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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사회책임'의 숨겨진 독선과 배타적 자기인식

지난 11월 '기독교사회책임'이라는 보수적 기독사회운동이 출범했다. 우리 사회가 극심한 위기와 양극화를 겪고 있으며 이에 대한 대안이 시급하다는 인식 아래 집결한 보수적 기독교 인사들의 움직임이 세력화 내지 가시화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이 새로운 우파 운동으로 전개되면서 한국사회의 역사적 진전을 가로막지 않을까 하는 우려와 함께,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일고 있다는 점이다.

▲ ▲기독교사회책임이 11월 22일 명동 YWCA회관에서 출범 기자회견을 가졌다. 김진홍 서경석 오정현 목사 등 30여 명의 참여 위원들.
ⓒ 뉴스앤조이 신철민
뿐만 아니라 내부적으로도 자신들의 정체성이 확실하게 정리되지 못하고 있고 애초에 참여하리라고 언급된 인사들이 주춤거리거나 또는 소극적 자세를 보이고 있어 이 운동의 장래도 불투명한 상황에 처해 있음을 내다보게 된다.

우선, 기독교사회책임 출범 선언문의 문제부터 짚어나가 보자. 그 선언문의 출발은 이렇게 되어 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 어려운 시기에 나라와 민족을 살리고 교회가 바로 서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독교사회책임' 운동으로 부르셨음을 자각한다. 이에 우리는 하나님의 전에 엎드려 눈물로 회개와 결단의 기도를 드리면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이 운동을 출범시키고자 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운동을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어려운 시기에 나라와 민족을 구하는 동시에 교회를 바로 세우는 목표와 사명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타자의 잘못에만 그 비판의 화살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교회 내부에 대한 회개운동을 기초로 하여 사회운동의 책임에 대한 결단의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당연한 주장이며 입장 천명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이미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전개 중인 역사와 사회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책임을 감당하는 것에 대한 인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환경 위기를 선포하며, 기독교적 소명에 따라 온몸을 던진 성직자들이 있고, 흉물스러운 역사 유물인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해 분연히 일어선 기독인들도 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한국 교회의 현실에 대하여 회개와 질타를 하면서 새로운 진로를 외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이들 '기독교사회책임'을 구성하고 나선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들 성직자와 기독인들이 사회와 역사의 책임을 감당하며 고난과 질고를 겪을 때 철저히 침묵으로 일관했고 어떤 경우에는 도리어 비난의 화살을 쏘기도 했다.

따라서 과연 이들이 이러한 사명의식을 내세워 역사와 사회에 대한 책임을 운운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진정 정직한 자세를 취한다면, 이미 선각자적으로 기독교적 사회책임을 먼저 깨닫고 나선 분들에 경의를 표하고 그 뒤를 따르는 노력을 제대로 하지 못했음을 회개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들의 시국인식은 또한 어떤 것일까? 현실을 어떻게 파악하고 진단하는가는 결국 그 해법의 내용을 채우는 것이 되므로 이 시국인식은 매우 중요하다.

"지금 우리 나라는 과거 어느 때보다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IMF 외환위기 이후 경제적 양극화로 인해 서민경제는 피폐해지고 국가경쟁력은 지속적으로 약해지고 있다. 성장 잠재력은 정치논리와 관치에 의해 유린되고, 기형적 재벌구조와 전투적 노조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 더욱이 기업인은 투자를 하지 않고 노동자는 자기 이익만을 고집하는 한국병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로 인해 중산층 몰락, 절대빈곤층의 급증, 대규모 청년실업이 초래되어 우리 국민은 큰 고통을 겪고 사회불안은 증폭되고 있다."


경제적 양극화와 서민생활의 피폐화, 그리고 국가경쟁력의 약화는 분명하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 원인 분석과 진단에 문제가 드러난다. 성장잠재력이 정치논리에 의해 유린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애매하다. 아마도 정치권의 정쟁이 사회적 성장잠재력을 갉아먹고 있다면 이해가 될 것인 바, 정치논리의 개념이 어떤 정체를 가지고 있는지는 이 말로써는 요령부득이다.

