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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용산구 소재 '효창원'(孝昌園)이 일제강점기 탄압에 이어 해방 후 '독립선열묘역'이 된 뒤에도 탄압 받았다고 한다면, 일제시대도 아닌데 있을 수 없는 망발이라고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는 사실일 뿐 아니라 효창원은 그러한 가학성을 간직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부에서 추진 중인 '효창공원독립공원화'에 대한 문제는 뒤에 기술하고, 효창원 탄압 얘기부터 하겠다.

문효세자묘소의 통칭인 '효창원'

@BRI@221년 전 <문효세자묘소도감의궤>와 비문에 의하면, 조선조 22대 왕 정조의 장자가 1786년(5세) 창경궁 별당에서 사망하자 시호를 '문효', 사당을 '문희', 묘소를 경기 고양 율목동 (현 용산구 효창원)에 정하고 묘 이름을 '효창'이라 지었다. 이 '효창'에다 세자묘와 왕의 사친묘 '원소'(園所)의 준말인 '원'을 합자한 것이 문효세자묘소 통칭인 '효창원'이다.

또한 세자묘 좌향을 임좌병향(壬坐丙向)에 두고, 그 1시 반과 9시 반 방향에서 솟은 물이 세자묘 앞에서 합쳐져 현 효창운동장 끝 지점의 '연못'을 채우고 한강으로 흘렀는데 이 연못은 묘소의 배산임수(背山臨水)로서 선대-후대간 생성-소통을 의미한다. 그런데 필자가 패철로 방향을 재는 과정에 221년 전 문헌에 지적된 1시 반 방향의 물이 여전히 나오는 것을 확인하였다.

울창한 숲으로 가꿔진 효창원 영역은 과거에 동쪽으로 용산 청파로, 서쪽으로 마포 마포로, 남쪽으로 용산 도원동과 마포 도화동에 이르렀는데, 이는 255만평의 여의도 면적에 3분의 2 크기이거나 절반 크기로 추정된다.

효창원의 시련은 1894년 5월 청ㆍ일 전쟁을 대비한 일본군 3천 병력이 만리창(용마루재)에 야영하며 숲을 파헤친 것을 필두로, 1906년에는 도원동에 몸 파는 유곽촌을 만들고, 숲 곳곳에 골프장과 공원을 비롯하여 건물을 짓는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만신창이가 되었다.

1945년 3월 문효세자와 어머니 의빈성씨 묘 등을 경기 고양 서삼릉으로 옮길 때는 효창원 숲은 5만 여 평만 남게 되고, 이마저도 세자묘가 옮겨지면서 흔적조차 없어질 운명이었으나 8월에 일제가 패망하여 그나마 남게 되었다.

김구 주석 등 독립선열이 안장된 효창원

▲ 삼의사묘. 비석 좌부터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비석 없는 봉분, 안중근 묻힐 허묘. 묘 석축에 김구 주석이 쓴 유방백세가 보인다.
ⓒ 김용삼
외세(일제)에 이토록 상처 입은 '효창원'이 그 외세와 투쟁으로 형장 고혼이 된 대표적인 분들과 대한민국임시정부 27년을 풍찬노숙으로 지켜낸 분들의 묘역으로 거듭남에 따라 해방공간의 정신적 지주가 되고, 참배객이 인산인해를 이루는 장소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1945년 11월 환국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김구(이하 김구 주석)는 미군정 산하 왕실재산관리처에 효창원을 선열묘역으로 사용하는 문제를 타진케 하고, 김구 주석이 효창원 현지를 방문하여 묘역으로 결정하였다.

1946년 7월 6일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 유골을 일본에서 봉환, 문효세자가 묻혔던 자리에 국민장으로 안장하고, 같은 장소에 안중근 의사 허묘도 마련하였다. 묘 석축에는 김구 주석이 쓴 '의사들 끼친 뜻 영원하다(遺芳百世)'를 새겨 놓았는데, 이것은 상해 프랑스조계에서 민족을 위해 생명을 던지러 떠나는 동지와 지하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한 이후, 고국 땅에서 재회한 이승의 동지(김구)가 영혼의 동지들에게 보내는 감상이 담긴 인사로 이해되는 한편, 동포들에게 전하는 뜻이기도 하다.

