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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호식 씨가 건네 준 명함에는 상호는 없고 '각종 페인트 공사'라고만 적혀 있다.
ⓒ 송상호
평소 잘 쓰지도 않는다는, 그래서 텔레비전 받침대 서랍 깊숙이 넣어 두었다 꺼내 보이는 그의 명함엔 ‘각종 페인트 공사’라고 적혀있다. 그게 굳이 말하면 그의 직장 간판인 셈이다. 그리고 직함 하나 붙은 것 없이 ‘김호식(경기 안성 금광면, 52세)’이라는 이름과 주소 및 연락처가 적힌 게 다다. 하지만 엄연히 그는 34년을 페인트 칠 하나로 잔뼈가 굵은 전문 페인트장이로서 자영업을 하는 사장이라 할 수 있다.

18세에 가출하여 ‘일거리 찾아 3만리’

그가 처음 페인트칠 하는 일을 만난 것은 3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학교가 그렇게 다니기 싫어서 학교 다닐 때도 땡땡이를 생활화 하던 그가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하고 집에서 농사일을 도우며 살았지만, 그래도 늘 마음 한쪽으로는 ‘더 넓은 세상에 대한 동경’을 키웠단다.

드디어 18세가 되던 해에 마을 친구와 함께 더 넓은 세계로 일거리를 찾으러 몰래 가출을 감행한 것이다. 가방이 없어 종이로 된 비료 포대에 옷을 넣어 옆구리에 끼고 가출을 하니 그 몰골이 가히 웃길 수밖에.

처음엔 과수원에 머슴으로 취직해서 돈을 벌어 볼까 하고 무작정 온양까지 버스타고 갔다가 거기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다시 안성으로 돌아온 게 가출 이틀째였다. 그래도 사나이가 칼을 뽑았으면 썩은 무라도 자르자 싶어서 안성에서 충북 성환까지 몇 시간을 걸어서 정처 없이 일자리를 구하러 떠난 것이 운명의 직업을 만나게 된 계기라면 계기다.

페인트칠과 과수원 등을 겸해서 일하는 집에서 1년을 일하면서 그때 당시 돈으로 3만원이라는 연봉을 받고 페인트칠과 농사일을 배웠다고.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전국을 떠돌며 페인트칠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 길로 그는 전국구가 된 것이다.

마을 최초로 그의 집이 텔레비전을 장만하기도

▲ 김호식 씨는 34년을 페인트와 함께 보내면서 자녀 대학 공부 시키고, 자택을 마련하고 1500평의 농토도 마련하는 등 가장의 소임을 충분히 해냈다.
ⓒ 송상호
한때 그는 정말 잘 나갔다. 20대에는 페인트칠 하는 게 꽤 수입이 짭짤했다. 그래서 시골마을에서 최초로 그의 집이 텔레비전을 장만하는 바람에 마을 극장이 되는 호황을 누리기도 했다. 오토바이가 귀했던 시절 오토바이도 굴렸고, 공기총도 마련하기도 했다. 한 마디로 마을에서 돈 잘 버는 청년으로 소문난 것이다.

“그때 잘 나갔지유. 돈은 언제든지 내가 마음만 먹으면 벌린다고 생각이 들었으니께유. 쌀 한 가마니 만원 넘게 할 때 내 주머니에 20~30만원 씩 들고 다닐 때도 있었으니께유. 그렇게 돈 귀한 줄 모르고 살았지유. 그러다가 28세에 결혼하고 나서 저축하고 절약하는 걸 배웠으니. 그래서 학교 공부 안 한 거는 후회 되지 않는디 젊었을 때 돈 벌어서 모으지 못하고 흥청망청 쓰기만 한 게 후회가 되네유. 그랬음 지금보다 좀 더 윤택하게 살 수 있었을 텐디 말여유. 허허허허”

페인트 통 하나 짊어지고 전국 팔도 유람

정말로 페인트칠 하는 일 때문에 그가 전국에서 안 가본 곳이 별로 없을 정도다. 전국 팔도의 웬만한 도시는 다 가본 것이다. 가본 도시를 다 기억해서 읊어 보기도 어려울 정도다. 심지어 배타고 제주도까지 갔다 왔으니 더 말해서 무엇 할까.

