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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14일 전당대회를 앞두고 열린우리당이 내홍을 겪고 있다. 전당대회를 통한 질서있는 전환과 대통합신당을 결의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의원의 탈당설이 계속 나돌고 있다. 곧 임박했다는 얘기도 나온다. 올 12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탈당과 분열의 악순환이 재발하려는 것이다.

한국의 정당사를 볼 때 과연 가치와 대의명분을 중심으로 정치행위가 이루어져왔던가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명분없는 정당 분열이 있었고, 그 결과로 민주주의의 후퇴가 수반된 적이 다반사이다.

'87년 이후 한국의 정당사는 지역주의를 기반으로 한 분열의 구도였다. YS의 통일민주당과 DJ의 평화민주당이 창당되면서 민주세력은 지역을 중심으로 분열되었고, JP의 신민주공화당까지 창당되면서 지역분할구도가 고착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어 90년에는 민정당과 민주당, 공화당 등 3당이 합당을 선언하면서 민주세력이 다시 분열되었다. 당시 YS는 "5공청산이 일단락된 이상 정계개편이 필요하고 그 대상은 민정당"이라며 사실상 민주 대 반민주의 전선을 넘어서는 명분없는 분열행위를 저질렀다.

87년 이후 정당분열 구도는 곧, 지역주의

한국정당사에 명분없는 분열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시대정신을 반영한 민주세력의 용기있는 창당사도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85년 2ㆍ12총선을 앞두고 창당한 신민당이다. 당시 야당을 대표한 민한당은 민정당의 2중대에 다름 아니었다. 민주개혁세력에게는 군사독재 체제와 대항하고 민주세력의 단일 대오를 형성해야 할 과제가 놓여 있었던 것이다. DJ와 YS는 공동으로 선명야당의 기치를 내걸고 신민당을 창당한다. 그리고 창당 25일만에 돌풍을 일으키며, 국민의 지지를 획득 의석수 67석의 일약 제1야당으로 발돋움한다.

87년에는 이른바 '이민우 내각제 구상'에 반발한 창당도 있었다. 내각제를 매개로 중도통합론으로 불리는 이민우 구상은 86년부터 전개된 직선제 쟁취의 개헌 요구를 무력화시키려는 시도로서 DJ와 YS가 이에 반발, 신민당 소속 90명 의원 중 78명의 질서있는 탈당을 통해 통일민주당을 창당하였다. 훼손되어가는 야당의 정체성을 다시 한 번 확립하고 민주세력의 대오와 질서를 정비하면서 직선제 개헌운동을 관철시키는 데 커다란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우리는 위 두 사례에 대해 오늘날 아무도 분열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민주세력의 선명성과 정통성이라는 대의명분이 있었기 때문에 성공한 창당이라고 부른다.

민주세력의 결집, 85년 신민당, 87년 민주당

특정 정치지도자에 대한 지지나 대세에 의한 극히 일부의 경우를 제외하면, 각종 선거를 앞두고 급조된 정당들은 대부분 실패하고 말았다.

△92.2, 정몽준의 통일국민당 △92.3, 박찬종의 신정치개혁당 △92.11, 이종찬의 새한국당 △97.11, 이인제의 국민신당 △2000.3, 김윤환 등의 민주국민당, △02.5, 박근혜의 한국미래연합, △02.11, 정몽준의 국민통합21 △02.11, 이한동의 하나로국민연합 등이 그것이다.

이 정당들은 가치도 노선도 없었고, 세력조차 없이 선거만을 위해 급조된 정당들로서 그들의 운명은 이미 패배로 규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국 정당사에서 특히 눈여겨 볼 대목은 이른바 철새정치의 행보이다. 명분도 없이 이 당에서 저 당으로 당적을 바꾸어버린 사람들은 결코 성공하지 못했다. 오히려 국민의 준엄한 심판을 받았을 뿐이다.

대표적인 것이 90년 3당합당의 결과로 탄생한 민자당의 경우다. 통일민주당에서 민자당으로 합류한 의원은 모두 54명이었으나, 이중에서 차기총선에 당선된 의원은 절반에도 못미치는 22명에 불과했다. 신민주공화당에서 민자당으로 합류한 의원 34명도 마찬가지다. 차기 총선의 당선자는 단 7명에 불과했고, 나머지 27명은 낙선과 공천탈락, 정계은퇴의 비운을 맛보았다.

이 뿐만 아니다. '96년 치러진 15대 총선에서 당선된 후, 당적을 옮긴 의원들의 운명도 마찬가지였다. 96년 원구성 과정에서 신한국당으로 당적을 옮긴 의원들이 공천에서 탈락했거나 선거에서 낙선하였다.

