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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기습적이고 신속해야 합니다.
남조선과 미국이 정신을 차릴 틈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강력한 저항과 국제적 지원이 동원될 시간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 1950년 3월 30일 소련을 방문한 김일성에게 스탈린이 한 말 중에서


남침 유도 설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는가

중편에 언급했던 국제상황의 3가지 변화로 인해서 스탈린과 김일성은 전쟁을 통한 통일 논의가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도 노회한 스탈린은 두 가지 사항을 김일성에게 제시한다.

첫째는 미국의 개입여부와 둘째는 중국지도부의 승인여부다. 상황이 변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스탈린은 절대적으로 미국과의 전면전을 회피하고자 했다. 북한의 지도부는 미국참전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판단했다. 그들도 염두에는 두고 있었지만, 인민군의 남한 점령이 신속하게 이뤄진다면 미국의 참전이 전쟁 결과에 그다지 영향을 주지 않을 거라고 예측한 것이다.

이러한 판단의 근거에는 박헌영의 전면전 개전 즉시 남한 내 공산세력의 일제 봉기설이 크게 작용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1949년 말부터 남한 내 공산세력이 크게 약화된 것을 슈티코프 대사의 보고를 통해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의 지원 필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스탈린과의 회담 이후 북한 지도부는 중국의 동의를 얻기 위해서 동분서주했다. 1950년 5월 13일 북한지도부는 북경을 방문하여 스탈린의 의견을 전했고 마오쩌뚱은 스탈린에게 사실여부를 확인한 후 북한을 돕겠다고 약속한다. 다만 미국이 참전할 경우에만 돕겠다는 입장이었다. 건국한지 1년도 채 안된 중국의 여력부족을 그대로 대변한 발언이었다. 이러한 사실들로 스탈린의 지령을 받은 마오와 김일성이 전쟁을 일으켰다는 전통주의적 해석은 균열이 생긴다.

먼저 전쟁 계획을 입안한 것은 북한이었고 김일성과 박헌영은 이를 위해서 중국과 소련의 도움이 필요해 1949년과 1950년 초까지 분주한 움직임을 보였다. 스탈린은 지시를 했기보다는 상황변화에 따라 북한의 제안에 동의를 해줬다는 게 더 정확하지 않을까? 중국 역시 내부의 여러 복잡한 문제 때문에 분명 한반도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상황도 아니었다. 결국 북한 지도부의 결심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한다.

현재까지의 사료를 종합해보면 분명 전면전을 결정한 것은 북한 지도부였다. 다만 그 주된 역할을 한 게 김일성인지 박헌영인지에 대해서는 좀 더 세밀한 분석이 요구된다.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을 쓴 박명림은 사실상 두 사람의 공동결정이었다고 보고 있다. 박명림은 구체적인 전쟁논의가 북·소, 북·중간에 이뤄지는 내내 김일성과 박헌영이 항상 그 결정 과정을 같이 했고, 초기 북한정권이 남로당계와 북로당계의 연립정권 성격이 짙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여기까지 북한과 소련·중국의 움직임을 살펴보면 남침유도설이 여러 가지 잘못된 가설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학계는 아직도 남침유도설을 완전 폐기해 버려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미국의 참전여부에 대한 스탈린과 마오쩌뚱, 그리고 북한 지도부의 오판문제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당시 소련과 북한의 지도부가 미군 참전이 없을 것이라고 오판하게 된 근거에는 1949∼1950년 사이의 미국의 움직임과 분명 연관이 있다. 이미 미국은 내부적으로는 유사시 한반도 문제에 적극 개입할 의사를 분명히 하고 있었다.

현재까지 확실한 것은 1950년 늦봄 당시 여러 세계 정세로 보아 북한, 소련, 중국은 미국이 한반도에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미국이 전쟁을 유도했다는 확실한 증거는 전혀 없다. 그러나 애치슨이 언급한 태평양 방위선에서 제외된 한반도에 전쟁이 나자마자 1주일도 채 안되어 지상 병력을 파견한 미국의 태도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또 전쟁이 발발할 거라는 여러 구체적인 정황근거와 정보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949년부터 1950년 초까지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던 미국의 태도(특히 미 극동군 사령부)는 여전히 의문스럽다. '미국은 기다리고 있었다'라는 심증을 완전히 떨쳐버릴 만한 반증이 없다.

왜 1950년 6월이었는가?

