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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커덩 덜커덩… 통일호 야간열차는 어둠 속을 끝도 없이 달려간다. 사람들 앉아 있는 의자 등받이와 등받이 사이 작은 틈바구니 속에 우리들은 박혀 있다. 잠이 든 친구 하나는 무언가 꼭 품에 안는 시늉을 하며 뒤척인다. 우린 늦지 않았다. 우린 늦지 않았다. 서울에서 직장을 얻고 돈 벌어 못 다한 배움을 이어보자는 믿음을 서로 주고받으며 셋이서 섬을 떠나왔지만 얼굴 기색들은 피곤하고 낯설어 보인다. 꺼질 듯한 등불처럼 어두워 보인다. 지금쯤 섬에선 파도소리만이 밀려오고 밀려가겠지. 아, 어머니, 아들을 먼 타향으로 떠나보낸 어머니는 곤히 잠 드셨을까… 지금 나는 어디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가…

세상에 나오고서야 나의 입은 옮겨갔습니다. 변명해야 하는 세상에서 무엇이든 씹어야만 삭힐 수 있는 세상에서 퇴화된 나의 입은, 진정 소생하고 싶었습니다.

― 시, '배꼽' 전문 (첫 시집 <겨울삽화>에서)


▲ 김광선 시인이 주방에서 소곱창을 손질하고 있다.
ⓒ 김수열
2003년도 제3회 창비신인시인상의 당선자 김광선 시인(1961년생)을 찾아갔다. 대전광역시 법동에서 7년째 아내와 곱창집을 운영하고 있는 김광선 시인은 마침 긴 낭하 같은 주방에서 분홍빛 어린 소곱창을 씻고 있었다.

새하얀 주방복 차림에 '올백' 머리. 호호탕탕하고 시원한 모습으로 얼른 나와서는 콧수염을 길게 늘이고 웃는 그 특유의 웃음으로 반갑게 맞아준다. 보통 생각하는 시인의 풍모라기보다는 일견, 인정 많은 깡패 두목쯤으로 보이는 인상이다.

그가 태어난 곳은 목포시 대성동이다. 그러다가 세 살 때 미혼모였던 엄마를 따라 남쪽섬 나로도로 이주해서 열일곱 살 이른 봄까지 어린 시절을 보낸다. 엄마는 비탈밭을 부쳐먹고 의붓아버지는 통통배 한 척 없이 계속 남의 배를 타는 상황 속에서 이 눈치 저 눈치 보며 어렵게 어렵게 중학교까지는 마친다.

그러나 입 하나라도 줄여야할 만큼 절박해지는 살림과 자라고 있는 동생 둘은 진학을 포기하게 했다. 동급생들이 막 고등학교에 입학해서 공부할 즈음 학교에서 주는 상이란 상은 다 받던 소년은 섬을 떠나겠다고 결심한다.

어느 봄날 그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친구 둘과 함께 나로도에서 두 시간 동안 배를 타고 여수(麗水)로 올라온다. 서울에 가면 여관 방값이 비쌀 것이라는 생각에 기차에서 날을 때우기 위해 소년 김광선은 새벽 네 시에 서울에 도착하는 통일호 야간열차에 몸을 싣는다.

이미 중학교 때부터 내 삶을 소설이나 시로 쓰고 싶다고, 어린 나이에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볼만큼 조숙한 소년 김광선을 태운 열차는 앞날을 예상할 수 없는 인생 역정 속으로 달려간다.

물고기는 배에다 알을 배는데
종족을 보존하기 위한
아름다운 몸짓, 새끼를 치기 위하여
수초 사이 푸른 비늘 퍼덕이며
알을 배는데
일당에 몸 묶여 두 다리통
통통 알이 밴 나는
몇 마리의 새끼를 치나

― 시, '알' 전문 (첫 시집 <겨울삽화>에서)


"지관은 종이대롱이죠. 화장지나 접착테이프 속에 들어가는 두꺼운 종이대롱 말이에요."

낯설고 거대한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순진하고 어리숙한 섬소년이 처음 접하게 된 일은 지관(紙管)을 만드는 일이었다. 그는 영세한 가내 공업장에서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일하고 거의 매일 잔업을 열두 시까지 해 간다.

그의 배움과 문학에 대한 희망은 시작부터 거세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가 첫 월급으로 받는 돈은 1만8000원. 산동네 허름한 쪽방에서 자취하면서 점심으로는 50원짜리 노을빵에 맹물을 먹고 아침저녁으로 거의 김치 없이 라면을 먹거나 '오뎅 볶음'을 신물나게 먹으며 견뎠다.

