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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동순
한국의 대표적인 현대시 작품을 돌(자연석)에 새겨서 모두 한자리에 모아놓은 '한국현대시육필공원'이 새로 조성되었다. 대구시 동구 도학동, 팔공산 자락에 있는 이 육필공원은 신라시대의 고찰이었던 대구 팔공산 북지장사 입구에 세워져 있다.

북지장사는 대구시 동구의 백안삼거리에서 팔공산 동화사 쪽 방향으로 틀어서 약 2km 지점에 입구가 있다. 그 입구로 들어서면 바로 육필공원과 만나게 된다.

지난 20여 년 동안 자연석 수집에 특별한 취미와 집념을 가지면서 현재까지 2300점 가량 크고 작은 자연석을 전시해놓은 '돌, 그리고'의 운영자 채희복씨는 남다른 문학애호가이자, 시를 특별히 아끼고 사랑하는 독자이다. 채씨는 평소 자신이 즐겨 읽던 시작품을 중심으로 학계와 문단에 두루 폭넓게 자문을 거쳐서 드디어 25점의 시작품을 선정, 자연석에 시를 새긴 육필공원을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지금까지 한국 대표시인들의 육필작품을 한자리에 집중적으로 모아놓은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입장료는 전혀 없고, 뛰어난 주변 경관을 현대시 육필공원에서 무료로 즐길 수 있다.

이곳은 가까운 곳에 새로 문을 열게 되는 방짜유기박물관, 지역사박물관 등과 함께 또 하나의 전국적인 테마 공간이자 명소로 발돋움하게 될 듯하다. 이와 함께 시를 사랑하는 일반 독자들, 대학생들이 즐겨 찾는 단골 문학기행 코스로 자리매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오는 11월 초순경에 본격적 오픈을 하게 된다는 이 '한국현대시 육필공원'을 미리 가서 사진으로 담아 보았다. 저물어가는 가을을 배경으로 가족들, 혹은 친구들과 함께 호젓한 주말에 문학기행 삼아서 일부러 육필공원을 한번 다녀오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시인의 길', 맨 입구에서 만나게 되는 돌은 '한국현대시 육필공원' 입구에 세워진 표지석이다. '시인의 길'이란 이름이 인상적이다. 이 글귀는 보는 사람들에게 마치 '시인을 만날 수 있는 곳', 혹은 '시인이 걸어가야 할 길' 등의 여러 가지 의미를 폭넓게 함축하고 있는 듯하다.

처음 세워지는 '한국현대시 육필공원'

ⓒ 이동순
'시인의 길'을 천천히 걷다 보면 한국 현대시 초창기의 매우 중요한 인물이자 승려시인이었던 만해 한용운 대선사의 친필이 나타난다. '마저절위(磨杵絶葦)'라고 쓴 글씨와 그 굵은 획이 우리의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이 네 글자의 뜻은 이렇다. 공부에 워낙 몰두하다가 보니까 절굿공이가 다 닳아서 바늘이 되었고, 책을 묶은 가죽끈이 다 닳아서 책이 모두 떨어져 버렸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이 말은 모든 일에 힘써 노력하는 삶의 자세를 일러주는 글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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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시인이었던 고월 이장희의 글씨를 만나보자. 대구가 배출한 1920년대의 대표시인 고월 이장희가 남긴 유일한 육필은 특별한 느낌을 준다. '박연(博淵)'이라고 쓴 글씨에서는 요절시인의 서러운 체취가 느껴지지 않는다. '넓고 커다란 연못'이란 뜻인데, 이는 마음 씀씀이가 너그럽고 온유한 인품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장희 시인은 불우한 청년 시절을 보내다가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요절시인이었다. 세상을 떠나기 전 홀로 빈방에서 금붕어만 줄곧 그렸다고 한다.