여기에 한 가지 더 고려해야 할 사항이 있다. 바로 1950년 들어오면서부터 남한이 급속도로 안정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출범 시 극심한 혼란을 딛고 이승만 행정부가 점차로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1950년 봄이 되자, 좌익세력은 대부분 검거되었고 빨치산 세력 역시 약화된다. 5·30 선거로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한 임정계열과 중간파들이 대거 합법정치 공간에 나왔다는 점도 대한민국의 안정에 고무적으로 작용했다. 군사적으로도 점차 정비되고 있었다. 1949년 말까지 많은 물의를 빚고 억울한 피해자가 나오기도 했으나, 숙군작업이 완료되었고 1950년 1월에는 한미 상호 군사원조 협정이 체결되었다. 곧 체계적인 원조를 위해서 조사팀이 방한했다.

아울러 미국의 경제 원조가 활성화되면서 1951년에는 총 1억 달러의 경제원조안이 승인되어 집행예정이었다. 그리고 해방이후 미군정의 경제 정책 실패로 인한 살인적인 인플레가 1950년을 기점으로 서서히 잡혀가고 있었다. 이를 계기로 그해 5월부터 미국의 본격적인 자금 투자계획이 실시되고 있었다.

1950년 3월 남한 대다수를 차지했던 농민들의 숙원인 토지개혁이 완료되었고, 농민 봉기의 가능성은 매우 희박해졌다. 당시 남과 북의 토지개혁의 실질적인 효용가치는 분배방식의 근본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비슷했었다는 점에서 대다수 농민들이 대한민국정부에 불만을 품을 소지는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결국 이와 같은 남한의 상황 변화가 북한 지도부에게 전쟁을 한시라도 빨리 일으키도록 재촉한 것은 아닐까? 시간이 흐를수록 북한에게는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을 것이다. 1949년부터 대한민국 정부는 공공연하게 북진통일을 주장해왔고 이에 대해서 슈티코프대사가 소련에 보낸 보고서에 의하면 북한은 이러한 남의 주장을 실제로 가능한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이 단순한 선전이 아니라 실제로 계획이 진행되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실제 당시 한국군 내부에서도 공격 일자가 잡혔다는 말이 오갔다는 기록이 있고 채병덕 참모총장의 북진통일 준비완료 발언이 신문기사화 되고 있었다.

물론 남의 선제공격이 있을 거라는 북한 지도부의 생각이 남침을 결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주요한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어쩌면 당시의 남북 관계는 현재 북한과 미국 사이에서 벌어지는 안보 딜레마의 모습과 그대로 닮아 있는지도 모른다.

어느 한쪽이 공격해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양쪽 모두 '방어'에 신경을 쓰다가 결국 최선의 '방어'를 위해서 '공격'이 더 좋을 거라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남한이 점점 안정되고 국군은 증강되고 있는데, 남한 정권이 계속 북진통일을 입에 담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은 여러 가지로 생각이 복잡했을 것이다. 당시 남과 북 모두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의 차이는 능력의 유무였을 뿐이다.

여전히 남는 의문들...

지금까지 세 편에 걸쳐서 남침유도 설을 중심으로 한국전쟁의 발발기원을 살펴보았다. 논의는 분분하지만 아직 정답이 없고 의문투성이다. 다만 1992년 비밀이 해제된 구 소련의 문서자료로 우리는 남침이 어떻게 구체화되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1949년부터 1950년 봄까지 도쿄의 미 극동군 사령부는 인민군이 지속적으로 전면전을 준비해왔으며, 1950년 5월부터는 전면전을 위해서 대대적인 이동을 개시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미국이 정말 전면전을 막고자 했다면 맥아더 원수의 경고성 성명서 하나만으로도 충분했었다. 요컨대 김일성은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이미 최전방 관측에 의해 1950년 초부터 인민군이 전면전 준비상황에 접어들고 있다는 보고를 모든 전선에 걸쳐서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왜 채병덕 참모총장은 6월 초 대규모 부대장 인사이동과 부대배치 변경을 단행했는지, 이승만은 처음 전면전 남침 보고를 듣고 왜 그토록 침착하고 느긋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덧붙이는 글 | 다음회에서부터 본격적인 전면전을 다루겠습니다. 그 시작으로 모두가 실패한 이상한 전쟁 1편 인민군 편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인민군의 3일만의 서울점령이 과연 빛나는 승리이자 성공이었을까를 실증적으로 검증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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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에 관심이 많은 역사학로 우리현대사 최대의 사건이었던 한국전쟁사에 대해서 좀 더 대중적인 이해를 돕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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