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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안기부 도청팀인 '미림' 팀장 공운영씨가 1999년 국정원에 반납했다는 200여개의 녹음테이프와 녹취록을 넘겨받은 전 국정원 감찰실장 이건모씨(60)가 입을 열었다.

이씨는 "(도청자료가) 세상에 공개되면 상상을 초월할 대혼란이 일어나고 정치·경제·사회 전 분야가 붕괴될 것이라고 판단해 전권으로 소각했다"며 "내용은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단다.

훌륭하다. 이씨에 따르면, 한마디로 이 사회의 붕괴를 이씨의 입이 저지하고 있는 셈이다. 앞으로는 부패하려면, 정말 제대로 부패해야할 모양이다. 기왕이면 사회 붕괴와 관련될 정도로. 그래야 사회 붕괴를 원하지 않는 이씨 같은 분들이 온몸으로 그 부패를 은폐해줄 것이 아닌가?

존 밀턴은 말했다. "진리는 승리를 위해 정책도 전략도 허가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 것들은 오류가 진리의 힘에 대항하기 위한 속임수이며 방어책일 뿐이다." (존 밀턴, 임상원 역, <아레오파지티카>, 나남출판, 1998, p 152)

이씨의 말 앞에서는 존 밀턴의 "절대자 다음으로는 진리가 무엇보다 강하다는 것을 어느 누가 모르겠는가?"(같은 책 p152)라는 말이 무색하다. 이젠 절대자까지 갈 필요도 없겠다. 우리에겐 모든 사안을 알아서 판단해주시고, 사회 안정을 걱정해주시는 철인 이건모 씨가 계시지 않은가?

사회 붕괴 운운하면서까지, 침묵과 허위의 힘을 신뢰하는 이씨 앞에서, 우리는 할 말을 잃는다. 침묵이 아니면 지탱할 수 없는 부패 사회의 끔찍한 단면을 보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대체로 착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부패했다" 전북대 강준만 교수가 한국 사회의 부패상에 대해 한 말이다.(강준만, <머리말>, <한국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1권>, (인물과 사상, 2003, 14 ∼16쪽) "자신이 부패했다는 걸 느끼지 못할 정도로 '부패의 생활화'가 너무 오랜 세월 동안 이루어져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촌지'에서부터 연고와 정실에 의한 봐주기를 '사람 사는 인정' 쯤으로 가볍게 생각"하는 것을 강준만 교수는 꼬집었다.

강준만 교수는 말한다. "한국인의 부패는 한국인의 인성인가? 아니다. 그건 처절한 '생존술'이었다. 집권세력이 위에서부터 밑에까지 다 썩어 있다면 보통 사람들이 무슨 수로 생존을 꾀할 수 있을 것인가?"

"X파일 공개 땐 전사회가 붕괴"한다는 이씨의 말은 우리가 아직 부패에 찌들어있는 독재 국가에 살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집권세력이 위에서부터 밑에까지 다 썩어 있기에 보통 사람 주제에 부패하지 않고서는 생존을 꾀할 수 없는 시대. 아직까지도 우리는 지도층의 치부를 말하면서 사회 붕괴를 걱정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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