선언문은 이와 함께 성장잠재력에 대한 위해적 요소로 '관치'를 꼽고 있다. 정부가 시장에 관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분석은 오류이다. 오늘날 시장경제의 문제는 정부의 관치가 아니라 외국자본 주도형 시장에 기인하고 있으며, 도리어 적절한 정부의 관리가 요구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규제완화라는 이름 아래 시장의 종속경향은 가속화하고 있으며 자본위주의 정책으로 서민들과 노동자들의 삶은 더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말로는 서민경제를 걱정하면서 정작 서민들의 질고, 그 근본원인은 엉뚱하게도 다른 방향에서 짚고 있다.

그 다음은 더욱 기이하다. 성장잠재력에 훼손을 가하는 요인을 분석하면서 기형적 재벌구조를 지탄하는 가운데 양비론에 사로잡혔는지 '전투적 노조'를 위기의 주범으로 몰고 있다. 재벌구조는 그 자체로서 이미 기형이며 새로운 방식으로 재편되어야 마땅하다. 여기에는 이론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전투적 노조'라니? 노조가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나, 그들의 진정한 주장과 이해를 제대로 경청하고 나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일까? 그 이후에 따라오는 말은 더욱 경악스럽다. '노동자는 자기 이익만을 고집하는 한국병'이란 말은, 노동자들의 권리주장은 병이라는 것이다.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에 빠져 있다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노동자들은 자기 이익을 포기하고 자본의 이익에 굴종해야 하는가? 노동자들의 삶의 현실이 고달프고, 그것은 서민경제가 무너져가고 있는 상황 그 자체인데 이를 한국병 운운하며 질타하는 자의 손가락은 도대체 누구를 향하고 있는 것일까?

기업인들이 투자하지 않는 이유는 설명하지 않은 채 그 다음에 전투적 노조를 거론하고, 이어 "이로 인해 중산층 몰락, 절대빈곤층의 급증, 대규모 청년실업이 초래되어 우리 국민은 큰 고통을 겪고 사회불안은 증폭되고 있다"고 하니 그 책임의 상당 부분은 노조가 져야 한다는 논리가 된다.

중산층 몰락과 절대빈곤층 급증 등은 모두 양극화, 즉 빈익빈 부익부의 결과이며 결국 부유층의 증가와 빈곤층의 증가가 서로 맞물리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정부의 정책을 자본위주로 몰아가고 있는 이 사회의 보수 세력들의 목소리가 먹힌 결과인 것이다. 서민경제는 붕괴하고 있는데 보수적 상류층은 잘 살고 있는 나라, 그것이 이 땅의 현실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 책임을 따질 때 이 사회의 부유한 보수 세력들은 그 책임이 면제된다는 것일까?

위기 진단의 두 번째 측면을 보자.

"위기의 또 다른 측면은 국민적 합의가 외면당하고 있는 점이다. 현 정권이 국민통합과 민생안정을 염원하는 국민의 뜻을 따르기 보다는 정략적으로 개혁과제를 밀어붙이고 있어 국론분열과 이념적 양극화가 심각하다. 여기에 국가정체성에 대한 의문과 불안까지 가세하는 형편이다."


위기진단에서 이 선언은 국민적 합의가 외면당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는 참여정부라고 하면서 사실 이라크 파병을 비롯하여 큰 사안에 대해서는 민주적으로 국민적 합의를 거치지 않는 태도를 무수히 드러냈다. 이는 백번 질타를 받아도 옳다. 그러나 개혁과제를 정략화하고 있다는 점은 동의하기 어렵다. 도리어 이 개혁과제를 정략적으로 봉쇄하고 있는 것은 이 나라의 보수세력과 수구적 정당세력들이다.

국론분열 운운하지만 전환기적 과정에서 이론이 없을 수 없고 그것은 새로운 단계로 가기 위한 필연적 절차이다. 국론분열은 이미 기존의 국론이 있고 그것이 옳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개념이다. 그렇다면 구시대적 국론에 대한 저항과 변화를 꾀하는 것은 모두 국론분열행위로 매도될 것이다. 이 선언은 그러한 입장에 서서 새로운 변화의 요구를 분열행위로 몰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또한 이념적 양극화 현상의 진실은, 낡은 이념과 질서 그리고 가치를 고수하려는 자 또는 세력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고 세상은 급속하게 달라지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지 의도적인 양극화는 아니다. 현실은 도리어 수렴화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당에 가 있을 법한 인사가 저 당에 가 있고, 저 당에 가 있을 법한 인사가 이 당에 있다. 게다가 여러 정책의 골자는 그리 크게 어긋나고 있지 않다.

