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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3월 3일은 오랫동안 통행불능상태에 놓여 있던 남대문 통로(홍예문)의 일반개방이 이뤄진 날이다.

이에 앞서 남대문의 통행재개준비와 관련한 지난 2005년 10월 이후의 중앙통로 시굴조사과정에서 현지표보다 1.6m 가량 더 낮은 곳에 원래의 박석이 잔존하는 것으로 드러나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애당초 남대문의 위용이라는 것이 지금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보다는 훨씬 더 장대하고 당당했음이 확인된 탓이었다.

그렇다면 이처럼 남대문 통로의 지표면이 높아진 것은 언제부터의 일이며, 또한 왜 그렇게 된 것이었을까?

▲ 지난 3월 3일부터 중앙통로(홍예문) 자유통행이 허용된 국보 제1호 숭례문(남대문)의 모습이다. 최근에는 다시 좌우성벽을 복구하고 원래의 높이대로 바닥을 낮추겠다는 복원계획이 발표된 바 있다.
ⓒ 이순우
▲ 지난해 11월에 벌어진 시굴조사부위는 다시 흙으로 덮지 않고 그대로 노출시켜 탐방객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이 구조로만 본다면 원래의 남대문은 지금 바닥면보다 사람 키높이 만큼 더 낮은 지표면을 기준으로 만들어졌던 것은 분명하다.
ⓒ 이순우
▲ 현재 홍예문 안에 설치되어 있는 "숭례문의 원형바닥에 대한 설명문"에는 통로 바닥이 높아진 원인을 전차부설공사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은 그대로 믿기 어렵다. 전차선로부설 이전에 남대문 바닥면이 이미 높아져 있는 사진자료들이 수두룩하게 확인되고 있는 탓이다.
ⓒ 이순우
이에 대해 현재 남대문 통로 안에 설치되어 있는 안내판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숭례문의 원형 바닥에 대한 설명] "2005년 11월 숭례문 석축 하부에 대한 시굴조사 결과, 현재의 지반보다 약 1.6m 아래에서 석축의 지대석, 성문의 지도리석(확석), 박석이 발견되었다. 이와 같이 숭례문의 통로 바닥이 높아진 원인은 19세기 말, 전차가 숭례문의 홍예를 통과하게 되면서 성문 구조에 대한 손상을 최소화하려는 목적으로 박석 위에 진흙다짐을 하고, 전차 선로를 구성하기 위한 것으로 판단된다."

다시 말하면 남대문의 홍예를 통과하는 전차선로를 부설할 때에 바닥을 다지기 위해 흙을 채워 넣는 바람에 지금처럼 지표면이 높아지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원래 종로 구간에만 놓여 있던 전차선로가 남대문을 통과하여 용산까지 연장된 것은 1900년 정초였다. 위의 설명에 따르자면, 남대문 통로바닥이 높여진 것은 1899년 후반기의 일이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전차선로를 깔면서 지표면이 높아졌다는 것은 과연 올바른 설명일까?

전차선로가 부설되기 이전의 남대문 사진을 확보가능한대로 대조해본즉, 전차선로부설 이전이나 이후나 홍예의 바닥면은 그 차이가 거의 없어 보인다. 그러니까 전차 때문에 통로의 지표가 높아졌다는 주장은 확실한 근거가 없는 것으로 확인된다.

여기에서 제시한 몇 장의 사진자료만 훑어보더라도, 남대문 통로바닥이 높아진 것이 애당초 전차부설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사실을 그대로 살펴볼 수 있다.

▲ <한국건축조사보고>, <조선고적도보>, <경성부사> 등에 두루 수록된 남대문의 사진자료이다. 전차가 지나다니기 이전에 채록된 모습인데, 지표면에 드러난 홍예의 폭과 높이가 거의 1:1의 비율이어서 전차선로부설 이후와 별차이가 없음을 확인할 수 있다.
▲ 영국 외교관 조지 커즌(George Curzon)이 지은 <극동의 제문제(Problems of the Far East)> (1894)에 수록된 남대문의 사진자료이다. 여기서도 남대문 홍예의 가로세로 비율은 거의 1:1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호머 헐버트(Homer Hulbert)의 <대한제국멸망사(The Passing of Korea)> (1906)에 수록된 남대문의 사진자료이다. 전차가 부설되어 남대문 홍예를 통과하던 시절의 모습이다. 하지만 홍예문의 바닥높이는 전차부설 이전이나 이후나 별 차이가 없다.
▲ <경성부사>에 수록된 "명치 43년(즉 1910년) 촬영" 남대문의 모습이다. 1907년 이래 좌우성첩이 헐어진 이후의 일이라서 전차는 더 이상 홍예를 통과하고 있지 않으나, 통로의 지표는 여전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주변을 에워싼 석축은 대부분 지금도 남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다.
맨 위의 사진자료는 <한국건축조사보고>, <조선고적도보>, <경성부사> 등에 두루 수록되어 있는 남대문의 모습이다. 1934년에 발행된 <경성부사> 제1권에는 이것이 "명치 28년(즉 1895년)에 촬영"된 것으로 표시하고 있다.

분명히 전차가 홍예를 통과하기 이전에 채록된 모습인데, 거리가 멀어 자세히 측정할 수는 없으나 지표면에 드러난 홍예의 폭과 높이가 거의 1:1의 비율이어서 전차선로부설 이후와 별차이가 없다. 요컨대 남대문 통로의 바닥이 높아진 것은 전차부설과 무관하게 진작 그렇게 되어 있었다는 얘기이다.