1948년 9월 22일에는 임시정부주석 이동녕과 동 비서장 차이석 유골을 중국에서 봉환, 효창원 동남쪽 문효세자 모친이 묻혔던 자리에 사회장으로 안장하고, 그해 국내에서 서거한 임시정부 군무부장 조성환도 두 분과 같은 장소에 안장됐다.

1949년 7월 5일 안두희 흉탄에 서거한 김구 주석이 동지들과 혼(魂)을 같이 하겠다는 유언에 따라 서쪽에 국민장으로 안장된 것이 7위 선열묘역이 조성된 배경이다. 김구 주석 비서를 역임한 선우진씨에 의하면 해외 독립선열 유골을 효창원에 계속 안장할 예정이었으나, 김구 주석의 서거로 더 이상 진척되지 못했다고 한다.

일제가 물러간 이후 국민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효창원선열묘역을 파헤치고 탄압을 가하는 믿기지 않을 일이 벌어진 것은 김구 주석이 안장된 뒤부터다.

김구 주석을 암살한 이승만 정부. 친일인맥을 기반한 이승만 정부로서는 국민들이 숭앙하는 효창원묘역이 눈엣가시로 보였던 것이다. 경찰이 길목을 막고 묘소참배를 불온시하는 일이 계속되자 줄을 잇던 참배객은 끊기고, 유가족까지 검색 당했으며, <백범일지>는 불온서적이 되는 지경이었다.

묘역은 파헤쳐지고 운동장이 만들어지다

▲ 1956. 6. 10. 경향신문. 공병대 불도저가 효창묘역에서 연못을 없애는 등 작업을 하고 있다. 아래 태극기 좌부터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삼의사묘. 아래 오른쪽이 김구 주석묘. 당시 15만여 그루 나무가 잘렸다고 하는데 묘소가 추워 보인다.
ⓒ 경향신문
이런 와중에 도둑참배라는 웃지 못할 일들이 벌어졌는데,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효창원 주변 여관에 들었다가 통금이 풀리는 즉시 경찰이 없는 새벽에 참배하고 줄행랑치는 것이 도둑참배다.

급기야 1956년 5월 공병대 불도저에 의해 묘역의 수많은 나무가 파헤쳐지고 묘소 연못이 없어지는 등 공포스런 일이 벌어졌다. 뒤늦게 소식을 접한 독립운동가 심산 김창숙, 신창균 선생이 불도저 앞에 드러눕는 상황이 벌어졌다. 심산 선생이 다음과 시를 통해 참혹한 심정을 표현했다.

효창공원을 통곡함

효창공원에
스산한 바람불고
처절한 비 내리는데
통곡하며 부르노라
일곱 선열의 영혼을
땅속에 묻힌 말라버린 뼈
일찍이 무슨 죄를 졌기에
멋대로 공병대의
괭이 아래 파헤치는가.

저 남한산(南漢山 남산)
저 탑골공원을 보라
하늘을 찌르는 동상이
사람의 넋을 빼앗는구나.
독재의 공과 덕이
지금은 이렇듯 높을지나
두고 보시오
상전(桑田)과 벽해(碧海)
일순간에 뒤집힐 것을.

(<김창숙 문존> 성균관대 출판부 90~91쪽)


또한 신창균 선생은 "공병대 중령을 현장감독으로 임명하고 불도저 5~6대를 동원하여 공사 착공을 하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김창숙 선생과 나는 불도저 앞에 드러누워서 그 공사를 저지하였다." (송암 신창균 회고록 <가시밭길에서도 느끼는 행복> 해냄 161쪽)

이로 인해 구성된 효창공원선열묘보존회(김창숙 회장)는 경무대를 향해 "효창묘역 파괴를 중지하는 재특명을 요청한다"며 "그렇지 않는다면 남산공원ㆍ탑동공원 각처의 이 대통령 동상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하는 등 각계의 반발 여론이 거세게 일었다.

이에 국회문교조사위원회가 조사에 들어간 결과 경무대 비서실에서 내무부, 서울시, 국방부에 공문을 보내 운동장을 만든다는 이유로 묘소를 파괴한 것이 밝혀져 국회는 공사중지를 결의하였다. 또한 서울시와 대한체육회가 운동장 건립지로 효창원ㆍ상도동ㆍ우이동을 물망에 올렸으나 아무 문제가 없는 두 곳은 배제되고 효창묘역을 선택한 사실도 드러났다.