그가 일당 1000원에서 시작해서 13만원 받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페인트 칠을 해본 곳은 일반 가정집, 학교, 주유소, 공장, 축사 등은 기본이고 경찰서,시청, 면사무소, 우체국, 교회, 사찰, 공군비행장 비행기 격납고까지 건물이라는 건물은 죄다 칠해보았단다.

또 한 번은 영광에서 비오는 날 일을 할 수 없어 동료와 함께 방파제에 놀러 갔다가 바닷 물에 휩쓸려 죽을 뻔 한 적도 있었다고. 겨울엔 제주도가 따스해 일거리라 있을 거라 생각하고 배타고 무작정 갔다가 1주일 넘게 생 고생만 하다 일도 못하고 돌아오기도 했고, 일한 돈을 받지 못하고 떼인 적도 있었단다.

주목적은 일하는 거였지만, 그렇다고 설마 일만 죽도록 했겠는가. 일을 하러 오가며 팔도 유람은 절로 되는 것이다. 관광과 생업이 동시에 이루어진 경우인 게다. 그러다보니 그만큼 팔도 유람을 많이 해본 사람도 드물 수밖에 없다.

페인트 통 하나 짊어지고 그는 한 시대를 유람하며 지내온 것이다. 남들은 돈 주고 한다는 그 유람을 그는 돈을 벌며 했으니 뭐가 아쉬울 게 있을까. 그런데다가 페인트칠해서 벌은 돈으로 자녀 둘을 대학공부 시켰고, 지금의 자택도 마련했고 1500평의 농토도 마련했으니 그 정도면 얼마나 훌륭한가.

아니 이 이상 얼마나 더 훌륭하기를 바라겠는가. 우리나라의 평범한 가장의 소임을 페인트 칠 하나로 충분히 감당했으니 말이다. 충분히 박수 받을 자격이 그에겐 있는 것이라 하겠다.

“그까짓 거 페인트칠, 아무나 하는 거 아니냐?”

▲ 30년 넘게 그와 함께 동행한 페인트 붓을 창고에서 꺼내 들고는 감회에 젖어들고 있는 김호식 씨.
ⓒ 송상호
“‘그까짓 거 페인트칠, 아무나 하는 거 아니냐?’라는 말을 들으면 속상하지유. 페인트칠을 아무나 하면 지 같은 사람이 밥 벌어 먹고 살 것 시유. 이것도 전문 분야인디 말유. 비 전문가가 칠하면 페인트가 줄줄 흘러내려서 바닥에 떨어지는 게 더 많고, 또 칠이 두꺼운 데는 두껍고 얇은 데는 얇기도 하고. 나무에 칠할 것인가, 콘크리트에 칠할 것인가, 지붕에 칠할 것인가에 따라 색깔 배합과 신나 배합도 달라지는 거 아뉴. 그렁께 조금 배워서 되것시유. 지같이 30년 넘게 해도 새로운 소재가 나와서 더 익히고 배워야 하는 디 말유.”

요즘은 일거리가 자꾸 줄어드는 추세이긴 하지만, 그가 일해 놓은 것은 ‘꼼꼼하다, 뒤처리가 깔끔하다’는 입소문을 타고 알음알음해서 일거리가 들어와 한 달에 보름 이상은 일을 하게 된다고. 명함도 제대로 돌리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많지는 않지만 일이 끊이지 않고 계속 있는 것은 다 그의 성실함 때문이라 할 것이다.

▲ 지금도 그의 집 창고엔 페인트 들이 가득하다.
ⓒ 송상호

덧붙이는 글 | 이 인터뷰는 7월 4일 김호식 씨 자택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태그:#김호식, #페인트, #페인트 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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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 목사질 하다가 재미없어 교회를 접고, 이젠 세상과 우주를 상대로 목회하는 목사로 산다. 안성 더아모의집 목사인 나는 삶과 책을 통해 목회를 한다. 그동안 지은 책으로는 [문명패러독스],[모든 종교는 구라다], [학교시대는 끝났다],[우리아이절대교회보내지마라],[예수의 콤플렉스],[욕도 못하는 세상 무슨 재민겨],[자녀독립만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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