'국가정체성' 운운하는 논리는 국가보안법 철폐와 관련한 논의에서 노무현 정부를 공격하는 냉전형 보수세력의 논지이다. 이 선언에 등장하는 '불안'은 사회의 역사적 주체세력이 교체되는 현실에 대한 일부 보수세력들만의 불안이지 '역사의 불안'은 결코 아니다. 결국 기독교사회책임은 냉전형 보수세력의 논리를 답습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이들은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로 인해 국민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고, 돈과 사람이 끊임없이 해외로 유출되고 있다. 이러한 징후들은 우리에게 우리 나라가 후진국으로 갈 것이라는 우려를 안겨주고 있다. 그러나 여권에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야당 역시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절망을 극복할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또한 시민사회도 양극화되어 한편에서는 이념적 편향을 가지고 정부방침에 따르기만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극단적 비판만 하고 있어 어디서도 사회통합과 합리적 대안모색은 찾아보기 어렵다. 게다가 지식인들은 인터넷 언어폭력의 위세 앞에서 침묵하고 있어 희망을 주지 못하고 있다."


이 나라는 더 이상의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당만 비판하지 않고 야당인 한나라당도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현재의 시민사회 운동도 대안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식인들은 나약해지고 있어서 그들에게 기대할 바가 없다고 한다.

결국, 정부와 여당도 답이 아니고 야당인 한나라당도 대안세력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으며 시민사회단체나 지식인들도 다 이 시대의 책임을 감당할 만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구국의 일념으로 나섰다고 밝히고 있다. 사회적 통합을 주장하면서 그 내부의 논리는 '숨겨진 독선과 배타적 자기인식'이 자리해 있다. 자가당착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논리적 기초로 기독교사회책임이 내세우고 있는 목표 내지는 당면 과제를 살펴보자. 이들의 주제어는 '선진'이다. 그 선진을 위해서 매진하자는 것이다. 이는 "21세기형 근대화론"을 떠올리게 한다.

'기독교사회책임'은 우리 나라가 위기에서 벗어나 선진국의 대열에 진입할 수 있도록 특별히 다음 네 가지 과제에 역점을 두고자 한다.

그 첫째 과제가 국민통합이다.

"우리 사회의 이념갈등과 국론분열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한다. 좌우 양극화와 편 가르기로 고통을 겪는 우리 사회를 하나로 통합시키고 우리의 관심을 대립에서 대화로, 과거에서 미래로, 폐쇄사회에서 열린사회로 전환하도록 한다. 이를 위해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경쟁력강화와 사회적 형평, 환경보존과 개발의 조화를 추구하고, 자주적 세계화와 열린 민족주의를 지향한다.”

편 가르기나 좌우 양극화가 현재 국민통합의 걸림돌일까? 그렇지 않다. 과거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세력과 그것을 넘어 새로운 미래를 창출하려는 세력의 인식이 충돌하고 있는 것이 가장 근본 아닌가? 그럼에도 이들은 과거의 족쇄를 풀고 나가려는 의식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이들이 내세우는 여러 가치를 가로막고 있는 과거 역사의 유산을 털어나가려는 의지는 경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 과연 통합의 기초가 세워질 것인가? 낡은 것은 버리고 새 것을 취하는 과정은 거저 되는 것이 아니다. 낡은 것을 붙잡고 있는 자들이 여전히 주인 노릇을 하려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둘째로 거론하고 있는 것이 경제위기 극복이다. 당연하다.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민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 공정한 시장경쟁 원리에 기초하되 포퓰리즘적 문제 해결을 거부하고, 창의와 자율이 보장되는 자유시장경제를 적극 지지한다. 동시에 부패와 특권의 척결을 통해 경쟁력을 강화하고, 투명한 경영과 노동자의 이기심 억제를 통해 기업의 희망을 창출하고, 소외계층에 대한 관심과 나눔운동의 활성화를 통해 민생문제 해결에 힘쓴다."


