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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요즘의 서울대 논술시험을 통과할 자신이 없다. 명색이 50년 동안 글을 썼다는 나도 이런 방식의 글쓰기 시험엔 자신이 없다. 세상에 글쓰기의 전범(典範)이 어디에 있느냐. 글쓰기의 틀은 또 무엇이냐. 백 사람이 글을 쓰면 백 개의 글이 다 달라야 하는 것 아니냐."

전 이화여대 석좌교수 이어령씨가 '서울대 논술시험을 거론하며 현행 글쓰기 교육의 문제점을 비판'한 글이다. 우수인재를 뽑는다는 명분으로 소위 주요대학이 출제하는 논술이라는 과목은 솔직히 말해 대학의 도덕성까지 의심케 하는 시험이랄 수도 없는 억지다. 50년간 글 을 써 온 전직 대학교수도 '자신 없다'는 논술을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도 않고 어떻게 고교생들이 풀이할 수 있는가?

논술문제가 어떤지 모 대학기출문제를 한 번 살펴보자

※ 다음 제시문을 읽고 논제에 답하시오.

가) 이른 바 천하를 평정함이 그 나라를 다스림에 있다는 것은, 윗사람이 늙은이를 늙은이로 제대로 대접하면 백성에게...-주희(朱熹) <대학장구(大學章句)>전(傳) 10장(章)

나) 우리는 눈을 뜨자마자 신문이나 텔레비전을 통해 새로운 소식을 접하며, 일터에 나가서도 하루의 많은 시간을 컴퓨터와 함께...-심재기 외 3인 <고등학교 국어생활>(지학사)

다) 세계적 대변혁의 물결은 지구상의 모든 사람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물결은 우리에게 개인적·국가적으로 큰 도전으로 작용...-김재한 외 9인 <고등학교 사회>(법문사)

라)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함께 기업 이윤의 사회 환원도 소홀히 할 수 없다. 물론 기업 이윤의 사회 환원은 어디까지나 기업 형편에 따라...-조도근 외 6인 <고등학교 경제>(두산)

마) 대학의 임무는, 합리적인 사고와 문명화된 평가의 양태들이 결실을 낳을 수 있는 것들인 한, 미래를...-화이트 헤드(오영환 외 옮김) <열린 사고와 철학>(고려원, 1992)

논제 1.

Ⅰ. 제시문 가), 나), 다), 라), 마)는 각기 우리 사회에 필요한 덕목 내지는 요소를 담고 있다. 각 제시문의 핵심 내용별로 한국 사회에서 부정적으로 드러난 사례를 지적하고, 그에 대한 전반적인 해결책을 논술하시오.(40점, 띄어쓰기 포함하여 901자 이상 1,000자 이내)

Ⅱ. 다음 제시문 가)에서 제시문 바)까지를 읽고 논제에 대하여 답하시오.


제시문 가)는 우리나라의 경제지표 및 의약품 생산에 대한 현황을 나타내고 있으며, 제시문 나), 다), 라), 마)는 제시문 가)에 직접 또는 간접으로 관련된 설명이다.

정상적인 교육과정을 이수한 학생들의 실력으로는 이런 문제를 풀이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데 그 유명하다는 대학은 왜 이런 문제를 출제할까? 수험생들은 국영수를 비롯한 대부분의 입시교과목은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는다. 그렇다면 결국 논술이나 면접, 구술성적이 자신의 원하는 대학의 합격여부를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논술의 점수를 잘 받는 비법은 뭘까?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으니까 사교육에 의존하라는 말이고 사교육이란 돈이 많은 부모가 양질의 사교육을 시킬 수 있으니 결과적으로 경제력으로 자녀의 진로가 결정된다는 뜻이다.

대학이 의도적이든 아니든 입시결과가 사교육에 의존한다는 것은 공교육의 황폐화를 불러 오게 된다. 아이들이 학원에서 공부하고 학교에서는 자도록 만들고 사교육비문제로 가정 파탄에 이르게 하는 원인제공자가 일류대학이라는 뜻이다. 일류대학이 자신의 학교에 똑똑한(?) 학생을 뽑는다는 명분으로 치르는 논술시험은 이렇게 공교육만 황폐화시킬 뿐만 아니라 가정 파탄을 불러 오는 주범인 것이다. 모든 학문이 그렇듯이 체계적인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기형적인 암기과목이 될 수밖에 없다. 위의 예시문에서 알 수 있듯이 시간에 쫒기며 원하는 대학의 기출문제를 공부하다보면 결국 시험을 치기 위한 또 다른 암기과목이 될 수밖에 없다.

