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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중 후반 무렵 한국 문학계에는 뚜렷이 드러나는 하나의 트랜드가 있었다. '후일담' 문학이라고 명명된 이 흐름은 박일문의 소설 <살아남은 자의 슬픔>, 최영미의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와 같은 세기말적 우울증과 패배의식이 짙게 깔린 작품들을 필두로 영화를 비롯하여 전반적인 문화현상에 영향을 끼친다.

현실 사회주의권의 몰락 이후에 생겨난 이 흐름은 비단 한국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무장 봉기와 공산주의 혁명의 성공에 대한 열망은 서서히 극단적이고 순수한 낭만주의의 한 종류로 인식되어갔다.

세기말을 목전에 둔 1997년에는 쿠바 무장봉기 혁명을 성공으로 이끈 '사령관' 체 게바라를 추모하는 음반이 프랑스에서 제작되고 전 세계적으로 그의 사진집이 제작되었으며 그의 얼굴을 담은 온갖 상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러한 현상은 실패했다고 규정내린 거대담론에 대한 향수이자 자신에게 정면으로 항거하던 위대한 혁명가의 일생을 로맨틱하고 열정적인 팝 아이콘으로 교묘하게 바꾸어 한 몫 챙기려는 자본의 타산성 짙은 의도였다.

공산주의 사회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남미대륙을 잠식해 들어가는 제국주의와 싸우기 위해 무장봉기노선을 선택한 엄격하고 영민한 한 혁명가는 단지 불꽃처럼 자신의 삶을 불사른 열정만이 도드라지는 방랑가이자 자유주의자로 인식되어졌다.

체 게바라의 젊은 시절을 담고 있는 영화 <모터싸이클 다이어리>가 이러한 트랜드에 일조하고 있다는 일부의 비판을 전적으로 면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제작자인 로버트 레드포드의 색깔이 너무 진하다는 평가와 함께 체 게바라에 대한 인물의 창조 과정이 거칠다는 지적이다.

로버트 레드포드는 미국의 독립 영화제인 '선댄스 영화제'를 창시한 인물로 사회의 부조리한 억압에 대한 항거, 자유, 고통 받는 민중에 대한 연민을 표현하지만 결국 '미국적 영웅신화' 이상을 넘어서지 못한다.

억누를 수 없는 열정과 길에 대한 무한한 애정으로 시작된 남미 여행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과 버금가는 브라질의 시네바노보의 경향을 띠고 남미 민중의 일상과 정서를 카메라에 옮겨온 월터 살레스 감독이지만 체 게바라가 본격적인 혁명가의 길로 들어서기 전 그의 삶의 길목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이 여행기를 그저 감동적인 휴머니즘으로 전환시킨다.

영화 <모터싸이클 다이어리>는 1952년 1월 의대생이던 23살의 체 게바라와 생화학을 전공하는 친구 알레르토 그라나다의 "억누를 수 없는 열정과 길에 대한 무한한 애정"으로 떠난 남미대륙 횡단 여행기이다.

이 영화의 시나리오는 체 게바라가 직접 쓴 <나의 첫 대여행>과 <더 모터싸이클 다이어리즈-남미여행에 관한 기록>, 알베르토 그라나다의 여행일지인 <체와 함께 한 남미여행>을 토대로 쓰여졌다.

젊은 그들은 안데스 산맥, 칠레, 아타카마 사막, 잉카의 쿠스코에서 아마존 강에 이르는 장대한 여로를 계획한다. 4개월간의 야심 찬 여행의 종착점 베네수엘라에서 어여쁜 아가씨들과 와인 잔을 기울이며 축하파티를 열 예정이었던 평범했던 대학생들은 8개월로 연장된 여행기간처럼 의도하지 못한 낯선 성장과 변화를 경험한다.

어릴 때부터의 고질병인 천식에 시달려야 했던 점을 빼면 중산층 가정에서 자라나 큰 기복 없는 삶을 살아왔던 체 게바라는 남미 대륙을 횡단하면서 서서히 변해간다. 아르헨티나의 음악가이자 남미 악기 수집가이기도 한 구스타보 산토라챠의 연주는 풍광과 지역에 따라 그 지역 특유의 악기로 팜파스의 초원과 거대한 사막과 맑은 호수를 변주해 낸다.

그는 길 위에서 "삶의 불공평함"을 경험하고 제국주의와 자본의 힘이 건강하고 생명력 넘치던 인디오들의 삶의 터를 유린하고 있다는 것을 목격한다. 그는 경찰과 동행한 지주의 말 한마디에 자신이 평생 살아왔던 고향으로부터 쫓겨나 광산으로 일자리를 찾아가는 공산당원 부부로부터 한없는 연민을 느끼며 침략자의 야만과 폭력으로 쓰러진 고대 문명으로부터 아득한 노스탤지어를 느낀다.

어둑하고 눅눅한 칠레 재래시장에서 만난 민중들, 아마존 정글 사이 고립된 섬 안에서 마주친 나환자들과의 만남은 이후 그의 인생을 향로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그들은 길 위에서 개인적 성장과 유적 인간으로서의 성숙을 동시에 경험한다. 월터 살레스 감독은 특히 산파블로 나환자촌에서의 체 게바라의 행적을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남겨놓는다.

50여 년 전과 다를 바 없는 남미 대륙의 현실

체 게바라 자신의 일기에서는 단지 한 단락으로 표현되어 있는 에피소드이나 영화에서는 중요한 클라이맥스 장면으로 처리된다. 나환자들이 머무는 섬과 그들을 돌보는 의사나 수녀들이 생활하는 곳을 가로지르는 긴 강이 게바라에게는 안타깝게 분열되어가는 라틴 아메리카 민족의 은유로 다가온다.

그는 떠나기 전날 밤의 환송파티에서 나환자들이 머물고 있는 섬을 향하여 검은 강 속에 뛰어든다. 차가운 강물 속에서 장시간 수영한다는 일이 고질적인 천식환자인 체 게바라에게는 마치 사형선고와 같다는 사실을 이미 복선이 되는 에피소드로 관객에게 일러둔 상태에서 고통스러운 수영장면을 목격하는 일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스릴보다는 "한순간 순간 숨쉬기 위해 삶 전체와 싸워와야" 했던 게바라의 투지에 숙연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촬영 내내 50여 년 전 체 게바라가 경험했던 남미 대륙의 현실을 여전히 느낄 수밖에 없었다는 월터 살레스 감독의 말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그러나 체 게바라가 그들과 함께 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이었음을 고백했던 것과는 달리 살레스 감독의 시선은 내내 타자에 머물러 있다. 단지 외부자의 시선으로 연민과 동정만이 가득할 뿐인 것이다. 아름답고 경이로운 남아메리카의 풍광을 어느 누구보다 인상 깊게 담아냈으나 그 곳에는 갑작스레 출현하는 영웅만이 존재할 뿐 인간은 부재하다는 사실이 아쉬울 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강유미 선생님은 현재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에 있습니다. 이 기사는 인권연대 웹진 주간 <사람소리>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체 게바라,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쿠바, #중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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