포퓰리즘적 해결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민심에 추종한다는 의미이겠으나 그것은 사실 서민들의 입장에 서서 풀어가는 경제정책에 대한 비판이 은폐된 단어이다. 경제위기 해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경제적 양극화를 조성하고 있는 일부 특정 계층 위주의 정책부터 고쳐나가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시작하는 것은 민생경제 파탄과 사회적 양극화를 걱정하는 논리 자체가 기만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에 다름이 아니다.

세 번째로 드는 것이 한반도 평화이다. 사실 이 문제야말로 가장 절박한 과제이고 우선적으로 풀어가면서 전체를 안정시켜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세 번째 순위로 거론함으로써 이들의 역사인식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도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을 다른 독립 항목으로 내세운 것이 아니라 사회 안정과 함께 추구하면서 노인공경까지 거론하는 것은 이들의 가치관이 얼마나 산만한가를 보여준다.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 그리고 사회 안정을 추구한다. 한미관계의 우호와 평화적인 남북관계를 함께 추구하고, 남북협력문제와 북의 인권문제를 함께 중시하고, 안보와 평화가 분리될 수 없음을 명확히 한다. 동시에 법치와 질서, 가정중시와 노인공경, 인터넷 언어폭력으로 위협받지 않는 자유로운 의사발표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건강한 공동체의 회복에 앞장선다."


한반도의 평화가 지금 진전을 보지 못하는 근본 원인, 즉 미국 부시 정권의 네오콘들이 보여 온 강경 군사주의 정책에 대한 비판은 눈을 씻고 봐도 없다. 앞에서 자주적 세계화를 논하면서도 자주적 민족정책에 대한 인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기조와 자세를 가지고 한반도 평화를 확보해나가겠다는 것인지 그 인식의 실체가 매우 허약하다. 이것은 한반도 평화정책을 논하는 전문가들의 가치체계에 비해서도 훨씬 낙후한 내용이다. 이런 것으로 과연 이 시대를 선도할 수 있다고 스스로 내세울 수 있을까?

이런 논의를 전제로 하여 이들이 내세우는 비전은 다음과 같다.

"단지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일에 그치지 않고 보다 밝은 미래를 위한 설계에 총력을 경주한다. 우리의 미래가 경제적으로만 선진국이 아니고 삶의 질이 보장되고 영적으로 충만하며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보존되고 이웃과 함께 나누는 선진국이 되도록 새 하늘과 새 땅을 위한 비전 제시에 총력을 경주한다."


좋은 이야기이다.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지금까지 따져본 내용으로 이러한 목표를 비전으로 이루어 나가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게다가 이들 운동을 이끌고 있는 주역 가운데 하나인 김진홍 목사는 이 운동을 뉴 라이트(New Right), 즉 신 우파 운동으로 규정하는데 서슴지 않고 있다.

▲ 김진홍 목사
ⓒ 뉴스앤조이
그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서경석 목사를 비롯한 일부 인사들은 자신들의 이 운동을 중도통합론으로 내세우고 있는 것과는 상호배치되고 있다. 내부의 논란과 정체성 확보에 진통을 가늠하게 하는 대목이다.

다음은 11월 27일에 배달된 김진홍 목사의 '두레뉴스' 전문이다.

