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유럽의 여러 나라를 돌다 보면 왠지 여행자는 정치적이 되어 간다. 미국이나 중국처럼 "엄청 크다"는 제 일감의 느낌을 주는 나라는 러시아를 제외하고는 한 나라도 없다. 다 합쳐도 오스트레일리아 대륙보다도 작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곳에 30여 개국, 그러나 그 나라들은 모두가 조금씩 다르다. 그냥 다른 게 아니라 다른 것이 바로 그 나라의 특징들이 되고 있다.

런던에는 위엄이 있고, 파리에는 예술이 있고, 밀라노에는 패션이 있고, 마드리드에는 정열이 있고, 하이델베르크에는 낭만이 있고, 로마에는 추억이 있다. 그것을 모아 보노라면 결국 한곳으로 모인다.

"태초에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 하시느리라..", 즉 기독교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쓸 때까지는 기독교는 말하자면 오히려 정치학의 필드(Field)였다고도 할 수 있다. 교황은 하느님의 권위를 가지고 황제는 땅위의 군사력을 가지고 권력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 하던.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주라" Give to Caesar what was Caesar's, give to God what was God's. -누가복음 12장 17절-

로마 제국에서 처음에는 한 나라로 시작되었다가, 게르만이 이동하고, 슬라브가 남하하고, 바이킹이 쳐 내려오고...모였다가는 쪼개지고, 연방이 되었다가는 흩어지고, 바다를 건너가 유나이티드 스테이츠(United States)를 만들고, 이제 다시 EU로 뭉치고...왜 그랬을까? 유럽사의 키 워드는 무엇인가?

피(Blood)인가, 생각(Idea)인가, 종교(Religion)인가, 생산물(Products)인가?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 밀라노의 대성당(Dome)
ⓒ 이재기
그런 의미에서 이탈리아 여행길은 정치적인 것에서 다소 벗어난다. 걸핏하면 노조파업으로 공항이 마비돼 짐을 찾는 데 골탕 먹는 것만 제외한다면.


밀라노(Milano)에서 열차를 타고 이태리의 북부 끝에 다다르면, 알프스에 둘러싸인 호수를 끼고 작은 중세 도시 코모(Como)가 나온다. 호수를 건너면 바로 스위스의 루가노(Lugano)다. 그 작은 도시 코모는 현대와 중세 그리고 고대까지도 함께 품고 있었다.

▲ 밀라노의 패션거리, 나폴레오네
ⓒ 이재기
성벽을 끼고 돌자, 작은 카페가 있었다. 크리스마스 카드에 나오는 종 달린 문을 열고 들어 가면 실내는 18세기 쯤, '소피아 로렌' 이 젊을 때 모습으로 햄버그를 팔고 있었고, 늙으면 그리 될 '톰 크루즈' 가 에스프레소를 날라다 주었다. 그들의 가벼운 윙크와 미소는 첫 눈에 사람을 반하게 만들어 버린다.

"이데아 코모"(Idea Como)라는 실크 전시회(Silk Fair)가 매년 개최되면서 유행을 창조하는 곳이기도 하다. "코모가 있었고, 문명은 있었다" (Como was there , there was civiization!)라는 표어는 그들의 자존심이었다.

베르가모(Bergamo)에서 하룻밤 잔다는 것은 몽정(夢精)하는 밤의 느낌이다. 침대 옆 탁자 위에는 레드와인 한 병과 과일 담은 바구니가 정물화처럼 놓여있었고, 와인 글라스가 유난히 목을 뺀 채 두 개가 나란히 엎어져 있었다. Your pleasure is our business! 가 ㅅ자로 각을 세우고 얌전히 앉아 있었다.
▲ 베르가모 교외
ⓒ 이재기
침실 천장은 "로마의 휴일" 처럼 '오드리 햅번'의 깜찍스런 목놀림을 따라 문양을 만들고 있었다. 아침 햇살을 받으면서 커튼을 열어젖히자 중세 광장이 바로 눈앞에 전개되었다.

광장 위로는 "마지막 20세기들" 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밀레니엄의 끝 장면을 베르가모만큼 연출 할 수 있을까. 베르가모는 단추(button)생산으로 200년을 살아왔던 곳이다.