서울시가 묘소 이장을 다시 들고 나온 것은 공사 중지 3년만인 1959년 11월이다. 제2회 아시아축구대회를 이유로 이제는 일반운동장이 아닌 축구장을 세우겠다는 것이다. 효창원 묘역을 지키려는 사람들에게 산 넘어 산이었다.

묘소보존회 김창숙 회장은 "국민장, 사회장까지 지낸 선열 묘소를 가꾸기는커녕 운동장을 이유로 이장을 결정한 서울시 당국의 행위를 용납 않겠다"고 강경하게 맞서자, 서울시는 묘소보전을 위해 만전을 기하겠다며 협의를 요청해와 협의 대표로 이인(전 법무장관), 장홍담 등 7인을 선출하였다.

7인 대표와 서울시가 협의한 결과 1. 각 묘지에 계단을 마련한다 2. 각 묘지 주위에 철책(울타리)을 두른다 3. 각 묘지에 떼를 다시 입힌다. 4. 묘지마다 나무를 심고 깨끗이 미화시킨다 5. 묘지주위에 배수구를 만든다. 묘역과 운동장 간격은 국무위원 묘에서 82m, 삼의사 묘에서 85m, 김구 주석 묘에서 120m씩 두기로 하였다. 이로써 59년 11월 19일 축구장공사가 시작되어 60년 10월에 준공되었다.

혹자는 효창운동장이 7인 대표와 서울시의 합의 결과물이라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묘역을 훼손하고, 뿔뿔이 흩어놓으려 작정한 자유당 정부의 압박에 묘소를 옮기지 않게 하는 것만도 힘겨운 싸움이었다. 울며 겨자 먹는 슬픈 합의였다.

이승만에 이어진 박정희 정권의 묘역 탄압

▲ 1968. 2. 21. 중앙일보 좌 아래, 김구-삼의사묘 사이에 골프장공사로 나무와 잔디가 파헤쳐 있다. 나무가 군집한 곳이 삼의사묘 울타리다. 우 사진은 같은 일자 동아일보. 이인(전 법무장관) 서있는 사람이 9개 사회 종교단체 대표들과 골프장 반대 성명서 낭독 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중앙-동아일보
1960년 6월 26일 효창묘역에서 김구 주석 서거 11년만에 제1회 추모식을 열게 된 것은 4.19 혁명 여파였다. 이날 폭우에도 5천명 인파가 운집한 가운데 김창숙은 추모사 중에 백범을 누가 죽였느냐고 반복하면서 울음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동시에 부산구덕운동장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추모식을 가졌다.

4.19 혁명으로 백범암살진상규명 기회가 발현되고, 훼손된 묘역 복원 기회가 마련되었으나 5.16 군사쿠데타 정국은 모든 것을 무산시켰다. 이승만 정부시절 탄압 관성은 박정희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박정희 정부 또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던 만주군맥 중심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박정희 군사정부는 1962년 묘소 이장을 통보하였는데 유족과 각계의 이장반대 청원 등으로 취소되었다. 이어 1966년 김구 주석묘 남서쪽 20m 거리에 대형 테니스장이 설치되어 2001년 백범기념관이 착공될 때까지 사용하였다.

1968년에는 김구 주석묘와 삼의사묘 사이에 5500평 골프장 설치를 위해 나무와 잔디를 파헤치는 철탑공사가 벌어졌다. 서울시의 골프장 허가 이유는 "골프장은 묘 울타리 밖이며, 연탄재가 쌓이고 하수가 흘러 잔디를 깔아 골프장으로 사용하면 미관상 좋다"고 하였다.

이에 1968년 2월 21일 선열묘소보존회(이인 회장) 등 9개 사회·종교단체는 "서울시는 '전국민의 숭앙과 얼의 상징'인 장소에 '특수층 오락시설인 골프장'을 설치하여 묘소 통로마저 침범하는 망국적 행위를 중지하고 원상복구"하라는 성명과 골프장이 철회될 때까지 투쟁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당시 김신조 1ㆍ21 사태 상황에서 선열묘소에 골프장 설치 보도가 나가자 서울시는 여론이 나쁘다는 이유로 공사를 취소하였다. 그리고 1969년 김구 주석묘 북쪽 35m 거리에 북한반공투사위령탑이 세워졌는데 이곳은 효창원묘역 정수리에 해당한다. 백범기념사업회는 재향군인회에서 협조공문이 왔을 때 합당치 않다며 반대했지만 무시되었다고 한다.

