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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이뉴스 이종호
그때도 교칙은 있었습니다. 교칙의 이름으로 상벌이 행해졌고, 복장이 지정되었으며, 머리카락의 길이와 모양까지도 결정되었습니다. 교칙이라는 말이 지니는 엄격함과 공식성 탓인지 그 누구도 교칙이 누가, 왜, 언제, 어떤 절차에 따라 만들어졌는지에 대해 조금도 의문을 갖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는 헌법에 준하는 위엄을 가진 존재였습니다.

교칙이 학교 내 모든 생활을 통제하는 잣대였지만, 학생들 중에 그 세부 조항의 내용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저 교사의 입을 통해 내뱉어진 '교육적'인 훈화가 교칙의 내용일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했을 뿐입니다. 학생들이 교사의 권위에 수긍하고, '그게 다 우리들을 위한 것'이라는 착한(?) 마음을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학창 시절 무던히도 많이 맞았습니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그리 큰 잘못도 아닌 듯한데 그땐 그랬습니다. 성적이 떨어졌다거나 지각했다는 것 말고도, 간만에 쉰 일요일 날 친구들과 극장에서 영화 봤다고, 교복에 단추 하나가 떨어져 있다고, 청소 시간에 화장실 갔다고, 심지어 수업 시간에 선생님을 쳐다보지 않았다는 이유로 맞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일일이 교칙을 들먹이지는 않았지만, 순진하게도 그 모든 잘못들이 교칙에 적혀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그러면서 교칙은 웬만한 법전처럼 무척이나 두꺼울 것이라는 엉뚱한 생각도 했더랬습니다.

학창 시절 무서워서 교칙 전문을 보자고 선생님들께 요구해 본 적은 없었지만, 늘 궁금하게 여겼던 교칙에 대한 단 한 가지 의문이 있긴 했습니다. 왜 교칙에는 '~을 하지 말라'는 내용만 담겨 있을까라는. 어떻든 교칙의 완전무결함과 준엄함을 단 한 번도 의심해 본 적 없이 무탈하게 학창 시절을 보냈습니다.

초임시절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을 잡았습니다

시간이 많이 흘러 교사가 되었고, 어느새 10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을 보냈습니다. 부임 후 몇 해 동안 학교 행정에 익숙해지기 위해 교무와 행사 업무 관련 부서에서 일했습니다. 그래오다 근래 들어 아이들과 직접적으로 부대낄 수 있는 '학생과'에서 일하는 행운(?)을 얻었고, 아이들을 만날 때마다 20여 년 전 나를 떠올리며 그때 가졌던 생각과 고민들을 실마리 삼아 원만하게 대화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때는 감히 보지 못했던 교칙도 자주 들춰 본 탓인지 이제는 거의 욀 정도가 되었습니다.

사실 초임 시절 학창 시절 겪었던 대로, 받았던 대로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을 다잡았습니다. 교육자적 소명 의식과 열의를 가지고 아이들의 행동 하나 하나, 습관 하나 하나를 교칙에 맞도록 교정하는 것이 교사의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학생들이 학교에서 배우고 경험해야 할 제일의 덕목이 '준법 의식'이며, 그것의 기준이 바로 교칙이라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습니다.

아이들 입장에서 보면 분명 '체벌'이며 '폭력'이었지만, 교사인 제 입장에서 보면 엄연한 '교육'이며 '생활 지도'였기에 일말의 죄의식도 없었고, 외려 뚜렷한 교육적 소신인 양 뿌듯해 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초임 교사의 소신은 얼마 못 갔습니다. 삐딱한(?) 한 아이가 학생들의 절대적 지지를 등에 업고 학생회장에 당선하면서 교칙에 관한, 학생 생활 지도에 관한 제 신념이 도전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선생님, 교칙을 바꿔 주십시오!"

ⓒ 오마이뉴스 권우성
당선하자마자 교칙 원문을 학교 홈페이지에 탑재하여 열람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해 왔고,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권리였기에 곧장 그리 하였습니다. 동시에 부끄럽게도 교사인 저 역시 '처음으로' 교칙 원문을 꼼꼼하게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당황스럽다 못해 충격적이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게 그토록 준엄한(?) 교칙이었나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은 학교운영위원회의 자문과 학교장의 결재까지 거쳐 대부분 수정되었지만, 조항 내용 자체가 비교육적이거나 '두루뭉술' 선언적 서술에 그치는 것이 많았습니다. 예컨대, 학생회장 입후보 조건으로 성적을 제한하고, 두발은 스포츠형 머리로 일괄 제한하며, 목걸이 등 장신구 착용을 일체 금지하는 규정 등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에까지 간섭하는 내용도 있었고, 그저 '학생다워야 한다'는 등의 이현령비현령식의 조항도 많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교칙, 특히 민감한 두발과 복장 규정을 두고 학생과 교사, 학부모 간 논쟁이 붙었습니다. 처음에는 아예 모든 학생들이 접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교내 방송 시설을 이용하여 생방송으로 공개 토론 방식을 빌어 전개하려다가 이러저러한 부작용(?)이 우려돼 비공개 토론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학생, 교사, 학부모가 한 자리에 모여 자신들의 주장을 피력해보는 것만으로도 파격적인 변화라 여겼습니다.