베르가모에서 베네치아(Venecia)까지는 열차로 3시간. 베네치아는, 셰익스피어의 "베니스 상인"이 빚 독촉을 하면서 살을 베겠다고 나서던 바로 그곳이다.

▲ 베네치아
ⓒ 이재기
"여러분! 이곳은 시차(時差)가 심합니다. 여러분의 시계를 16세기로 맞추세요."

베네치아의 가이드는 재치 있는 가이드를 시작했다. 배 안에는 미국인들인 할아버지 할머니, 유럽인들 아저씨 아줌마들로 가득 찼고, 드문드문 동양인 신혼부부가 몇 쌍 보였다.

"...그러나 그 시절은 어려웠습니다... 여러분들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이 수 없이 죽어 갔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 곳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절은 우리나라도 어려웠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진주성이 함락되었고 불국사는 불탔습니다.

"...그들은 여러분이 오실 것을 오랫동안 기다렸고 이제 여러분들은 왔습니다..."

▲ 베네치아 산 마르코 광장
ⓒ 이재기
배가 산 마르코 광장 선착장에 도착하자 비둘기 떼들이 놀란 듯 우루루 흩어져 날라갔다. 베네치아는 물위에 떠 있었다. 그러니 왠지 숙박하기는 싫은 곳이었다. "살을 베되 피를 흘려서는 안된다."

▲ 피렌체 시가지
ⓒ 일본의 유럽 여행 안내지
피렌체(Firenz)는 지금도 르네상스가 현재진행형으로 계속되고 있다. 단테와 베아트리체가 중세의 옷차림으로 지금 만나도 어울릴 풍경, 어디선가 마키아벨리가 걸어 나와 "군주론"을 토해내도 좋을 광장, 그런 것들이 거리를, 동네를, 골목길을 이어가고 있다. 그냥 걸으면 된다. 목이 마른가. 그러면 칵테일 한 잔을...!

피렌체의 "진 소다와 오리브의 맛"은 프랑스도 영국도 그 맛을 내지 못한다. 한 철이 지난 뷔통, 샤넬, 크리스챤 디오르, 구치, 프라다, 베르사체, 알마니들이 피렌체에 모여 들었다가 멀리 동양에서 온 보따리 장수에게 넘어갔다.

빈치(Vinci) 마을에서 태어난 레오나르도(Leonardo), 그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다. 이탈리아 중부의 몬테카친이라는 작은 온천을 지나자 올리브 밭이 계속 펼쳐졌다. 햇빛은 반 고흐의 그림처럼 잘린 조각으로 뿌옇게 흩어지고 있었다. 버찌나무가 동구 밖을 감싸는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 다빈치의 생가.
ⓒ 이재기
빈치 마을은, 거장(巨匠)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태어난 곳으로는 초라한 산간이었다. 인적도 드물었다. 풍경화를 그리기에도 마땅치 않은 곳, 다 빈치의 생가는 외롭게 500여 년을 지내오고 있었다. 위대한 인물의 탄생지가 관광지가 된다는 것도 알게 모르게 정치성을 띠게 된다. "끌어 들이지 말고 그대로 두라...그것이 다빈치를 위한 것인 줄도 몰라!"

이탈리아는 그렇게 대충 합의 본 것일까? 관리인의 나이 든 얼굴은 오히려 반 고흐의 "닥터 가젯"쪽을 닮고 있었다.

사실, 루브르 박물관에 걸려져 있는 다 빈치의 진짜 "모나리자"는 미술전집의 잘 찍힌 사진보다도 오히려 못하다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오르세 미술관의 반 고흐의 그림들은 미술전집의 그것보다는 한결 진짜답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피렌체에서 프랑스의 남단, 니스(Nice)로 넘어가는 비행기는 쌍발 프로펠러가 달린 작은 24인승이었다. 국제선이었지만 일정도 확인 안 되는 장난감 같은 비행기였다. 일정은 니스에서 스페인의 마드리드(Madrid)로 가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저게, 피레네(Firene)를 넘어 갈 수 있을까?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