이 탑은 10월 19일 국군과 유엔군이 인민군을 평양에서 물리친 날을 기념해 세운 것으로 비석에는 대통령 박정희, 국무총리 정일권, 중앙정보부장 김형욱, 김성곤, 함창희, 정주영, 김홍일과 이북 8도 지사와 도민회장 등 이름이 새겨 있다.

효창원묘역은 친일반공세력에 시해된 김구 주석과 임시정부를 지켜낸 일곱 분 영혼이 잠든 곳이다. 그런데 박정희 정권이 머리 위에 반공탑을 세운 것은 임시정부를 발아래 두겠다는 의도로 읽힌다.

이어 1969년 임정요인묘 북쪽 30m, 60m 거리에 어린이 놀이터와 원효대사동상이 세워졌고, 1972년 김구 주석묘 서쪽 30m, 60m 거리에 신광도서관(현 노인회서울시연합회)과 대한노인회중앙회 건물이 들어섰으며, 옆에는 회관 건립에 대한 육영수송덕비가 세워졌다. 6~7년 전에는 묘소 틈새 곳곳에 정자를 짓고, 삼의사묘 옆과 뒤에 30여 가지 운동시설을 설치하였다.

이토록 선열묘역을 파괴하고 탄압의 쇠말뚝(운동장)을 박은 이 대통령은 1956년 4월 국무회의에서 동작동묘지 완공을 계기로 현충일 제정과 대통령령으로 국립묘지법령을 승인하고, 독립운동 성지인 탑골공원에 자신의 동상을 세운 데 이어, 남산에 세계최대 81척 동상을 세우는 이율배반을 보였다.

역시 선열묘역 곳곳을 상처내고 쇠말뚝(건물ㆍ시설물)을 박은 박 대통령이 1960년대~70년대 초반에 걸쳐 김유신묘를 비롯해 현충사, 왕실묘역, 유관순유적지 등을 성역화ㆍ사적지화 하는 이율배반을 보였다.

따라서 현재 동작동현충원 상단에 안장된 두 전직 대통령은 효창원묘역을 이토록 탄압한 것에 대해 영혼으로나마 사죄해야 할 것이다.

▲ 김구 주석 바로 뒤쪽 북한반공투사위령탑. 효창원 정수리에 위치하여, 선열묘역 전체를 발아래 두고 있다.
ⓒ 김용삼
▲ 백범 묘역
ⓒ 김용삼
효창공원을 민족정기 산실로 만들겠다고?

정부는 '광복60주년기념' 국책사업으로 '효창공원을 독립공원화'하여 민족정기 산실이 되게 하겠다며 사업을 시행 중이었으나 반발에 부딪혀 있다.

정부는 동 사업을 위해 국무조정실과 국가보훈처 관계자가 공동단장으로서 범정부적 T/F를 구성하고 2004년부터 준비기간을 거쳐, 2005년 12월 21일 국가보훈처가 '효창공원 독립공원화 조성사업' 과업설명회를 갖고 건축설계를 공모한 바 있다.

독립공원화 목적은 "효창공원은 김구 선생을 비롯한 삼의사와 임정요인 등 7인 애국선열 묘역이 안장되어 있으나 효창운동장 등 이질적 시설물들과 혼재되어 독립공원 성역화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됨에 따라 "광복60년 기념사업으로 효창공원을 민족성지로 조성하여 민족정기를 고취시키고자 함"이라 명시하면서 운동장과 시설물 철거를 당연시 하였다.

그런데도 '사업개요'와 '세부지침'에서는 시설물을 그대로 둔 채, 오히려 낡은 운동장을 철거 후 국제규격 인조잔디구장으로 다시 건립하는가 하면, 남은 공간에 1만여 명 독립유공자 이름을 새긴 '추모의 벽'을 설치한다고 되어 있다. 아울러 그 지하에는 300대 주차장과 묘소 주위에 산책로, 공공단체 문화공간, 야외 공연장까지 계획되어 있다.