많은 우여곡절 끝에 애매모호하거나 낡은 조항들이 하나 둘씩 삭제되거나 바뀌게 되었습니다. 성적에 따른 차별은 삭제되었고 막무가내식 체벌 규정은 학생에게 잘못을 공지하고 수긍할 때, 절차에 따라 체벌하는 쪽으로 바뀌었으며, 두발 규정 또한 사라졌거나 대폭 완화되었습니다. 엄청난 변화라면 변화입니다.

학생에게 '설득 당할' 용기가 필요한 게 아닐까

그러나 학생들은 조금도 달라진 게 없다며 아우성입니다. 하긴 모든 게 그렇듯 문서 내용의 변화가 실제 행동에서의 변화로 나타나기에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학생의 입장에서 보면 교사 개개인의 교육적 소신과 판단이 교칙이 어떻게 바뀌건 간에 그 내용보다 늘 한 발 앞서 반영되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머리카락을 잘라야만, 반지와 목걸이를 하지 않아야만, 공부를 잘 해야만 '모범생'이라는 생각을 지닌 교사들이 많습니다. 짧게는 십여 년부터 길게는 삼십 년 가까이 그런 인식을 갖도록 교육 받아 왔기에 아무리 교칙이 시대의 변화에 걸맞게 바뀐다고 해도 쉽사리 바뀌지 않을 그들의 '철학'으로 굳었기 때문입니다.

그건 학생들이 좋든 싫든 인정하고 수긍해야 할 현실이지만, 마땅히 따라야 할 규범으로써의 기능을 급속히 잃어가고 있습니다. 공은 교사에게 넘어왔습니다. 교육자와 피교육자라는 관계의 울타리 안일지라도 학생들과 논리적으로 토론할 능력과 나아가 '설득 당할' 용기조차 지녀야 함을 뜻합니다. 말 그대로 열린 자세가 요구된다 하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삐딱한' 학생회장과 교칙에 대해 얘기 나누면서 저의 십 년 가까운 교사 생활을 성찰할 수 있었습니다. 관행이라며, 오랜 전통이라며 '두루뭉술' 넘겼던 수많은 교육 행위에 대해 깊이 반성하였습니다. 곧 학생들이 주체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토론하며 수용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과정이 진정한 교육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지금 고3이 되는 그때의 학생회장은 저의 많은 스승 중 한 명인 셈입니다.

예전에는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가치가 '준법 의식'이라고 여겼지만, 지금은 '비판 정신'과 '합리적 토론 능력'이라고 믿게 됐습니다. 교사가 강조하는 '준법 의식'은 자칫 강압적 폭력으로 비치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법을 마땅히 지켜야 한다고 믿기 전에 그 법은 누가, 왜,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등에 대해 의심하고 따져보는 자세가 우선이 돼야한다는 것을 깨친 겁니다.

웬만해서는 꿈쩍이지 않을 것 같던 제 교육적 소신도 바뀌었습니다. 입만 열면 학교의 주인은 학생이라지만, 교사의 입장에서 학생은 피교육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선언적 의미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학교에서 학생과 교사가 한 방향으로 노를 저어가는 동반자가 되어야 한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언뜻 사소해 보이는 교칙 개정과 준수라는 절차가 학생이 진정 학교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지금껏 내용이 뭔지도 모른 채 그저 따라야만 했던 교칙에 시대의 변화에 부합하는 학생들의 합리적인 주장과 요구를 반영시킴으로써 규범적 가치를 높여가야만 합니다. 자신들의 요구가 반영된다면 훨씬 더 적극적으로 따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린' 학생들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인식을 벗어나 늘 곁에서 그들의 사고에 자유로운 날개를 달아줘야 함에도 단지 연장자라는, 또 교사라는 '덫'에 걸려 외려 그 날개를 꺾어버리는 우를 범해 오지는 않았는지 반성합니다. 지난 10년은 교사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을 '교육한' 시간이었지만, 실은 모자란 제가 철들고 깨달음을 얻은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학생들도 교사에게 깨우침을 줄 수 있다는 '두려운' 생각을 갖는 순간, 학교 내 둘 사이에 벌어지는 수많은 갈등은 (빨리 처리해야 할 사건, 사고가 아니라)외려 서로에게 성찰의 기회를 주는 신선한 자극제일 수밖에 없습니다. 나아가 요즘 두루 회자되는 '교실 붕괴'라는 말도 얼토당토 않는 괴담쯤으로 남을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 교칙의 공식적(?)인 이름은 '학생생활규정'입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어감이 명료한 탓에 교칙이라고 부르는 것이 보편적입니다. 그나저나 교칙의 조항 하나 하나를 고쳐나가는 것도 어렵지만, 더 힘들고도 또 더 본질적이며 중요한 것은 교칙을 바라보는 학생과 교사의 인식의 변화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개개인마다의 가치관 문제인 탓에 극복하기 매우 힘든 난제 중의 난제이기도 합니다.

제 홈페이지(http://by0211.x-y.net)에도 실었습니다.


태그:#교칙, #학생생활규정, #학생 인권, #교사,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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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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