두 번째의 사진자료는 영국 외교관 조지 커즌(George Curzon)이 지은 <극동의 제문제(Problems of the Far East)> (1894)에 수록된 남대문의 사진자료이다. 다시 말하면 1894년 이전에 촬영된 남대문의 모습인데, 여기서도 남대문 홍예의 가로세로 비율은 거의 1:1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세 번째의 사진자료는 호머 헐버트(Homer Hulbert)의 <대한제국멸망사(The Passing of Korea)> (1906)에 수록된 것이다. 이제는 전차가 부설되어 남대문 홍예를 통과하던 시절의 모습이라서 이전의 것과는 확연히 대비가 될 수 있다. 하지만 홍예문의 바닥높이는 전차부설 이전이나 이후나 달라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마지막의 것은 <경성부사> 제1권에 수록된 '명치 43년(즉 1910년) 촬영' 남대문의 모습이다. 남대문에 연결된 좌우성첩은 이미 헐어진 이후의 일이라서 전차는 더 이상 홍예를 통과하고 있지는 않으나, 통로의 바닥높이는 한눈에 봐도 여전하다.

▲ 왼쪽은 <정부기록사진집> 제5권에 수록된 '남대문수리기공식(1961.7.21)' 장면이고, 오른쪽은 <정부기록사진집> 제6권에 수록된 '남대문 수문장(1965.3.30)'의 모습이다. 남대문 수리 이전에는 성문 아래에 사람이 기어서 통과할 만한 공간이 남아 있었으나, 수리 이후에는 그 부분이 메워지면서 지표면이 다시 조금 높아진 것을 볼 수 있다.
ⓒ 정부기록사진집
1900년 전차선로부설과정에서 지표면이 크게 높여진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어느 시기에 어떻게 남대문 통로의 바닥이 크게 높여졌던 것일까? 이러한 물음에 대해 안타까우나 명백한 답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지금 남아 있는 바닥의 지하구조에 비추어 보건대, 조선시대의 어느 때인가 어떤 '특별한' 목적에서 '인위적'으로 남대문 홍예에 흙을 다져 넣었을 가능성은 아주 높다고 하겠다. 특히 세종 때에는 남대문 일대의 낮은 땅을 돋우기 위해 남대문을 전면 개축한 적도 있었으므로, 아마도 이러한 사실과 무슨 관련이 있지 않았을까 짐작해볼 따름이다.

그런데 지난 11월 초에 서울시 중구청에서 숭례문 성벽복원과 지반제거에 관한 계획을 발표한 적이 있었다. 일제에 의해 훼손된 성벽을 복구하는 한편 시굴조사과정에서 드러난 원래의 지표면을 드러내기 위해 1.6m 가량 쌓여있는 표토층을 완전히 걷어내겠다는 내용이었다.

모르긴 해도 여기에는 "전찻길을 놓은 사람들의 못된(?) 소행으로 남대문의 원형이 훼손되었으니 이를 바로 잡은 것이 옳다"는 판단과 명분이 강하게 작용했으리라 여겨진다. 하지만 '전차' 때문에 남대문의 원형이 변형되거나 훼손된 사실은 그 어디에서도 확인되질 않는다. 따라서 남대문 성벽의 복원에 대해서는 특별한 이견이 있을 수 없지만, 적어도 홍예의 바닥면을 걷어내겠다는 계획은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아무리 원형복원도 좋지만, 때로 그 원형은 반드시 최초의 것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은 새겨들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최초의 남대문을 후대의 어느 시기에 어떤 특별한 목적에서 의도적으로 변형하였다면, 그것은 또 그것대로 원형에 준하는 것으로 존중되어야 할 자격이 충분히 있으니까 말이다.

따라서 이 부분에 대한 구체적인 해명이나 자료고증 없이 함부로 중앙통로의 바닥면을 걷어내겠다는 계획은 마땅히 철회되거나 유보되는 것이 옳을 듯싶다. 원형복원이라는 이름으로 섣불리 걷어낸 진흙바닥층이 정말로 우리 조상이 남겨둔 특별한 역사의 자료이자 흔적인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구태여 바닥층을 복구해야겠다는 생각이라면 1962년에 벌어진 남대문 전면해체수리 당시에 약간 높여진 부분만을 걷어내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합당한 듯하다. 지금은 "전차선로부설 탓… 운운" 하며 성급하게 원형복구를 시도할 때가 아니라 무엇 때문에 바닥이 높아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원인규명이나 문헌조사에 치중할 때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 남대문 통로에 쌓인 바닥흙이 1899년에 이뤄진 전차선로부설과 관계된 것이라고 여전히 믿고 있다면, 그는 다음의 두 가지 물음에도 적절한 해답을 제시해야 할 줄로 믿는다.

'지금 남아 있는 남대문의 성문(城門)은 언제부터 이처럼 그 높이가 짧아진 것인지?' '
'같은 시기에 전차선로가 부설된 동대문에도 이러한 바닥다짐의 흔적이 남아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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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년전부터 문화유산답사와 문화재관련 자료의 발굴에 심취하여 왔던 바 이제는 이를 단순히 취미생활로만 삼아 머물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린 것 같습니다. 알리고 싶은 얘기, 알려야 할 자료들이 자꾸자꾸 생겨납니다. 이미 오랜 세월이 흘러버린 얘기이고 그것들을 기억하는 이들도 이 세상에 거의 남아 있지는 않지만, 이에 관한 얘기들을 찾아내고 다듬고 엮어 독자들을 만나뵙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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