"배움을 이을 수 없다면 밥이라도 실컷 먹을 수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버리듯 도망치듯 섬을 떠나올 때 가슴 한쪽에서 부풀고 있던 꿈은 어디로 갔는가? 지관공장에서 박봉과 격무의 배고프고 지친 나날을 견뎌오던 그는 밥 먹여주고 거저 잠 재워준다는 식당에 혹해서 취업한다.

그러나 밖을 내다볼 사이도 없이 밤늦게까지 주방에서 꼼짝 못하고 일하면 손은 뻘겋게 퉁퉁 불고 몸은 녹초가 되어 아무렇게나 방구석에 쓰러지는 고된 생활만이 이어진다. 역시 그에게 어떤 희망의 불씨도 지펴주지 못했다.

맺힌 곳 풀어야 하리 구구절절
넘어서는 고갯길 중모리 중중모리
땟국물 옷고름이 봄비처럼 젖어도
사그락사그락 댓이파리
자진모리 장단으로 휘모리 장단으로, 워따메에
제 가슴 훑어내렸지야

― 시, '남도 사람들' 부분 (첫 시집 <겨울삽화>에서)


"가수가 되고 싶었다."

그 때 이미 소년의 가슴에 쌓인 한은 응어리져 어떻게든 밖으로 풀어내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 가슴에 멍울처럼 남아 있는 시(노래)에 대한 막연한 열정과 막막한 그리움은 가수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게 한다. 그는 남보다 새벽 일찍 일어나 청소를 하고 오후 2시간의 비번을 얻어 가요 학원에 나간다.

ⓒ 김수열
그것이 인연이 되어 그는 모 유랑극단의 단원으로 들어간다. 지방을 순회하면서 무대에 오르기도 하면서 스무 살도 안 되어 쌓인 한을 트로트로 구성지게 토해낸다. '십팔번'이 무엇이었느냐는 질문에 "나훈아의 '물레방아 도는데'가 십팔번이었죠." 김광선 시인은 너털웃음을 웃으며 대답한다.

오늘 다시 재조립을 한다
뼈끝에 어스름 감겨드는 젊은 날
허물어진 구석구석 진물을 닦아 내고
탄력 잃은 용수철 갈아끼우고
놓일 자리 놓고 버릴 건 버리고 퍼렇게
퍼렇게 더욱
톱니바퀴에 삶의 체인
단단히 조여 매 본다.

― 시, '기계를 고치며' 부분 (첫 시집 <겨울삽화>에서)


그 이후 김광선 시인은 유랑극단 생활이 자신의 체질에 맞지 않음을 알고 다시 지관공장으로 터벅터벅 돌아온다. 안양, 용인, 대구, 군산, 대전 등지를 전전하면서 그는 지루한 관문의 연속처럼 지관공장을 옮겨다닌다.

노동으로 끊어질 듯한 생을 이어가면서 그는 배움과 문학에 대한 열정을 묵묵히 지켜간다. 그동안 쓸 거 안 쓰고 먹을 거 안 먹고 어렵게 모은 돈으로 부산에 있는 야간 전수학교에 들어간다. 그 때 노트에 소설과 시를 참아왔던 비애를 풀어내듯 빼곡이 써 갔다고 김광선 시인은 술회한다.

그러나 채 일 년도 안 되어 학업의 길이 막힌다. 어렸을 때부터 앓아온 병이 도진다. 골수에 세균이 감염돼 염증이 생기는 골수염이 재발해 대퇴부에서 고름이 흘러나왔던 것이다. 큰 수술을 해야 했다.

다시 어둑해진 희망은 절룩거리며 비틀거렸고 꿈은 닿을 수 없는 먼 고향처럼 멀어져 갔다. 어쩔 수 없이 울분 속에서 학업을 중지하고 지관공장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 때부터 그는 오로지 자신의 생 체험을 통해 시를 쓰겠다고 굳게 결심하고 문학 서적을 탐독해 갔다고 한다.

피고 졌어 밤이슬에 울음 깊었어
딱지 앉듯 여문 설움, 눈가에
떨굴 듯 야무지게 매달았어
헤풍데풍 꿈도 꾸지 않은 세상
목젖 뜨겁게 채워지는 것 있었어
숨 멎을 것 같이
비워낼 것 있었어

―시, '표주박연가' 부분 (첫 시집 <겨울삽화>에서)


1983년에는 세상을 떠나 절에 들어가 승려가 되겠다는 초탈한 마음도 가졌던 젊은 김광선에게 따뜻한 여인이 다가온다. 따뜻한 밥 먹으러 자주 들락거리던 밥집 여주인을 만나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다. 식당 여주인은 나이 터울이 큰 연상인데다 당시 4학년, 6학년이던 초등학생 남아(男兒) 둘을 데리고 어렵게 살아가는 상황이었다.