"지난 여름엔가 노무현 대통령이 연세대학교에서 강연할 때 한국의 보수에 대하여 언급한 적이 있다. 그때 노 태통령이 '보수는 뭐니 뭐니 해도 고치지 말자는 것이 보수다'는 내용의 발언을 한 기억이 난다. 노대통령이 지적한 보수는 말하자면 우리 현대사회에서 줄곧 '주어진' 보수였다. 그간에 권위주의적인 정치 체계, 남북 관계, 냉전 체제 등에 의하여 강요되었던 보수였다. 그리하여 반공과 친미와 독재가 보수의 전부인 것처럼 인식되어 왔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우리 사회에 참된 보수에 대한 반성이 일고 있다. 이른바 '뉴 라이트' 운동으로 불리고 있는 새로운 보수 운동이 그것이다.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보수 운동의 대표적인 예가 본인이 참여하고 있는 '기독교사회책임' 이나 주사파(主思派) 출신들이 중심이 되어 전개하고 있는 '자유주의 연대'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사실 '뉴 라이트' 운동은 그간에 학계, 법조계, 시민 단체, 인터넷 미디어, 그리고 정치권 일부에서까지 일고 있는 조짐이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새로운 보수 운동을 '뉴 라이트'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동아일보>이다. <동아일보>는 11월에 들어 '뉴 라이트' 운동이라는 제목으로 새로운 보수 운동을 시리즈로 엮고 소개한 바 있다. 동아일보의 이런 노력을 시작으로 하여 '뉴 라이트' 운동은 이제 우리 사회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고 있다."


김진홍 목사는 비신앙권에서 일어나고 있는 우파 운동의 개혁, 자유주의연대와 동일선상에서 '기독교사회책임'을 논하고 있다. 보수에 대한 반성 운동을 전제하고 있으나 결국 그 보수는 우파인데, 그 내용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어쨌든 '기독교사회책임'은 우파를 지향하는 것이자 그로써 스스로 이념적 양극화를 극복하겠다는 논리와는 상호 모순 되는 논리를 펴고 있는 셈이다.

▲ 서경석 사진
ⓒ 뉴스앤조이
이러한 뉴 라이트의 원조인 미국은 어떤 모습이었는가? 1960년대 이후 미국사회는 반전평화운동과 민권운동, 여성운동, 문화운동(우드스탁woodstock, 히피), 신좌파의 등장 등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그때까지 지탱해왔던 기존 질서가 무너지면서 전통적 가치관과 가부장적 문화, 백인위주의 사회적 질서와 미국이 중심이 된 세계질서의 재편 과정에 대한 반발과 비판이 용솟음치는 시기를 지나게 된다. 특히 베트남 전쟁 반대운동은 여러 운동이 결집하면서 격렬하게 나타난 현상이다.

이와 맞물려 신학도 중요한 변화를 겪는다. 이른바 '자유주의 신학'이 교리적 신학에 대한 반기를 들었고, 1968년 미국에서는 흑인신학이 등장했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해방신학이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주변부로 생각되었던 세력의 자기표현이 강력하게 이루어져갔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보면서 보수세력은 위기 의식을 느끼게 된다. 기독교 근본주의와 네오콘의 집결이 이루어지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세력은 60년대 이후, 30∼40년 동안 성장하면서 군사주의 세력과 만나게 되는데 그것이 네오콘과 기독교 보수주의, 부시 체제라는 3각 편대를 형성한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오늘날 부시정권의 중요한 축이 되었다.

기본적으로 근본주의자들의 생각에 미국이라는 나라는 그냥 미국이 아니라 애초에 청교도 정신을 바탕으로 하나님이 복을 주신 언덕위에 세워진 나라(city of God under hill)이다. 단순히 국제경찰이라는 역할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빛과 같은 존재(등대)이고 그러한 역할을 담당하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있는 나라다.

하여 미국은 이 세상의 문명의 수호자로서 역할을 감당하는 국가이고 하늘의 소명을 받아 악을 응징하는 것을 용기 있게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다름 아닌, 미국이 하늘부터 부여받은 국가적, 신앙적 사명이라고 보고 여기에 투신해나가는 것이 근본주의 신학이 목표로 하는 골격이다.

베트남 전쟁 같은 경우 이에 대한 역사적 교훈 논쟁은 두 가지로 갈라진다. 하나는 이 전쟁이 미 제국주의 식민지 전쟁이기에 이에 맞선 베트남 민족해방 투쟁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흐름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전쟁이었는데 투철한 사명감을 갖고 가지고 있는 물리적 역량을 끝까지 밀고 나가지 못했기 때문에 패배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 후자가 바로 네오콘의 생각이다. 이들은 그 이후 미국은 패배주의에 젖었으며 이러한 패배주의를 극복하고 하나님이 주신 새로운 사명을 다시 한 번 일으켜 세워 역사 속에서 중심이 되자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미국 근본주의의 신학적 사명과 하나가 된다.