대학이 금과옥조로 생각하는 논술이란 '암기력이 뛰어난 학생을 선발하기 위한 학문'이 아니라 '철학의 다른 이름'이다. 철학이란 사회현상을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고의 지평을 확대하기 위한 학문이다. 자연의 법칙성을 찾는 게 인문과학이라면 사회의 법칙성을 찾는 과목이 사회과학이다. 사회과학과 인문과학이 음식이라면 이 음식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 대학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다는 막가파식 사이비 지식인이 아니라면 내일의 주인공인 청소년들이 합리적이고 창의적인 사고를 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것이 순리다.

그렇다면 제대로 된 논술이란 무엇일까? 대학이 꼭 논술을 출제하겠다면 '자신의 생각을 갖고 있는가?' 여부를 파악하는 문제여야 한다. '제시문 (가)와 (나)를 읽고 (다)의 관점에서 서술하라'는 식으로 예상 문제를 사교육을 통해 연습하는 논술은 '암기력이 뛰어난 학생을 선발하겠다'는 변형된 본고사에 다름 아니다. 양심이 있는 학자라면 이런 식으로 지적 수험생들을 청맹과니로 만들게 아니라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에서부터 민족이며 국가며 사회현상을 인식할 수 있는 사고의 폭을 넓힐 수 있도록 기회를 준 뒤 출제하는 게 순리다. 대학이 교육자적인 양심이 있다면 논술을 출제하기에 앞서 교육과정 개편운동부터 벌여 고등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칠 수 있도록 절차를 밟는 게 옳다.

기준이 없는 판단은 이기적이거나 이해타산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 최소한 논술이 학생들에게 학문적인 의미가 있게 하려면 '기본적 가치와 보편적 가치, 사회적 가치, 개인적 가치'의 우열을 구분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이와 함께 '소수의 이익과 다수의 이익이 충돌할 땐 소수보다 다수의 이익을 우선'할 수 있는 판단의 근거는 가르쳐 줘야 한다.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흑백논리가 지배하는 사회, 합리적인 사고를 거부하는 사회에서는 청소년들이 평생을 살아가면서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는 판단 기준을 가르쳐 주는 것이 지식인들이 해야 할 도리요, 학문의 양심이다.

현행 입시교육은 상식적으로 이해하지 못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수월성이라는 수요자 중심의 교육이 그렇고 교과목의 편식은 상상을 초월한다. 입시준비에 날밤을 세는 고등학교에서는 아예 2학년부터 자연반과 인문반으로 나눠 자연반에서는 사회과학을 가르치지 않고 있다. 물론 1학년에서 '통합사회'라는 이름으로 11개 학문을 책 한권에 묶어 일년간 배우게 하지만 그 정도 사회과학 지식으로 평생을 살라는 것은 횡포다. 여기다 시험문제를 풀이하다 보낸 세월에 어떻게 판단의 근거가 되는 철학이며 논술을 배울 수 있겠는가?

대학은 이제 양심을 회복해야 한다. 본고사를 치를 수 없다니까 엉뚱하게 논술이며 면접, 구술이라는 이름으로 학생들을 선발하겠다는 작태는 중단해야 한다. 이름이 논술이지 또 다른 암기과목인 논술을 만들어 한창 성장기에 있는 학생들을 암기나 시키는 기계로 만들어서야 되겠는가? 설사 우수인재선발을 위해 그랬다 치더라도 따지고 보면 우수한 인재를 제대로 길러내기나 하고 있는가? 보도에 의하면 '서울대학교가 내년부터 이공계 신입생에 '우열반'을 편성하기로 했다'고 한다. 말이야 '신입생들의 학력 편차가 갈수록 커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우수학생들을 뽑아 고시나 공무원 시험 준비를 시키고 있는 현실은 어떻게 변명할 것인가? 공교육을 황폐화시키는 일류대학의 논술고사는 폐지해야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유 포트와 김용택과 함께하는 참교육이야기{http://chamstory.net/}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논술 폐지, #3불정책, #글쓰기 교육, #본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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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의 참교육이야기(http://chamstory.tistory.com/)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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