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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은 하나의 반성이며, 반성의 재료는 낯선 것이 좋다.
- 당뇨가 발병하면 눈물에조차 당이 들어있을 수 있다. 오, 분비의 역설이여!


우리는 어떤 현상을 보며 병리적이라고 하거나, 특정한 사람을 두고 병적이라고 규정한다. 과연 병리적이란 것은 무엇인가. 병든 상태란 무엇이며 어떤 것을 병적인 것으로 규정해야 하는가. 병리적이란 지속적인 고통을 느끼는 상태인가? 고통 이전의 원상태로 환원하고자 하는 상태인가? 병리적인 것은 사회로부터 격리해야할 상태인가? 완전한 건강은 존재하는가?

만일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는 어느 '정도' 병리적이다. 병리적 상황은 어떤 것의 결핍 혹은 과잉의 결과인가? 양의 증감에 따른 질적 변화가 생리적 상태를 병리적으로 만드는가?

병리적인 상황에 처해있는 이들은 대부분 사회의 약자이며, 우열 경쟁에서 밀려나 있는 존재들이다. 병리적인 것을 규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쉽게 해서도 안 될 일이다.

조르쥬 깡길렘은 생리학과 병리학의 실증적 사례들과 연구사를 짚어가며 병리적인 것의 정의에 가까워지려고 노력한다. 인간의 역사는 병리적인 것을 재정의해 온 과정인지도 모른다.

지거리스트가 지적하듯, 소화가 일어나는 동안 백혈구의 수는 증가하는데, 이는 감염 초기에도 그러하다. 따라서 이 현상은 그것을 유발시키는 원인에 따라 병적이기도 하고 생리적이기도 하다. 또 지속적으로 어떤 원인을 양적으로 변화시키면 질적으로 다른 결과들이 산출될 수도 있다.

브라운에 따르면 생명체는 흥분가능성이라는 특별한 성질에 의해서만 유지된다. 흥분가능성은 생명체로 하여금 자극을 받아들이고 이에 반응할 수 있게 해준다. 그에 의하면, 질병은 자극이 강한가 약한가에 따라 기능항진이나 쇠약의 형태로 나타나는 흥분가능성의 양적인 변화일 뿐이다. 당뇨병 환자에게 혈당은 그 자체로 병적 현상은 아니나 그 양에 있어서 그러하다.

하지만, 병적이라는 것이 다만 양의 문제는 물론 아니다. 위궤양을 병리적 현상으로 볼 때, 위궤양의 본질은 위산과다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위가 스스로 소화시킨다는 데 있다.

위장은 자신을 소화시키지 않고 소화할 때 정상적이다. 신뢰도가 우선이고 예민도는 나중이다. 레리슈에 따르면 건강은 자신의 육체를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다. 늘 병적일 때만 건강의 중요성을 절감하거나 '건강했었다'는 것을 느낄 뿐이다. 만일,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의 장기에서 신장암이 발견됐다면 그는 병리적이었나 아니었나.

깡길렘의 말처럼, 자신이 환자라고 느끼는 사람이 있기에 의학이 존재하는 것이지, 의사가 존재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의 병에 관해 아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를 병적인 인간으로 간주하고, 어떤 현상을 병리적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분명 편리한 일임이 틀림없지만 여기엔 분명 윤리와 가치의 문제가 선행돼야 한다.

정말 중요한 것은 질병과 죄를, 질병과 악마를 혼동하지 않는 것이다. 그럼 정상적이란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전통적으로는 규범적 혹은 규칙적, 항상성을 유지하는 것 등으로 설명돼 왔다.

깡길렘이 내리는 결론에 따르면, 이상이나 돌연변이는 그 자체로 병리적인 것이 아니다. 이들은 생명의 또 다른 규범을 표현한다. 나폴레옹의 맥박수는 그가 아주 건강할 때에도 1분에 40회 정도였다고 한다. 질병 또한 생명의 한 규범이다. 다만 어떤 의미에서 상대적으로 열등한 규범일 뿐이다.

환자는 규범이 없기 때문에 비정상이 아니라 만들어낼 능력이 없기 때문에 비정상이다. 육체에서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을 평가하려면 육체 너머를 봐야 한다. 난시나 근시 같은 결점은 농경 사회에서는 별 문제가 되지 않지만, 비행기 조종사에게는 비정상적인 '병리'현상이 된다.

그에게 병리학이란 평가를 정당화시키는 것은 병에 걸린 개인과 임상을 매개로 맺는 관계이며 결국 '객관적 병리학'에 대해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선언한다. 병리적인 것을 규정하는 것이 늘 오류를 겪어 온 것은 지나치게 객관적 정의에 몰두했기 때문이다.

푸코가 '광기는 이성의 결여가 아닌 또 다른 이성'이라고 말하듯, 질병이라는 현상엔 가치의 문제가 개입될 수밖에 없고 이는 의학의 차원이 아닌 철학의 문제로 환기된다. 푸코가 <광기의 역사>에서 언급했던 것이 이를 잘 뒷받침해 준다. 푸코는 깡길렘의 이 책 서문을 쓰기도 했으며 <광기의 역사>는 분명 깡길렘에 영향 받은 바 크다.

▲ 미셸 푸코, <광기의 역사>
ⓒ 나남
- "여행하려고 배에 오른 사람들이 보기에, 멀어져 가는 것은 배가 아니라 육지라네."- '광인들의 배'
- 예전에 나환자가 맡은 역할을 가난한 자, 부랑자, 경범죄자가 다시 맡게 되었다.
- 가역적 관계로 인해 모든 광기에 이성이 있고 모든 이성에 광기가 있다.
- 광인은 그 존재양태가 분명하지 않지만, '다르기' 때문에 의심의 여지없이 식별된다.
( 미셸 푸코, <광기의 역사> 중에서 )

깡길렘에게 생리적(정상적, 건강)인 것과 병리적인 것의 관계는, 푸코에게는 이성과 광기(비이성)의 관계라 할 수 있다. 인간에게 광기란 무엇이고, 누가 이를 판단하고 미친 사람들을 격리해 왔는지, 사회는 왜 구성원의 일정 부분을 항상 격리하고 싶어 하는지 탐색한다.

'미친 것'의 역사, 미친 사람들의 역사, 격리와 감금의 역사, 병리학의로서의 정신병을 정의해 온 역사, 정신병, 정신병자들의 역사, 인간의 광기에 대해 인간들이 보여왔던 역사의 광기를 다룬다.

푸코의 '정신병리학' 저술은 분명 깡길렘에게 영향 받은 바 크다. 광기는 인간 보편의 특징이며, 르네상스 시대까지 광기는 '질병'으로 분류되진 않았다. 근대 즉, 합리주의 시대에 들어와서 광기를 격리하는 방도를 강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떠한 치유도 생물학적 순수성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치유된다는 것은 생명의 새로운 규범(때로는 예전 것보다 우월한)이 주워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질병과 죄를, 질병(환자)과 악마를 혼동하는 일, 되풀이 되는 역사의 오류다.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

조르주 캉길렘 지음, 여인석 옮김, 그린비(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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