이들은 미국이 기독교 국가로 하나님이 맡기신 특별한 사명이 있으며 공산주의 세력과 같은 악에 대해서 쉽게 물러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악은 종교적 개념으로 확정되어 있고 따라서 설득과 대화의 대상이 아니라 응징의 대상일 뿐이다. 그러기에 '악의 축'이라는 전략은 종교적 신념체계와 결합되어 있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하나님이 인정하신 선의 도구이고 자신들은 하나님나라를 수호하는 거룩한 전쟁(聖戰)의 전사인 것이다. 이슬람의 지하드와 하등 다를 바가 없다. 이것이 근본주의 신앙의 투쟁관이고 역사관이다.

따라서 테러와 같은 악에 대해 순교자의 정신으로 용기를 내지 않으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악에 대해 협상을 한다거나 뒤로 물러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쉽게 물러나는 것은 용기가 없는 것이고 악과 싸울만한 선에 대한 확신과 믿음과 담대함이 결여된 것이다.

헤겔 우파의 사상가인 프란치스 후쿠야마는 냉전체제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경쟁의 시험장이었는데 자본주의가 승리했으며, 역사라고 하는 것은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결국 미국을 발견하기 위해 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미국은 모든 역사의 최종점이며 이후 더 이상의 역사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역사의 모든 과제와 꿈과 사명을 최종적으로 집결시킨 국가로서의 미국, 이것에 대한 신학적 이해가 미국 근본주의에 깔려 있다. 60년대의 미국 사회의 진보적 변화는 미국사회의 근본을 흔들었고 기독교의 절대 가치에 대한 모독을 했을 뿐이라고 비난한다. 이들에게 있어서 진보신학이 얘기하는 다원주의는 기독교의 근본적인 가치를 뒤흔들어놓은 것이기에 이에 대해 반격을 가한다.

레이건 이후 기독교 보수주의 세력들은, 클린턴 시절에 일정 기간 퇴각당하지만, 기독교 우파의 정치화를 꾀하면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과거에는 기독교가 정치에 대해서 발언해서는 안 되며 영적 차원에서 접근해야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회적, 정치적 영향력으로 나가야 한다고 의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꾸준히 정치 세력화되면서 이번 대선에 기독교 보수주의자들이 결정적 변수로 작용한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이들이 이른바 벤치마킹하고 있는 '기독교사회책임'을 비롯한 뉴 라이트 세력은 그 밑바닥에 정치세력화의 시나리오를 깔고 있다는 혐의를 가질 만하며, 이 사회의 기득권 세력이 역사적 변화 앞에서 새로운 생존전략으로 선택한 것이자 미국의 전쟁정책과 깊이 연결될 우려가 있는 것이다.

이들 기독교사회책임은 이라크 파병 대신 민간 재건단을 보내자고 주장하면서 자신들이 이라크 파병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근본적으로 이 전쟁의 침략적 성격을 논의하기를 기피하고 있다. 게다가 미국의 패권적 정책에 대한 비판도 제기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이들의 예수 이해는 옳은가? 예수는 기본적으로 기득권 질서의 편에 서지 않았다. 사회적 약자들의 자리에 섰던 것이다. 보수와는 거리가 멀고도 멀다. 따라서 예수 이해에 대한 기본을 세워 이들 근본주의 신학에 대처해나가야 한다. 근본주의 역사관과 신앙관을 가진 사람들이 역사적 예수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더더군다나 하나님 나라의 평화와, 미국의 전쟁정책은 어떻게 조화를 이루게 될 것인가? 평화를 논하면서 전쟁에 대한 근본적 비판의지를 갖지 않는 세력들의 사회와 역사에 대한 책임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책임이 될까? 정치적 의도까지 내밀하게 개재되어 있다면 그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은 어디일까?

실로 우리는 이러한 '기독교사회책임' 류의 보수적 기독교 사회운동에 대한 신학적 대응이 절실한 상황에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향후 우리 사회는 매우 심각한 양분화와 혼란을 겪으면서 역사의 진로에 중대한 장애가 발생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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