또한 97년 대선과정에서 한나라당으로 당적을 옮긴 의원들 역시 공천탈락하였고, 민주당이나 신한국당에서 이인제의 국민신당으로 옮긴 의원은 모두 본선에서 낙선하였다. 이후 '97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면서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였고, 이 과정에서 한나라당 또는 국민신당에서 자민련 또는 새정치국민회의로 당적을 변경한 17명중 5명을 제외한 12이 공천탈락 또는 낙선의 비운을 맛보아야 했다. 이들 중에는 거물정치인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2002년 대선을 앞두고도 철새 정치의 양상은 변함없이 나타났다. 당시 민주당의원 7명이 전격적으로 한나라당에 입당하였다. 그러나 역시 국민의 심판은 냉엄했다. 이들 7명 의원 가운데 17대 총선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이들 뿐만 아니라, 민주당 후보로 선출된 노무현 후보를 흔들고 이른바 후단협 활동을 하거나 아니면 정몽준의 국민통합 21 활동을 했던 인사들도 거의 전원이 낙선했다.

한국 정치의 역사는 이처럼 대의와 명분을 중시하지 않고, 자신의 안위를 위해 쉬운 길을 찾아 다녔던 정치인들에게는 냉혹한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국민은 명분과 가치없는 정치행위를 용납하지 않았다.

▲ 열린우리당 전당대회를 통한 대통합신당 추진결의에 서명한 의원들이 1일 영등포 당사에서 열린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이 서명에는 초선 48명과 재선 8명 의원이 참가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열린우리당의 창당, 87년 이후 지역분열체제의 극복

2003년 열린우리당의 창당은 87년 이후 정립된 지역분열구도를 극복하고 '지역주의타파'와 '국민통합'의 가치와 명분을 중심으로 민주세력이 통합된 새로운 정당의 역사였다.

열린우리당의 창당은 선거용도 아니었고, 오너가 따로 있는 당도 아니었다. 과거와는 달리 대통령이 만든 당도 아니었으며, 지역주의 구태와의 절연을 통해 민주당, 한나라당의 개혁통합세력, 개혁당, 시민사회가 함께 만든 정당이었다. 열린우리당은 지역주의가 아닌 정체성을 기치로 앞세우고, 2004년 제 17대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 국회의석 과반수를 획득하는 쾌거를 이루어냈다.

그러나 이후 열린우리당은 국민의 기대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하고, 지난 3년간 크고 작은 40차례의 재보궐선거에서 전패하는 혹독한 국민의 평가를 받았다.

열린우리당은 지난 1월29일 중앙위원회에서 평화민주세력과 미래세력의 대통합신당을 결의했고, 2월14일 전당대회를 앞두고 있다. 대통합신당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원칙과 가치가 뚜렷해야 한다. 국민통합과 지역주의 극복, 국가의 미래를 책임질 세력으로서의 비전과 도덕성 등이 국민들에게 평가받아야 한다.

'당이 어려우니 일단 깨고 보자'는 식의 원칙도 명분도 없는 태도로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단순히 선거를 위하여 '세'를 규합하려고 해서도 안된다. 가치와 명분으로 정당을 함께했던 동지들과 당원들에게도 칼을 꽂는 배신행위가 어떻게 국민의 마음을 얻을 수 있겠는가?

열린우리당 창당때 큰 기대와 성원을 보낸 지지층의 지지철회는 과연 무엇 때문인가? 열린우리당의 위기는 어디에서 근원하고 있는가? 대부분의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열린우리당의 실패요인과 과제로 중산층과 서민정당으로서의 정체성 확립 실패와 당내 분열을 꼽고 있다. 명분없는 분열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질서있는 대통합을 통해 열린우리당의 창당가치와 과오를 창조적으로 극복해야 한다. 당이 국민에게 버림받았다고 내팽겨치거나 그렇다고 그냥 부여안고 가는 것 모두 옳은 길이 아니다. 잘못을 국민앞에 솔직하게 반성하고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과정이 없는 사분오열과 이합집산은 국민에게 감동을 줄 수 없다. 그 결과도 명확하다.

시대적 명분과 가치를 세우고, 정치권 안팎에 흩어져있는 평화개혁 민주세력을 하나로 모아야 한다. 과오를 창조적으로 극복하는 방법은 과오를 인정하고 반성하며 기득권을 버리되, 미래 정치에 대한 원칙과 대의명분, 가치를 분명히 세우는 것이다. 그것이 정치적으로 책임있는 자세고, 국민 앞에 떳떳한 길이다.

태그:#열린우리당, #탈당, #분열, #명분, #대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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