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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 자유형 400m 결승에서 1위로 골인한 박태환과 3위에 그친 호주의 해켓의 사진을 대조적으로 편집한 <시드니모닝헤럴드> 인터넷판.

"코리언 틴에이저 박태환이 호주의 '스포츠 수도' 멜버른에 폭풍을 몰고 왔다."(채널7 '선 라이스' 프로그램의 진행자 멜리사 도일)

"3월 25일 밤은 새로운 중장거리 수영의 제왕(New distance swimming king) 박태환을 등극시키기 위한 골든 나이트였다."(채널9 '투데이' 프로그램 스포츠 리포터 커맨 로렌스)

"수영의 왕국에서 일어난 17살 틴에이저 박태환의 쿠데타였다. 그러나 모두가 박수갈채를 보낸 아름다운 반란이었다."(채널10 아침뉴스 진행자 빌 우드)


"800m, 1500m에서 똑같은 일 벌어질 수도"

'모닝 애프터(morning after)'라는 단어는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닌다. 숙취, 씁쓸한 뒷맛, 각성의…. 또한 해상재난을 그린 영화 <포세이돈 어드벤처>의 주제가 제목이고, 호주에서 판매되는 사후 피임약의 상표이기도 하다.

3월 26일 아침에 시청한 호주의 대표적 방송3사 프로그램은 마치 대재난의 밤이 지나간 아침의 풍경이었다. 1991년부터 무려 16년 동안 남자수영 400m자유형을 호령해오던 호주의 전설이 끝나버린 후였기 때문이다.

씁쓸한 뒷맛과 각성이 뒤섞인 아침 '모닝 애프터'. 그러나 호주언론들은 하나 같은 목소리로 새로 등장한 제왕에게 빛나는 찬사와 함께 무지갯빛 전망을 펼쳐보였다. 다음은 수영선수 출신 채널9 스포츠리포터 지안 루니의 코멘트다.

"어젯밤의 사건(?)이 꿈이 아니고 현실이었다면, 앞으로 펼쳐질 800m, 1500m 남자자유형에서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다. 그건 꿈이 아니고 생생한 현실이었다."

마치 한국TV를 시청하는 느낌

아침 6시에 시작되는 호주의 아침방송은 시청률이 아주 높아서 방송사들이 사운을 걸고 시청률 경쟁을 벌인다. 특히 상업방송 3사는 뉴스를 겸한 모닝쇼로 출근을 준비하는 시청자들에게 다가간다.

3월 26일 아침의 메인메뉴는 단연 한국에서 온 '원더 보이' 박태환이었다. 마치 한국TV를 시청하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박태환 뉴스가 30분 단위로 반복적으로 보도됐다.

마지막 50m에서 차례로 앞선 선수들을 제키면서 마침내 두 손을 번쩍 들어올리는 장면. 그 경기를 중계한 데릴 워랜의 흥분한 목소리가 귀가 멍멍할 정도로 들려왔다. "믿을 수 없는 마지막 스퍼트입니다. 17살 소년 박태환, 한국 최초의 세계수영선수권대회 금메달!"

호주TV들의 호들갑(?)은 25일 심야에도 있었다. 박태환의 경이로운 정상정복을 생중계한 채널9은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세계수영선수권대회 하이라이트를 특집편성해서 박태환의 경기모습과 전문가의 해설을 방영했다.

이렇듯 박태환의 쾌거를 자기나라의 경사처럼 보도하는 호주언론의 행태를 두고 호주의 저명한 심리학자 데이드레 앤더슨이 한마디 했다. "호주국민들이 입은 정신적 외상(trauma)을 호주언론들이 더 깊게 만들고 있다"라고 말한 것.

▲ 호주 일간 <더 데일리 텔레그라프>지는 박태환이 1500m 경기에서 해켓의 올림픽 3연패를 저지할 수 있는 커다란 위협으로 떠올랐다고 보도했다.
치명타를 입은 호주 수영계

앤더슨의 이런 지적을 반영이라도 하듯 호주의 유일한 전국일간지 <디 오스트레일리안> 26일자 신문은 '400m 왕조의 끝(End of 400m dynasty)'이라는 타이틀의 기사에서, 지난 16년 동안 호주가 이 종목에서 기록한 화려한 역사를 소개했다.

1991년 키에른 퍼킨슨이 세계신기록을 수립한 것을 기점으로 2005년에 그랜트 해켓이 우승한 기록을 정리해서 보도한 것. 키에른 퍼킨스(1994) 이안 소프(1998, 2001, 2003) 그랜트 해켓(2005)이 그 영웅들이다.