ⓒ 이동순
비록 육필은 아니지만 1936년에 발간된 백석의 시집 <사슴>에서 사용된 고풍한 활자형태를 고스란히 재현한 작품도 보인다. 평북 정주에서 태어난 1930년대 한국의 대표적인 시인 백석. 하지만 백석은 분단으로 매몰시인이 되었다. 백석의 시 정신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시작품이 '모닥불'이다. 이 시비는 현재 한국에서 맨 처음으로 세워진 백석의 하나뿐인 기념물이라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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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윤동주의 정겨운 글씨를 만나보기로 하자. 젊은 나이에 일본에서 요절한 민족시인 윤동주의 육필 시작품 '봄'. 따뜻한 봄 햇살이 그대로 가슴 속에 스며드는 듯 아름답고 포근한 작품이다. 흔히 윤동주의 친필은 '서시'가 흔히 알려져 있는데, 이 시비에 새겨진 작품은 독특한 정감이 느껴지며, 마치 윤동주의 애잔한 얼굴 표정을 대하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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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시인을 아시는지? 한국의 1950년대를 대표하는 김수영 시인의 작품 '여름밤'의 한 대목으로 찾아가 보자. 이 시는 꽤 긴 시작품인데, 여기서는 그의 치열한 삶과 정신을 드러내는 일부만 옮겼다고 한다. 힘들고 고단한 시대를 혼자서 외롭게 버티며 살아갔던 김수영 시인의 불꽃 같은 치열한 정신을 그의 육필에서 직접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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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을 보고 난 다음엔 반드시 김춘수를 만나야 한다. 순수시와 무의미시론으로 작품을 쓰면서 일생을 살아간 경남 통영 출생의 시인 김춘수의 육필시 '하늘수박'이다. '꽃'이라는 김춘수의 대표작은 전국의 많은 문학애호가들의 심금을 울려주고 있다. 초창기에는 아름답고 순수한 의미시를 쓰다가 후반기에는 율격과 리듬감각만 살아있는 무의미시로 돌아섰다. 이 작품도 무의미시 스타일을 보여주는 경향을 나타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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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 시인의 '시인'이란 작품이다. "노래하며 놀다가 / 노래하며 가네" 이번 육필공원 조성을 위해 특별히 써서 원고를 보내주었다고 한다. 활달한 필치가 시인의 품성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전북 옥구 출생의 고은 시인은 원래 모더니즘으로 출발했으나 1970년대 이후 저항적 민족시를 쓰는 시인으로 바뀌었고, 민주화 운동에 헌신하여 많은 작품과 활동을 펼쳤다. 최근 노벨문학상 최종후보로 여러 해째 거론 되고 있다.

한국 대표시인들의 육필을 만나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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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많은 독자들에게 널리 사랑을 받고 있는 정호승 시인의 육필 작품 '물새'를 찾아가 본다. 정호승 시인의 작품과 그 특징은 평범한 삶의 주변 사물들을 사랑과 눈물의 아름다움으로 다시 태어나도록 만드는 위력을 지니고 있다. 시인이 직접 쓴 육필은 그 시인의 가치관과 습관, 성격 따위를 그대로 솔직하게 드러나게 해주는 중요한 단서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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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 시인의 유명한 작품 '너에게 묻는다'를 육필로 만나보자. 워낙 널리 알려진 글귀라 돌에 새겨놓은 짧은 시작품의 전문이 웅변적 반향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경북 예천 출생으로 대구에서 성장한 안도현 시인은 현재 전라북도의 우석대 문창과 교수로 활동 중이다. 어른을 위한 동화 <연어> 등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

지금까지 둘러본 육필 시비 이외에도 이상화, 이설주, 신경림, 유안진, 김지하, 정희성, 이시영, 이태수, 하종오, 이상국, 김용택, 박노해, 정일근 시인의 작품을 육필로 직접 만나볼 수 있다. 앞으로도 김소월, 정지용, 천상병 시인 등의 육필 시비가 추가로 제작될 것이라 한다.

돌에 새겨진 육필은 원고지에 쓴 글씨와 그 느낌이 몹시 다르다. 특별히 허락을 얻어서 탁본까지 할 수 있다면 더욱 놀라운 분위기를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름답고 호젓한 시간에 한국 대표시인들의 육필을 만나는 즐거움은 잔잔한 감동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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