이것은 효창원묘역을 되돌릴 수 없이 개악하는 것이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성역화'란 이질적인 것을 허용치 않는 '사적지' 자체임을 아는 당국이 세살 소꿉장난에서도 하지 않은 일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당국은 민족정기 등 '성역화'라는 이름의 언론보도와 홍보를 거친 국회심의로 267억 예산을 편성했다.

따라서 묘역을 탄압하고 백안시 한 건물 한 점이라도 남겨둔다는 것은 이미 성역화가 될 수 없으며, 더구나 효창운동장이 묘역 정면 '혈'을 옥죄고 있는 터에 300대 대형 지하주차장으로 콘크리트 화 한다면 '지맥'까지 차단하는 입체적 훼손을 가하게 된다.

또한 운동장 포함한 5만여 평에 시설물이 채워진데다 300대 주차장을 만들려는 것은 참배객을 위한 것보다 주차 수익사업과 새로 꾸미는 축구장ㆍ공연장 찾는 사람들을 위한 것에 불과하다. 이것은 국민세금으로 행해지는 성역화 사업에 역행하는 것이다.

서울시 스포츠 논리에 밀린 정부의 성역화 사업

노무현 대통령은 2005년 3월 28일 국가보훈처 업무보고에서 "명분 있는 일은 행정적 이해관계 없이 효창공원이 역사적 의미가 완전히 복원될 수 있도록 특별관리"하라고 지시하고, 이해찬 총리는 "효창운동장을 포함(철거) 법적(사적지) 성격을 명확히 하고, 서울시와 협의 독립공원으로 지정하라"고 지시한 바 있다.

효창공원 성역화를 위한 T/F 회의록에 따르면, 정부가 운동장 철거를 요청하자 서울시는 대체부지와 대체운동장을 건립해 달라고 요구했다. 결국 효창운동장을 철거한 자리에 새로운 운동장을 세우기로 함에 따라 정부가 의도한 민족정기 산실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이것은 당국의 명분 있는 성역화 논리가 서울시의 스포츠 논리를 납득시키지 못한 결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설령 효창운동장을 철거한다 해도 남아 있는 시설물을 두고는 정신적·물리적으로 사적지 또는 민족정기 산실이 될 수 없다는 점은 누누이 지적하였다. 그러나 당국은 대한노인회나 재향군인회, 불교종단 등의 관련시설물 철거 이전 협상을 벌인 사실을 발견하지 못했다. 결국 정부는 민족정기 산실을 위한 성역화 의지도, 심층 연구도 없이 소리만 광폭시킨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효창원묘역은 현재적 직급으로 대통령 두 분, 장관급 두 분, 우리 민족이 살아 있음을 만방에 떨친 의사 세 분 등 대한민국헌법전문을 존재하게 한 중추적인 분들과 조선조 학자군주로서 치세가인 정조대왕이 만난 장소로서 양식이 될 이야기보따리가 있는 곳이다.

따라서 효창원묘역 최고의 성역화는 7위 묘와 현충시설인 백범기념관ㆍ이봉창 동상ㆍ의열사를 제외하고, 묘역을 백안시하고 탄압했던 건축ㆍ시설물을 모두 철거하여 당초의 공간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이렇게 풀어내고 해원할 때 비로소 선열에 대한 반성을 담은 성역화라 할 수 있다. 그 연후에 역내를 푸르게 하고, 1만 여명 독립유공자 이름을 새긴 조형물을 세우는 등의 절차를 통해 국민에게 사랑 받는 묘역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와 같은 인식전환 없이 성역화 의지를 찾아볼 수조차 없는 건축설계 과업설명서 대로 시행할 바에야 효창원묘역을 현재 상태로 두는 게 백번 옳다. 노무현 대통령은 근본에서 잘못된 효창공원독립 성역화 사업을 전면 재검토하여 선열과 후대가 남북화해와 통일문제 등 상념을 나누는 공간이 될 수 있게 해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 건물 시설물이 포위한 효창원묘역 그림.
ⓒ 김용삼

덧붙이는 글 | 김용삼 기자는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이사이자 '효창원을 사랑하는 모임' 부회장입니다.


태그:#효창, #독립선열, #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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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 관심 분야는 근현대사입니다. 본인이 송고하는 기사의 취사 선택은 귀사에 달려있습니다. 좋은 기사 쓰는데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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