이런 전설적인 기록이 중단됐으니 앤더슨이 '호주국민들의 트라우마' 운운하는 것도 무리가 아닌 듯싶다. 그러나 호주국민의 트라우마 이상으로 큰 정신적 외상을 입은 건 호주 수영계다.

세계수영선수권대회가 지난주부터 시작됐지만 그동안은 다이빙, 싱크로나이즈와 수구 등이 주로 진행됐다. 수영대회의 하이라이트인 경영종목은 25일에 비로소 시작됐다. 그것도 경영종목 첫 결승이 남자 400m자유형이었다.

로드 아레나 레이버 경기장을 꽉 메운 관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처음으로 TV생중계로 진행된 경기의 첫 번째 시상식에 호주국기가 아닌 태극기가 올라가고 애국가가 울려퍼진 것.

이건 경기 외적인 호사가들의 입방아이지만, 2GB라디오 토크백 쇼에 전화를 건 한 청취자는 "그랜트 해켓의 금메달이 위험했다면 금메달이 거의 확실시되는 여자자유형 4X100m 계영을 먼저 진행했어야 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태환에게 아낌없는 박수갈채를 치면서도 호주국민들이 입은 정신적 외상의 일단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여자자유형 4X100m 계영 시상식은 박태환의 수상 바로 다음에 이어졌다.

▲ 박태환 선수가 25일 세계수영선수권 대회 자유형 400m에서 1위로 골인한뒤 두 손을 들어 기뻐하고 있다.
ⓒ 연합뉴스/AP
숨 막히는 미국과의 수영 자존심 경쟁

우선 이번 2007년 세계수영선수권대회가 열리고 있는 멜버른은 자타가 공인하는 '호주 스포츠의 수도'다. 게다가 호주는 전통적으로 수영강국으로서의 자존심이 아주 강하다. 더욱이 미국과의 라이벌 의식은 다른 나라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어디 그뿐인가, 최근 호주수영의 간판스타인 이안 소프가 은퇴한 뒤 그랜트 해켓은 호주수영의 대들보가 됐다. 그래서 이번 호주대표팀의 주장을 맡고 있다. 결국 호주 스포츠의 심장부에서 수영강국의 대들보가 무너진 꼴이 된 것이다.

호주는 전통적인 수영 강국으로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 무려 11개의 금메달을 따냈다. 그러나 최근 상승세를 타고 있는 미국 수영 팀 때문에 바짝 긴장하고 있다. 그동안 이안 소프의 기세에 눌려 호주 팀에 연전연패한 미국 팀은 아테네올림픽에서 마침내 마이클 펠프스의 활약으로 역전했다.

이런 식의 경쟁은 이번 세계수영선수권대회는 물론이고 내년 베이징올림픽까지 이어질 전망이다. 그런데 박태환의 변수가 생긴 것이다. 물론 박태환이 미국의 펠프스와 경쟁해서 이길 가능성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호주의 입장에서) 금메달이 거의 확실시 되는 그랜트 해켓의 3종목을 통째로 빼앗아갈 가능성이 훨씬 더 높은 것.

해켓의 축하, 관중의 박수갈채, 언론의 찬사

이렇듯 호주국민과 수영계가 속앓이를 하면서도 겉으로는 의연한 태도를 잃지 않는다. 수영 강국다운 면모이기도 하지만, 호주가 주최국에다 수영의 변방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에서 큰 경사가 났는데 째째한 모습을 모일 수 없다는 측면이 더 강하게 느껴진다.

어찌 됐건 동메달을 걸머쥔 해켓은 박태환을 아낌없이 축하했고, 경기장을 꽉 메운 관중들도 환호와 박수갈채를 보냈으며, 호주언론들도 찬사 일색이다. 오히려 박태환이 기쁨을 자제하는 모습이었다.

작년에 어깨수술을 해서 완전하게 회복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 해켓은 일체의 변명 없이 "박태환의 기록이 모든 걸 말해준다. 그는 아주 열심히 훈련했고 400m에 집중해서 좋은 결과를 얻었다. 박태환은 분명히 오늘 밤의 영웅이며 앞으로 1주일 동안 그의 날들은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해켓의 말을 보충이나 하듯 "3월 25일 밤은 새로운 중장거리 수영의 제왕 박태환을 등극시키기 위한 골든 나이트였다"라고 박태환을 극찬한 채널9 커맨 로렌스가 보도를 마무리하면서 남긴 다음과 같은 코멘트가 아주 기분좋게 들렸다.

"그는 17살이다. 박태환이 마지막 50m에서 보여준 환상적인 스퍼트는 끔찍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우리는 이번 주말에 남자자유형 800m와 1500m에서 똑 같은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베이징올림픽이 박태환의 하이라이트가 될 것이다."

태그:#박태환, #호주 언론, #세계수영선수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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