 안 와?"

딸은 엄마를 기다렸지만, 엄마는 '동지'들과 함께 강남뉴코아로 왔다. 그래도 남편이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해주기 때문에 그나마 마음이 가볍다. "앞에 있으면 다칠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남편의 말은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며 정씨는 웃어 보였다.

냉장고 밑에서 잠든 동료들 "우리, 끝까지 가야 해요"

▲ 점거 노조원들은 매장 안에 진열된 상품과 음식에 손 대지 않았다.
ⓒ 황승민
정씨를 비롯해 300여 조합원들은 도시락과 김밥을 배달시켜 먹었다. 경찰이 식사와 물품 반입까지 막지는 않았다. 오히려 경찰들은 반입되는 도시락 숫자를 세어보며 점거 노동자들의 규모를 짐작하고 있었다.

정씨는 "아직 불편한 게 없다"고 말했다. 물이 필요하면 정수기가 있고, 칫솔은 하나로 여러 조합원들이 돌려쓰면 된다. 치약과 화장지가 부족하지만 아직 견딜 만 하다고도 했다.

조합원들이 점거한 지하 1층 킴스클럽 매장에는 과일과 빵을 비롯해 먹을거리가 지천으로 진열돼 있다. 그러나 아무도 그 상품들을 건드리지 않는다. 정씨는 "투쟁이 장기화되고 상황이 힘들어져도, 차라리 굶어죽고 말지 물건에는 손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에어컨이 가동이 안 되는 실내는 덥지만, 음료수 코너 냉장고는 계속 가동이 돼 냉기가 나오고 있었다. 새벽 점거로 지친 여성 조합원들이 냉장고 밑에서 누워 자고 있었다. 그렇게 쓰러진 듯 잠이 든 동료 조합원들을 보며 정씨는 "어떻게 여기에 들어왔는데…, 끝까지 가야지"라고 말했다.

휴식도 잠시, 경찰들과 용역업체 직원들이 농성장에 몰려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남자 조합원들과 학생들은 출구로 급하게 뛰어갔다. 잠을 자고 있던 여성 조합원들도 일어나 집회를 열었다.

집회에서 "우리는 수적으로 열세지만, 싸움의 정당성은 우리에게 있기에 누구도 우리를 꺾을 수 없다"는 연설에 정씨를 비롯한 300여 조합원들은 "투쟁"이라 외치며 다시 싸움을 준비했다.

29일, 오늘도 정씨는 세 딸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기 어려워 보인다.

▲ 킴스클럽에는 에어컨이 나오지 않는다. 조합원들은 더위를 피해 음료수가 진열된 냉장고 아래서 잠을 잔다.
ⓒ 황승민

태그:#이랜드, #뉴코아 점거농성, #킴스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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