▲ 김광선 시인과 시인의 아내
ⓒ 김수열
"운명처럼 만났다."

자신도 의붓아버지 슬하에서 자란 김광선 시인은 아이들 딸린 연상의 아내를 1983년에 "운명처럼" 만났다고 말한다. 처음부터 연상인 것을 알고 시인은 장차 배우자가 될 여인에게 나이를 대여섯 올려 알려줬단다. 멀리 떨어져 앉아 수줍어하던 김광선 시인의 아내는 이 말을 듣고 눈물이 맺히는지 잠시 고개를 숙인다.

양쪽 집안에서 반대가 심했단다. 특히 아내의 집안에서 반대가 심했지만 곧바로 밥집을 그만두게 하고 아이들 데리고 쓸쓸히 월셋방 단칸방에서 살림 차렸단다. 나는 짓궂은 호기심이 발동해서 부부의 실제 나이 차를 묻고 싶었지만 그냥 꾸욱 참았다.

아이들은 처음부터 자연스럽게 부른 호칭 그대로 최근까지 '아저씨!'라고 부르다가 장가가기 얼마 전부터 '아버지!'라고 부른단다. 아이들을 키우고 가르치면서 만난 지 만 6년이 지난 1989년이 되어서야 미루고 미루던 결혼식을 올렸단다. 단 둘이 절로 가서 서럽게 올렸단다. 사진 한 장은 박아두고 싶어 사진관에 가서 수줍게 찍었단다.

억척스럽게 가리어도 윗풍 드는 살림
버팀목도 없이 땜질하듯
못질하고 못질해서 더 못칠 곳도 없는
젊은 날의 흔들거리는 자리

― 시, '문을 고치며' 부분 (첫 시집 <겨울삽화>에서)


공장을 옮길 때마다 기술은 붙고 월급은 올라갔지만 역시 사회는 그 만큼이나 그 이상으로 발전했고 그 만큼이나 그 이상으로 돈의 가치는 떨어졌다. 노조를 꾸릴 인원도 안 되는 공원을 데리고 착취를 일삼는 사업주에 맞서 파업을 주도하기도 했던 그는 1995년도에 이르러 거의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규모 없는 현실을 변화시킬 방법을 모색한다.

"식당에 한번 발을 들인 사람은 반드시 식당으로 돌아온다."

처음 식당 일하던 곳에서 떠날 때 주방 선배가 들려준 얘기를 심각하게 떠올린다. "내가 무슨 연어냐?"고 독한 마음으로 발을 뺐던 그였지만 날마다 '품 팔아도 가시처럼 걸리는 야윈 품삯'과 '바닥까지 보이는 바람 담긴 쌀독'(시, '가불'에서)은 일류 조리사가 돼보겠다는 강렬한 소망을 갖게 한다.

"주방장을 하면 월급도 나을 것이고 사실 그 당시 지관 일에는 신물이 나 있었다".

그는 요리학원을 몇 개월 다니며 무섭게 공부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증(證)인 한식 조리사 자격증을 취득한다. 학원에서 소개한 호텔을 시작으로 몇 개의 호텔을 거치면서 한식 요리를 배워가다가 몇 개 식당을 개업시켜 주기도 한다. 그러다 지금의 <고바우 곱창집>을 개업한다.

소 한 마리분의 내장을
부위별로 정리해놓고 가을도 끝난
나무 아래 섰다
아직도 그 선명한 빛이 가시지 않은
고기를 담근 통
한껏 흘려보낸 물빛처럼 노을이 피었다
물컹거리는 비린내보다도 허리의 통증
씻어내려 삼킨 막소주 한잔으로 모자라
담배연기 폐 깊숙이 밀어넣는다

풀풀 날린다 흩날릴 것도 없는
시푸르딩딩 겨울 초입 저녁나절
민망한 듯 잎새 몇 개 겨울나무 뜨악하다
몸짓만이 남았구나
바람 앞에서 초연할 수 없었던 의지
맨 가지로 빈 하늘 받치고 섰구나

찬물에 퉁퉁 불은 손을 쓰다듬는다
이 손끝에서
많은 사람들 포만하여 행복했을까
내 아직 푸른 수액은
어떤 혈관으로든 타고 흐를 수 있을까
찬밥덩이처럼 굳은 가슴 언저리
떨림도 없이 또 몇 잎
떨구는 까칠한 줄기 쓰다듬으며
다독이듯 내내 쓰다듬으며

― 시, <조리사 일기1 -겨울나무> 전문 (제3회 창비시인신인상 당선작 중)


"왜 하필 소곱창집이었냐?"고 소띠 시인에게 물었더니 시인은 "아주 간단하다. 이 법동 골목에는 곱창집이 없었다"고 활짝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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